W.MOMO

*커미션글입니다.
살아남아라.
그렇게 흔하디 흔한 대사 하나 얘기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육중하고도 무거운 철문이 믿을 수 없이 부드럽게 닫히는 순간 환하게 아이들을 비추어주던 빛들이 단숨에 삼켜진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훈련받은 성과를 발휘하듯이ㅡ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무리지어 앉았다. 그리고선 각자에게 주어졌던 아주 밤톨만한 식량을 움켜잡은 채 교관의 멱을 어떻게 딸지, 수근거리며 즐겁게 이야기하곤 했다.
이곳에서 살아나가는 것은 하나뿐이라는 말은 없었다. 그저 버티라는 말 뿐이었으니,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며칠이나 걸릴지 내기를 입에 올렸다. 와중 현명한 몇몇 아이는 숫자를 세기 시작하며 시간을 판단하고자 노력했고 소수의 아이들은 한숨을 내쉬며 그저 체력보충이나 하겠다고 구석에 자리잡아 앉아있곤 했다.
소년은 어떤 경우였느냐 하면ㅡ 불행스럽게도 그는 첫번째 부류였다. 물론 얼간이들처럼 무리를 지어 교관욕을 신명나게 하지는 않았으나 그 역시 분명 구석에서, 제 식량이 들어간 소박한 가죽주머니를 움켜잡은 채 교관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곤 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나간다면, 그리고 버티라는 그 허접하기 짝이 없는 명령을 완수해내면 꼭 가서 멱살을 붙잡고 탈탈 털어야지, 그대로 엎어치기도 하고 람각 연습 상대도 되어달라고 고집도 부리면서 있는 힘껏 괴롭힐 생각에 골똘하던 아이들이 조용해진 것은 나흘이 지난 후였다.
눈치 빠르고 영악한 녀석들은 제 식량주머니에 든 조그마한 빵 부스러기가 그 어떤 보석보다 귀중한 가치를 지녔음을 깨닫고 손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고 순박하고 상냥했던 아이들은 일찌감치 다른 아이들에게 빼앗겨 그 어떤 것도 먹지 못한 채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야금야금, 때로는 사납게 식량을 빼앗긴 아이들이 서넛, 일곱, 열둘, 스물에 달하기까지 단호하게 빛을 앗아갔던 철문은 열리지 않았다.
"열어! 빌어먹을, 열으라고!!"
쇠된 목소리로, 거친 호흡으로 굳건한 성처럼 서있는 문을 있는 힘껏 두드리던 아이들은 힘이 빠진 채 손톱이 다 빠진 손가락을 들어올렸고 아득바득 이를 악문채 피묻고 깨져 조각난 손가락으로 저주를 새겨넣은 아이들의 숨은 여느 날의 들꽃보다 더욱 허무하게 스러졌다.
그 아이들의 시체를 짓밟으며, 이제는 그 안에서 혹시라도 남은 식량이 있는지 찾아보려던 찰나 뒤에 있던 굶주린 아이가 달려든다. 높게 치켜올린 다리가, 한때에는 람각을 위하여 누구보다 힘차게 비상할 듯 올려졌던 다리가 겨우 반절까지밖에 올라가지 못한다. 그 다리로ㅡ 첫날에는 분명 소근거리며 다함께 교관에게 복수하자 말하였던 친구를 짓밟는다. 있는 힘껏 내질렀던 손가락이, 지건을 위해 뼈가 부러지도록 연습했던 손끝이 부족한 힘으로나마 생생하게 두근거리던 심장을 꿰뚫는다.
비명조차도 사치인 곳이었다. 굶주린 승냥이들은 느릿한 걸음으로 제 품속의 식량을 아주 조금씩, 떼어내며 짓씹었고 습격받은 아이는 부러진 이빨로 다른 녀석의 팔을 씹어먹는다. 그곳에서 흐르는 피에 일제히 바짝 마른 목을 축이려고 개처럼 달려드는 것도, 이제는 그렇게까지 이질적인 풍경이 아니었다.
