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M

*컴션 받은 그림들 및 드림 분위기 정리

드림명: 도화수리
드림 분위기: 수리가 먼저 나서고 도화가 그걸 받아주는 느낌. 가끔 서로 노부부 모먼트를 보여주기도 한다.


드림 그림

CM/ 드누아르 님

 

CM _ 죠님
CM_조날티 님
CM_ 깨비님
CM/ 죠님

 

CM_석탄 님

 

선물_ 죠님
선물_ 타조님

 

'𝐂𝐀𝐒𝐓𝐋𝐄 > 𝐏𝐫𝐨𝐟𝐢𝐥𝐞' 카테고리의 다른 글

캐슬 드림주 소개  (0) 2024.09.05

W.수리
 


처음에 그 꼬맹이를 봤을 때에는
정말이지 이제 마피아들도 갈 때까지 갔나? 싶은 의문이 먼저 들었다.
 
 

 
"모리 투자 신탁 회사. 투자를 해드리겠다는 뜻입니다. 초기 자금 확보하기 힘드시잖아요?"
 
 
 

능글맞게 웃으며 함부로 혀를 놀리는 그 남자보다 더 신경쓰였던 것은, 죽은 듯이 남자의 등뒤에 선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웬 녹색머리 꼬마애였다. 겨우 허벅지 언저리에나 올까, 싶을 정도로 작고 조그마한 꼬맹이. 이제 러시아 놈들이 추워서 머리가 돌았구나? 싶을 정도로 조그맣고 여려보이는 꼬맹이.
 
 
 

"아, 이쪽은 제 후계자입니다."
 
 

 
그 다음으로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문장을 들었을 때에는 드디어 저놈이 미쳤는가보다, 싶었다. 머리가 뒤지게 좋거나, 뭐 잠재성이 보였나보지. 결국 자신의 관심사 밖이었다. 토레소아, 독특한 이름을 내세운 그 수상쩍인 마피아 녀석은 임무열을 믿었다. 기이할 정도로 확신을 갖고 믿었다.
 
 

 
그들이 성공하리라고 믿는다 기름칠이 잘 된 혀를 부드럽게 놀리며 영감님의 마음을 녹이고, 경계를 누그러뜨리며 기어코 계약을 따내었다. 원하는만큼 토레소아의 자본은 지원해주겠다, 대가는 10년 뒤에 3할만 받아가겠다며 능구렁이를 백마리쯤은 삼킨 남자가 떠났을 때에도 오도화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흔하게 지나가고 숱하게 체결한 계약 중 고작해야 첫 번째, 영감님이라면 모를까 오도화에게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그 밖에도 신경 쓸 것은 널리고 널렸다. 예를 들자면 뭐, 조직이라던가. 관서나 관동이라던가, 재일의 취급이라던가ㅡ 배신 같은. 흔한 야쿠자들과 힘으로 올라와 힘으로 꺾어 사람을 짓밟는 자들이 으레 하는 뻔한 고민 같은 것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은 약속했던 10년의 반을 슬슬 채워가던 때에 토레소아가 끝장이 나버렸다는 소식을 듣고나서였다.
 
 
 
 

"그럼, 계약서는 파기해야하나."
 
 
 
 

중얼거리는 영감님의 말에 비로소 아, 하고 기억을 더듬어본 오도화는 이상하게도 그 수상쩍어보이던 남자보다 미동없이 서있던 녹색머리 꼬마가 떠올랐다. 그럼 그 꼬마애도 죽었으려나,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임무열이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머쓱해져 괜히 뒷목을 긁적이고 있자니 임무열은 다소 재미있고, 또 흥미로운 이야기를 내뱉어주었다. 그 꼬맹이가 남자를 죽이고 토레소아를 해제시켰다는 이야기를.
 
 

 

 
"그 애송이가?"
 
"그래. 좀 의문이란 말이지... 가만히 있어도 제 눈앞으로 굴러들어왔을 보스 자리를 어째서 죽여서 가져갔을까.. 그리고 왜 해제시켰을까...."
 
 
 

 
 
보기보다는 또 여리지는 않겠다. 생각보다 더 재미있는 꼬맹이구나. 이번에도 감상은 몹시 짧았다. 다시 바쁘게 몰아치는 일상을 살아가며 약속한 10년이 되는 날, 꼬맹이는 다시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미동없이 차가운 무표정을 짓고 있었던 그때가 아니라, 옅은 미소를 머금고 어쩐지 그 남자의 표정을 닮은 듯한 얼굴로. 임무열은 이미 파기한 계약서를 한부 들어올리며 제법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약속한 토레소아의 값을 받으러 왔는데."
 
 
 


 
라며 뻔뻔스럽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헛웃음을 삼키고 기어코 그 손을 잡는 순간, 자신보다 더 커진 키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나른한 눈동자가 닿는 순간 비로소 그제서야 흥미에서 멈출 마음임을 알아차렸다. 늦은 깨달음이었다.

'𝐂𝐀𝐒𝐓𝐋𝐄 > 𝘿𝙧𝙚𝙖𝙢'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약 파기  (0) 2024.12.01

W.SURI
 
*캐슬 드림
*도화수리....인줄 알았으나 히데수리
*글 재활 훈련
*글 쓴 후기: 구려..! 재활 다시 해야해..!


"현 시간부로 나 '보로나'는 모리와의 계약을 파기하겠다."
 
 
 
구겨지는 얼굴이 제법 볼만했다. 왜? 설마 내가 아저씨가 죽은 지금도 모리와의 의리를 이어줄거라고 생각했나? 수리는 습관적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힐끗 히데의 반들반들한 면상을 살폈다.
 


 
그에 맞춰 종잇장마냥 구겨지는 미간의 주인공을 보는 것은 제법 유쾌한 기분이기는 했다. 저 민들민들한 미간에, 아무것에도 흥미 없다는 듯 태연하게 무미건조한 눈동자를 훑던 얼굴에 반드시 금이 가게 만들고 싶었다고는 생각했으니까.
 


 
 
단번에 모리 간부들의 입이 열리고 고함과 애원이 동시에 터져나온다.




수리 개인의 무력은 따지고 보자면 그렇게까지 희귀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가 갖고 있는 존재의 의미는 꽤 컸다. 정보상, 해결사, 저격수, 암거래, 통역. 누군가는 그녀가 차지하고 앉아있는 분야들에 대해서 얕기만 하고 깊이가 없어 쓸모가 없다 일갈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분야는 지나치게 광활하고 넓어 결단코 의미없다 말할수가 없는 수준이니.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수리는 뒷세계에 한해서만큼은 누구보다 박학다식했다. 전문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중상급 정도는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중급 정도의 실력을 가졌다는 뜻은, 반대로 말하자면 최상위권에서 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력이, 모리에서 빠져나간다면 적다하더라도 타격은 분명 있을 터. 보자, 제공하고 있던 정보와 무기의 밀매를 끊어버리면 자금의 30% 정도는 줄어들어버리겠지. 지금처럼 불안정한 시점에서 자금까지 줄어든다면 아직 포섭하지 않은 중립적인 부하들의 신뢰를 잃게 된다. 그럼 피해는 더 커질터고, 그로 인해 나오는 결과는 적지 않은 손해일 것이다. 그래서 너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거지?
 
 
 

 
"알겠습니다."
 
 

 
 
아. 이런 지독한 새끼. 한점 흔들림이 없군.


다음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은 수리였다. 얼굴이 무참하게 구겨지며 솔직하게 못마땅함을 드러내는 그녀의 모습에 간부들은 그제서야 둘 사이의 팽팽한 신경전을 읽어내고 차례로 입을 다물었다.

 
 
 
 
톡. 톡.
 
 
 
 
앉아있는 가죽 소파의 팔걸이에 검지 손가락의 끝을 두드리며 신경질적인 분위기를 숨기지 않던 수리의 머리는 느긋해보이는 얼굴과 달리 김이 나도록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히데가 전한 아저씨의 유언은 진실인가? 극동 공략을 미루라고, 너를 필두로 전국 제패를 먼저 이룩하라고. 어디서 교활한 혀에 기름칠을 하는가. 실로 허접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이었다. 고스란히 본인의 욕망을 투영해 감히 오도화의 이름을 얹어놓기만 한 허접한, 거짓말. 그러나 그것을 증명할만한 자료는 없었다. 적어도 죽인 자의 이름만큼은 진실인 것 같았으니. 죽인 자가 표영이라고. 수리의 눈가에 짙은 피로감이 몰린다. 원한이로군.

 
 
 



표씨. 수리는 본인의 신념에 대해서 이 순간만큼은 절절하게 원망했다. 표영의 복수는 정당했다. 본인의 가족들을 절단낸 자를 향한 복수, 실로 올바르고도 확실한 복수였으나... 그렇다고 하여 그를 소중하게 여기던 본인에게는 기회가 없는가? 아니었다. 수리는 복수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본인이 몸담았던 조직, 토레소아. 그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 수리는 잊지 않았다. 토레소아의 상징인 톱니바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누구를 죽이던, 언제, 어떻게, 어떠한 방식으로 죽이던 결국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누군가를 죽인 순간부터, 살아 숨쉬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호흡을 끊어낸 순간부터 그 주변인물과 그를 사랑하던, 혹은 원망하던 사람들과 엮이겠다고 고하는 것과 같았으니까. 결국... 복수는, 살인은 톱니바퀴와 같았다. 한 사람을 죽인순간부터 끝없이 돌아갈 영원의 굴레에 자신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리는, 표영의 복수에 대해서 원망하지 못했다. 그의 울분이, 그의 원망이 이해되었으므로.