함께, 다같이 나가자고 호소하던 녀석은 어느새 사방천지로 찢어져 이 창고 구석의 어딘가에서 나뒹굴고 있고 유독 이기적으로 굴었던 아이는 무리지어다니는 녀석에게 한꺼번에 물려 식량은커녕 사람의 형체조차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시체가 쌓이고, 그 안에서 들끓는 구더기와 파리들을 바라보며 한 아이는 헛웃음 지었다.
"쟤네는.. 배고프지 않.겠다..."
힘없는 목소리에 일순간 개떼가 되어버린 아이들의 눈에 연민이 일렁인다. 짐승과 금수보다 못해진 가여운 스스로와 친구, 가족보다 귀하게 여겼던 인연들을 스스로 잡아먹고 살아남은 자신들을 끔찍하게 혐오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이제 누구보다 스스로를 가장 증오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던 인연의 목에 이빨을 박아넣고 탐욕스럽게 찢어진 가죽 주머니를 낚아채고 그 안에 들은 손톱만한 빵 부스러기에 헐떡거리며 입 안으로 털어넣는 스스로를 가장 혐오하기 시작했다.
소년, 마찬가지로 금수가 되어버린 소년 또한 스스로의 생에 가치가 있는지 골똘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저 멀리 누군가의 숨이 꺼지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니까. 아직 힘이 남아있는 녀석은 부러 숨이 끊어진 척 힘없이 연기하고 다가오는 녀석의 목덜미를 물어뜯었으니 또 감히 다가설수도 없는 곳이었다.
고독, 소년과 아이들은 그곳에서 자신의 고독과 싸웠다. 형편없는 가치로 전락하고 그저 허울좋은 것이 되어버린 제 존엄을, 생명의 숭고함 따위를 땅바닥에 내던진 채 귀신의 눈으로 이리저리 누군가 죽기를 기다릴 뿐인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단 둘만이 남았다고 생각되는 때, 소년은 오래도록 일어나지 않았던 몸을 일으켰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사방으로 덜덜 떨리는 다리, 말을 듣지 않는 손이었으나 하나남은 아이 역시 때가 되었음을 느끼듯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것이다.
살자. 살아남자.
입밖으로 내뱉은 문장은 아니었으나 같은 의지였다. 삐쩍 말라 생기를 모조리 빼앗긴 채 죽지는 말자. 무력하게 식량을 강탈당하고 짐승이 되어 굶주림에만 눈이 멀어버린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던가. 사랑, 친애, 우정, 존엄, 선, 다정, 오직 생존이라는 것 하나를 위하여 내던진 대가가 지독하게도 많았으니 우리는 죽지 못했다.
우리가 지금 짓밟고, 넘어서며 서로를 향해 다가서는 동안 흐리게 스쳐지나온 시체들처럼 죽지 말자. 그리고 손수 배운 살인기술로 죽어버린 친구처럼 죽지 말자. 친애하고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그리워할 풍경에 함께 있었던 그들처럼 죽지 말자. 녹음이 지나치게 찬란했던 그때로 돌아갈 것이다. 지나치게 눈이 부셨으나 도리어 그렇기에 아름다웠던 그때로 돌아갈 것이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순간임을 알면서도, 소년은 이를 악문 채 과거의 편린을 움켜쥐었다.
그리하여 소년, 손을 들어올린다.
아이의 손과 소년의 손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의 목을 향해 다가서는 순간, 아이는 왜 손을 떨구었을까. 아이는 왜 소년에게 순순히 죽어줬을까. 어쩌면 먹은 게 소년보다 없어 힘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미처 마지막 순간에 피워올리기도 전에 꺼져버린 불꽃일지도 몰랐다. 있는 힘껏 끌어모았던 절박함이 소년보다 모자랐을지도 몰랐다. 정말 어쩌면, 소년이 조금 더 절실하게 생을 갈구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어 드는 생각은ㅡ 어쩌면 그마저도 환상이면 어떻게 해야하지, 하는 염려와 혐오로 뒤덮인 마음이었다. 다가온 친구의 목을 물어뜯고 죽은 친구의 주머니를 뒤져서 살아남은 소년의 죄악감으로 만들어진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살아남고 싶어 발악을 하고 있는 소년의 꿈일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저기 기다렸다는 듯 기적처럼 쏟아져내리는 빛은.
눈에 시리도록 아프게 박혀오는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찬란한 흰 빛은.
이마저도 환상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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