다만 그럼... 한순간에 짝을 잃어버린 자신은? 영원은 못하더라도 남은 평생의 반절을 차지해주겠다고 다짐했던 나의 맹세와 그의 약속은? 그것은 무엇으로 보답받는단 말인가.

 
 
 


 
수리의 검은 눈동자가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가라앉는다. 신념을 깨뜨려야하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토레소아의 근원을 부정해야하는가. 수리의 손가락이 멈춘다. 규칙적으로 울리던 소음이 멎자 침묵이 무겁게 내리깔리고, 수리는 고개를 들어 유달히 고요히 눈을 내리깔고 앉아있는 히데를 빤히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감각이 머리를 꿰뚫는 것 같다. 네놈이 죽였구나.
 
 
 
 
네놈이.
 
 
 
 
두 눈에서 불티가 흔들린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불타오르고 부릅뜬 두 눈가에서는 뜨거운 울분이 차오른다. 감히, 네놈이 아저씨를 죽였구나. 네놈이 그 기름칠된 혀로 판을 벌이고 그 나락에 나의 짝을 밀어넣었구나. 팔걸이를 움켜쥐는 손에 힘줄이 툭 솟아오른다. 나무에서 까드득거리며 위태로운 소리가 나도록 쥐었던 손에서 천천히 힘이 풀린다.
 
 
 
 
 
"...히데."
 
 
 


 
냉정하게 불러지는 이름에도 너는 역시 기다렸다는 듯 차분하게 고개를 들어올리고선 뭘 부르냐는 듯 눈썹을 쑥 밀어올렸다. 그 모습이 어쩐지 아저씨와 닮아서, 빌어먹을.




나는 이제 온 세상을 통해서 상실을 배우고 그리움으로 호흡하게 될텐데. 눈가에서 몰려오는 열기를 엄지 손가락으로 눌러 진정시키며, 수리는 간신히 가빠져오는 호흡을 진정시켰다. 추하게 울음을 터뜨릴 수는 없었다. 거래는 거래. 조직은 조직. 자신이 무너지는 순간, 감정적으로 구는 순간부터 토레소아와 모리의 전면전이 된다. 수리는 히데를 바라보는 눈동자에서 감정을 지워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했다.

 
 

 

 
"...토레소아는 캐슬의 편에 서지 않는다."
 
 



 
 
이게 그나마 영감탱과 아저씨의 유지를 잇는 올바른 방법이겠지. 수리의 대답에 히데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각자 한발자국씩 물러났다. 히데는 수리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았고, 수리는 그의 배려를 받아 자신의 뜻을 전했다. 이로써 거래는 완전히 끝난 셈이었다. 망설임없이 일어나 그대로 한발자국, 내딛어 밖으로 나간다. 다시는 이곳에 올 일은 없을 터였다.
 
 


 
 
다시는.


 
이 광활하고도 찬란하여 사랑했던 녹음은 보지 못할 터였다.
더없이 온 마음을 주어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자신의 짝은 없을 터였다.
 
 
죽음은 공평하다. 그 점이 지독하게 아프고도 서러워, 수리는 오랜만에 넋을 놓고 오열했다. 파기된 계약의 시작이 벅차도록 그리워 울었다. 처음 영원을 약속했던 순간과 그들의 기워올린 꿈에 제 온마음을 다 던져놓고 사랑하던 순간이 허무하게 빠져나가도록 울었다. 그리하여 그 안에 온 가득 그리움만이 남도록. 비워낸 심장에 지독한 후회가 새겨지도록 울었다.

'𝐂𝐀𝐒𝐓𝐋𝐄 > 𝘿𝙧𝙚𝙖𝙢'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늦은 깨달음  (0) 2024.12.20

W.MOMO
 
*커미션 글입니다.
*TYPE B


사랑.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며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감정. 또는 그러한 관계나 사람을 의미하는 말. 라피트는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물끄러미 시선을 들어올렸다.
 
 
타칭ㅡ 예를 들자면, 바제스처럼 천박한 동료의 말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뱀처럼 새카만 눈동자 위로 희고 고운 머리카락을 흔들거리는 존재가 자신의 시선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용케 가면 너머의 그 조그마한 틈으로 눈동자를 굴려 자신만큼이나 복잡할 활자들을 읽어내려가던 시선이 자신에게 닿았을 때의 그 선뜩한 감각이란.
 
 
라피트는 혀를 짧게 차며 슬그머니 소름이 돋은 팔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부드러운 천의 재질이 라피트의 소름을 어느 정도 가라앉혀주었다. 짙게 풍겨오는 바닷바람과 짠향에 고개를 들어올려 저도 모르게 수평선을 찾아 눈을 돌리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본능에 새겨진 항해사의 감각 때문일지도 몰랐다.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미지를 찾아 헤메는 지식인의 사명 같은 것. 라피트는 자신의 무지에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저 기특한 존재를 향한 마음은? 라피트는 스스로에게 내던진 의문에 미간을 좁히며 부지런히 자신의 지식 안에서 적당한 단어를 찾아 머리를 굴려보았다. 자신이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은 없었으니 이번에도 시간이 걸리겠지만 확실한 정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과 오만에 뒤덮인 생각이었다.
 
 
 
 
친애? 그런 말랑하고 허접한 단어로는 표현하지 못했다.
다정? 정이라는 옅고 흐릿하기 짝이 없는 마음은 애초에 허무하며 실존치 않는 것이다.
 
 
 
라피트는 적당한 단어를 그 외에도 몇개를 떠올려냈지만, 위타드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을만한 단어를 찾기에는 모조리 적당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한번 미간을 구겨버렸다. 내가 정의하지 못하는 것은 없어야하는데, 불만과 함께 얼굴을 구기고 있던 그를 깨운 것은 어느새 기척없이 다가온 위타드의 가벼운 손끝이었다.
 
 
 
 
[고민. 의문.]
 
 
 
 
간단하게 표현하는 손짓에 라피트는 잠시 멈칫하였으나 이내 보랏빛 호선을 입가에 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금방이라도 독을 물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목덜미에 박아넣어도 모자라지 않을만큼 잔인한 미소였으나 그마저도 기쁜 듯 위타드는 기분 좋게 어깨를 살짝 흔들며 웃음을 터뜨렸다. 미세한 동작이었다. 그러한 동작에 제법 아끼는 마음이 드는 건. 아, 마침내 라피트는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 종류인지를 깨닫고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귀애貴愛.
그것인 귀애였다.
 
 
 
 
기특하여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제 말 한마디에 가슴 설레하고 색이 옅은 머리카락을 흔들거리며 웃음을 터뜨리는 그를 어여삐 여기는 마음. 그럼 그렇지, 역시 사랑이나 친애 같은 웃기지도 않은 말랑한 마음은 아니로군. 라피트는 자신의 확고한 선에 스스로 만족하며 위타드에 대한 감정을 정리했다.
 
 
 
 
자신은 다른 오만하고, 멍청한 해적들과 다르다고 여겼다. 그야 물론 선장은 그린듯이 완벽하게 천박하고 강한 해적이었지만, 자신은 달랐으니까. 라피트는, 스스로가 생각해두고 정교하게 짜놓은 프레임 속의 자신은 씻지도 않고 오랫동안 전투에 굶주린 것처럼 적만 보면 눈을 뒤집어까고 달려드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그래, 어여쁜 마음. 딱 그 정도면 적당했다. 부족하지도 않았고 차고 넘치지도 않는다.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고 시키는 일에는 충직할 정도로 그의 심리까지 섬세하게 고려하여 움직여주는 것이 좋았다. 자신이 허락한 말랑함은, 자신이 결정하고 선명하게 그어놓은 선은 그 정도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그 이상을 나아가서도 안될 일이었고, 그 아래로 모자라면 불만스러워질 것 같은 적당함이 라피트의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틀에 들어맞았다.
 
 
 
 
보라, 천박하고 멍청한 해적들과 달리 자신들은 자유시간이 주어지자마자 스스로를 정돈하기 위해 제각각의 노력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여타 다른 해적들과 달리 술과 쾌락을 향해 손을 뻗고 그 뒤룩뒤룩 살이 찐 배에 기름을 채워넣는 것. 만일 동료라고 할지라도 그런 천박한 종류의 사람이 제 동료로 들어온다면, 라피트는 결단코 그를 좋게 보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적어도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등을 맞댈 동료는, 그처럼 완벽하지는 않아도 최소한 위타드 정도는 되어야했다. 자신의 무지를 수치스러워하고 무능을 모욕으로 받아들여야하는 사람이어야했다. 격이 어느정도는 있어야 했고 품위라는 단어에 대해서 어느정도는 걸맞아야했다. 그런 의미에서 위타드는 라피트의 귀애하는 동료가 되기에 몹시도 충분했다.
 
 
 
 
 
[불만. 의문. 라피트씨.]
 
 
 
 
 
라피트가 가볍게 손끝으로 건드려 보내는 신호에 고개를 돌려 위타드를 바라보았다. 불만? 아, 그제서야 라피트는 자신의 미간이 아주 조금, 일그러져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조차도 몰랐던 조그마한 불쾌감이었거늘 그 사실을 잽싸게 알아차리고 물어오는 저 사람을 어찌 귀애하지 않겠나? 라피트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경쾌한 리듬으로 바닥을 두드리던 지팡이 딱, 멎는다.
 
 
 
 
 
"별거 아닙니다. 그냥... 저 해군의 감시자들이 좀 지긋지긋해졌을 뿐이에요."
 
 
 
 
기특하지 않은가. 흐뭇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들어 살기어린 눈동자로 해군의 감시자들을 향해 사나운 시선을 던지는 저 모습이 마치 충직하게 제 마음에 들기 위해 꼬리를 치고 이를 드러내는 개 같아서. 라피트는 환하게 웃었다.
 
 
 
 
 
"해군을 건드리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다. 적당히 하지 그래."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이대로 해군의 감시자들을 모조리 썰어버리고 그 목으로 공놀이라도 했을 터였다. 저 불쾌한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라피트는 얼굴을 찡그리며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류, 답답할 정도로 꽉 막힌 인간. 라피트는 느른하게 팔짱을 끼며 헛웃음을 지었다. 언제부터 우리가 <규율>을 잘 지켰다고? 선장의 명령이면 모를까, 라피트는 이미 지긋지긋할 정도로 규칙과 규율이라는 것에 학을 떼었다. 그 모든 것에 질리고 질려 결국 선택한 일탈이 이 해적질이지 않은가? 똑같은 신세이면서 자신을 슬그머니 압박하려고 드는 것이 같잖았다. 물론 이 수많은 불만을 입속으로 쓰게 삼키며, 라피트는 이번에도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강자의 말이 곧 절대적인 것 역시 해적의 룰, 라피트는 본인이 아무리 규율에서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정해놓은 틀 안에서 벗어나기는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예, 그러죠 뭐."
 
 
 
 
해적이 되었다면 해적이 룰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녀석. 시류는 반대로 그런 라피트가 꼴사나웠다. 이미 다 망해버린 마당에 고집처럼 지키는 그 허접한 규율같은 거, 시류는 짧게 혀를 찼다. 우리는 어차피 목줄이 묶인 사람들이란 말이다.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 목줄을 누구에게 쥐여줄 수 있을지에 대한 빈약한 것 하나뿐. 그게 규칙일지, 선장이라는 이름을 하고 있는 압도적인 공포와 유혹에게 쥐여줄 것인지. 시류는 혀를 짧게 차고 금방이라도 라피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달려들고자 하는 위타드의 뒷덜미를 잡아 얌전히 라피트의 곁에 내려놓았다. 잠깐 닿은 것만으로도 싫다고 온몸을 몸부림치며 꼼꼼하게 손수건으로 닿았던 부분까지 닦는 것을 보면 괜히 더 괴롭히고 싶지만. 시류는 라피트처럼 익숙하게 표정과 감정을 지저 아래로 깔아버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쓸데없는 감정놀음은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다만 불만인 것은 양의 상태가 지속되는 위타드에게 향했다. 라피트에게 마음을 빼앗겨 기술을 움직이는 꼴은, 썩 보기에 좋은 광경은 아니었으니까. 그건 꼴사나운 것을 넘어서 보기 힘들 정도로 눈꼴시러웠다. 명확하게 갑과 을이 명시되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상하관계는 좋다. 해적질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상하관계가 명확하다는 것이었으니까.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것 역시 흡족한 점 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 줄에 잰 듯한 또렷한 관계가 마음에 들었던 건데, 시류는 얼굴을 구기고 위타드를 못마땅하게 내려다봤다.
 
 
 
흰 가면, 양의 상태를 드러내고 있는 그 가면 위로 당장 피를 쏟아부어서라도 검게 물들이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평소'의 그 냉정하고 차분한 상태로 돌아올까 싶은 미약한 기대감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각자 생각하고 있는 '평소'의 모습은 다를지라도, 시류는 무심코 음의 위타드를 제멋대로 정상의 기준에 밀어넣고선 생각을 이어붙여나갔다. 그런 의미에서 라피트를 향한 시류의 시선은 도무지 고울수가 없는 것이다.
 
 
 
 
명확한 관계성을 서로 좋아하던 것 아니었나? 왜 이제와서 감정놀음이 하고 싶어진건지. 충직하게 그의 마음을 위해 움직여주는 위타드나, 그런 그를 향해 아끼는 마음을 조심성없이 드러내며 귀애하는 라피트나. 둘 다 당장 해저에 가라앉히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를 치켜든 게 한두번이 아니다. 아, 물론 위타드는 음의 상태로 되돌아온다면 해저에서 꺼내줄 마음은 있었다. 다만 라피트는 아니었다. 아슬아슬하게 감정의 줄 위에서 놀음을 하며 경박스러운 뜀박질을 하는 라피트를, 시류는 백번 양보해서라도 좋게 봐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선만 안 넘으면 되지 않냐며 태연하게 코웃음을 치는 라피트였지만, 글쎄, 시류는 그 선을 끝까지 지키는 놈을 본적이 없었다. ...하물며 자신조차도 확신이 들지 않았으니. 자신이 못했으니 타인도 못하리라는 거만이 뚝뚝 떨어지는 생각이었다. 결국 그들 역시 욕심과 오만으로 가득찬 천부적인 악인이었기에. 다만 그들이 분노하는 것은 천부적인 악인 자신들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와 세계에 못 받아들여졌다는 데에 대한 불만과 시기였다.
 
 
 
 
 
"아, 여기들 모여있었군. 선장이 부른다. 출항 준비를 하라던데."
 
 
 
 
 
어느새 사뿐하게 기척없이 다가온 반 오거의 말에 라피트는 쾌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하다는 듯 양의 위타드를 챙겨 걸음을 옮기는 라피트의 등뒤로 두어걸음 떨어진 채 거리를 유지하며, 시류는 팔짱을 낀 채 문득 물방울처럼 터져올라온 의문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위타드를 볼 때마다, 검은색으로 뒤덮어 자신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꼴을 꼭 보고 싶다는 생각에 대한 의문이었다. 양의 상태일 때에는 부탁조차 하지 않고 고개짓으로만 부리고 있는 라피트를 향한 질투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종류의 마음인 것인지. 시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 마음을 덮어두기로 했다. 만약 후자라면, 심장을 뜯어내서라도 시류는 본인을 납득하지 못할 것 같았다. 감히, 자신이 먼저 규율을 깨고 타인을 사랑하게 될 일은 없을테니까. 그의 자존심과 그의 명예에 그릇된 행동이었기에 시류는 이를 악문 채 그날 밤도 출항 준비로 분주한 도크 Q를 반쯤 협박하여 심리 상담을 빙자한 이야기를 나누어야했다. 그리고 그날 도크 Q는 자신이 왜 연애 상담을 하고 있는 것인지 새벽녘에 다 지나도록 한숨과 함께 답답한 마음에 탄산수만 들이켜야했다. 차라리 바다에 빠지는 게 나을 정도로 답답한 인간들이었다.
 
 
 
 
 
 
"....위타드. 오늘 상태는?"
 
 
 
 
 
빤히 까만색 가면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물어보는 저의는 과연 언제쯤에나 알아차릴건지. 저 답답한 곰탱이 새끼들. 도크 Q는 저주같은 한숨을 한번 푹 내쉰 뒤 입가에서 옅은 미소를 지우지 못하고 웃고 있는 시류를 한심하다는 듯 한번 쳐다보고 문을 닫아버렸다. 꼴보기 싫은 건 서로 마찬가지였다. 음의 위타드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려 시류를 바라보고선 한쪽 눈썹을 쑥 밀어올렸다.
 
 
 
 
[음.]
 
 
 
 
음의 상태임을 드러내는 짧은 수화에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는 시류다. 한 사람 가지고 뭐하는 짓거리인건지, 반 오거는 자연스럽게 구겨지려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관리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라피트를 보고 그 노력은 무참하게 깨져버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썩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잔뜩 신경질적인 얼굴로 까만색 가면을 올린 위타드를 불만스럽게 쳐다본 그는 보는 사람이 다 초조해질 정도로 짙은 보랍빛의 지팡이를 타다닥, 갑판 바닥에 두드리며 날카롭게 그들의 주의를 끌었다. 뭐냐고 미처 시류가 입을 열기도 전 빠르게 낚아채듯 입을 열은 것도 명백하게 시비를 거는 어조였다.
 
 
 
 
 
"세상에, 이렇게나 게으른 분들이 제 동료라니 믿을수가 없군요.
 
곧 출항이 머지않았는데 이렇게 태연하게 갑판에서 서로 노을이나 정답게 구경하는 꼴을 보니 오늘의 할일은 출항이 아니라 해적단 내부의 교류회나 친목회라도 되나보죠? 몰랐던 일정인데, 혼자 정하신 일정인가봐요? 선장 명령보다 우선되는가 보죠?"
 
 
 
 
누가보아도 시비를 거는 듯한 말투에 시류가 매끄럽게 뻗은 눈썹을 구기며 시가를 문 입술을 비트는 사이 다시 한번 라피트가 말을 가로챈다. 따지는 듯 시원스러우면서도 날카롭게 쭉쭉 뻗어나오는 신경질적인 말이었다. 작정하기라도 한 듯 독설과 비난에 가까운 비판이 주르륵 쏟아져 흘러내린다.
 
 
 
 
"둘이서만 나누는 친목회라니 아주 정답네요. 할일이 그렇게 없으신가요, 시류 씨? 방해하는 꼴이 되어 조금도 미안하지 않지만, 슬슬 출항을 준비해야하니 제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서 할일이라는 것을 할 지능을 갖추는 건 어떨까요?
 
없으시다면 유감이지만, 그럼 최소한 짐승 새끼가 아니라 사람 거죽을 뒤집어썼으면 예의라는 건 좀 갖추어달라고요. 제가 대단한 것을 요구한 모양인가 봅니다?
 
출항 준비를 대체 어떤 배에서 항해서 혼자 한답니까? 어디 이틀이나 사흘이 지난 후에야 멋대로 출발해서 어디로든 가도 좋다면 어디 그렇게 해볼까요? 다같이 심해에서 캡틴 존의 보물이라 찾아보자고요. 시류 씨는 몸이 무거우니 덕분에 보물을 잘 찾겠네요! 호호!!"
 
 
 
 
입을 열 틈도 없었다. 무작정 말에 얻어맞기만 한 시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반박하려던 찰나 라피트는 상쾌하다는 듯 빙긋 호선을 그린 입가로 순식간에 다시 전망대와 항해실로 올라가버리는 꼴이 꼭 잔뜩 쪼기만 하고 쏙 올라가버리는 저 불썽사나운 새를 언젠가 날을 잡아 반드시 족쳐버리겠다고 다짐을 되새기는 사이, 시류는 라피트가 교묘하게 위타드를 피해간 비난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러나 저러나, 결국 이런 면으로는 눈치가 죽었다 못해서 이미 해저에 가라앉다 못해 풍랑에 아예 해져버린 수준이었다. 반오거는 그날 술을 깠다. 도크 Q와 나란히 저들의 연애 사정에는 참여하고 싶지 않다며 한숨을 푹 내쉬었고, 바제스는 그런 그들의 대작對酌에 고개를 기울이며 근데 누가 해적단 내에서 연애를 하는 거냐 천진난만하게 물었고 그날 둘은 바제스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정중하게 티치를 찾아가야했다. 당연하게도, 티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둘을 바라보며 바제스 살해는 당분간은 좀 미루어두라 달래주었다.
 
 
 
 
 
[5번선 대장. 책임. 회피. 나. 이유. 의문.]
 
 
 
 
 
와중에 자신은 왜 그런 책임을 묻지 않는건지 정말로 궁금하다며 찾아온 위타드에 오거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러한 상담을 맞이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곘거니, 체념했다. 라피트는 한바탕 시류에게 화풀이를 끝내고 상쾌해진 듯 더이상 도크 Q를 괴롭히지 않았고 대신 그는 잔뜩 성이 난 시류를 맞이해야 했다.
 
 
 
 
 
"라피트만 보면 속에서 뜨거운 게 치밀어오르는 것 같다."
 
"홧병입니다."
 
"라피트만 보면 심장이 빠르게 뛰고 머리에 피가 몰린다."
 
"홧병입니다."
 
"라피트만 보면 손끝이 떨릴 정도로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는다."
 
"지독한 홧병이네요."


 
 
 
 
결국 같은 질문을 서너개 반복하고서야, 시류는 그날 홧병을 가라앉히는 약을 얻어갈 수 있었다. 그날 밤, 출항 준비에 열중한 라피트가 보조를 해달라며 위타드를 멋대로 불렀고, 시류는 항해실로 향하는 위타드를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 가벼운 노크 소리가 울린 뒤 들어오라며 경쾌하게 노래하듯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그 문이 열리자 위타드를 발견한 라피트가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어머, 2번선 대장은 초대한 적이 없는데요."
 
"....보조라면 오히려 내 쪽이 더 좋을텐데."

 
"제가 부른 목적은 보조도 있지만 다른 목적도 있었거든요."
 
 
 
 
 
예를 들면 오늘 새벽이 지난 뒤에 위타드가 음의 상태일지, 양의 상태일지 결정짓는 것 같은? 라피트의 태연하고도 매끄러운 말에 시류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위타드를 편리한 도구 취급하지 말도록, 짧은 경고가 으르렁거리며 낮게 흘러나오자 라피트는 코웃음을 친다.
 
 
 
 
 
"누가 할말을? 서로 각자 원하는 게 뚜렷한데 혼자만 위선을 떠시는군요. 가증스럽게도."
 
"난 위타드를 편리하게 생각한 적 없다. 녀석은 동료이지."
 
"예에, 뭐, 그런 걸로 하자고요. 편리한 <동료>."
 
 
 
 
어깨를 으쓱이고선 키를 잡는 라피트를 노려보며, 시류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팔짱을 꼈다. 음과 양의 상태가 결정되는데에 둘의 의지는 단 하나도 상관이 없었음에도, 이따금 그들은 되지도 않는 아집을 부리곤 했다.
 
 
 
익숙하게 심드렁한 얼굴로 라피트를 도와 키를 고정시키고 지도의 방향을 돌려주며 위타드는 그들을 응시했다. 양이라, 음의 위타드는 양의 상태를 썩 좋아하지 않았기에, 얼굴을 찡그린 채 둘을 바라보았다. 사실상, 그들의 속셈은 딱히 숨겨질 의도도 없었기에 빤하게 드러나곤 했다. 라피트는 위타드를 귀애하며 자신의 총애에 따라 움직여주기를 바랐고 시류는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러나 반대로 음의 상태로 그들의 앞에 등장하면 시류는 미묘하게 만족해하는 태도를 보이며 라피트와 달리 자신을 제법 아끼는 모습을 보이니. 위타드는 가볍게 고개를 돌리며 샛별이 떠오른 고즈넉한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그에게는 썩 나쁘지 않은 관계였다. 쌍방으로 귀애하며 적당히 벌어진 이 거리감각이, 관계의 미묘함과 교묘하게 다른 감정으로 변질될 듯한 이 오싹한 귀애가 마음에 들었다.
 
 
 
 
아슬아슬하게 깨질 듯한 빙판 위에 선 것처럼, 끊어질 듯한 줄 위에 뛰어오른 것처럼.
관계란 이 정도면 각자 적당한 거리감이었다.
 
 
 
위타드는 그 거리를 늘릴 마음도, 줄일 마음도 없었다. 그리고 그건 항해실에 본의 아니게 모이게 되어버린 두명 역시 같은 생각일 터였다.

'𝐎𝐍𝐄 𝐏𝐈𝐄𝐂𝐄 > 𝐶𝑜𝑚𝑚𝑖𝑠𝑠𝑖𝑜𝑛'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가 없는 첫 봄이었다  (0) 2024.10.01
무지의 사랑  (0) 2024.08.21
고독  (0) 2024.08.10
동경과 사랑 그 어딘가  (0) 2024.08.08
빛바래지지 않을 기억  (0) 2024.07.19

@SU_RI1
 
*캐슬 팬픽
*ver. 신태진


글을 써보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칼끝에서 죽어간 자들의 이름을 써보자, 다음에는 사연을, 그 다음에는 그들의 이야기를, 그 다음에는 내가 그들을 죽인 이유를. 내가 죽인 생명의 무게에 짓눌려 그날도 이루지 못한 긴 밤의 끝에서, 문득 그는 그러한 생각을 했다.
 
 
 
 
그리하면 비로소 그들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괴로운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수로써 삶을 살아가기로 택한 자신의 선택이 옳았노라고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은 자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대감 속에서 적어내려간 활자들은, 영 달랐다. 그가 가끔씩 지나가면서 보았던 활자들 안의 이야기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자신이 죽인 자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죽은 자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일까. 작가의 활자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숨쉬던 누군가의 이야기와 달리 그의 글은 고해성사처럼 담백하고,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활자 안에서, 마치 박제된 것처럼 지독할 정도로 숨막히는 고요를 자랑했다.
 
 
 
 
이대로 차라리 죽여달라고 부르짖는 듯한 자신의 글 안에서, 신태진은 잠시 입을 다문 채 자신이 끊어낸 삶에 묵념했다. 누구를 위한 애도일까, 남겨진 자들을 위한 애도일까, 아니면 떠난 이들을 위한 애도일까. 적어도 자신의 애도는 그들처럼 숭고한 뜻을 지니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문득 그의 가슴 속에서 서늘하게 들어찼다. 첫 글자를 적어내려가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대부분 그렇듯, 처음이라는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꽤 깊은 뇌리에 남겨져버리지 않은가. 신태진은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이, 자신이 죽인 첫 사람의 이름을 적어내려갔다. 그의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자신이 명령을 받고, 지시에 따라 망설임없이 끊어냈던 첫 숨을 힘주어 써내려갔다.
 
 
 
 
첫번째 페이지가 완성되었을 때에는 썩 괜찮았다. 두번째, 세번째, 점점 늘어나는 사연과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 그의 노트에 천천히, 바닷물이 차오르듯 채워지기 시작했다. 까아만 잉크가, 조금씩 하얀 노트 위로 찰랑거린다. 그 넘치는 듯한 파도가 막힌 것은 그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을 죽였던 때로 돌아가야 했다. 더이상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의 사연이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이 죽인 사람의 이야기가, 흐릿하게 빗바래진 기억 사이로 흘려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마침내 비로소 세상이 무너지듯 절망했다.
 
 
 
 
 
아.
나는 이제 그들의 죽음을
이해할수도 없게 되었구나.
 
 
 
 
 
기회를 스스로 내던졌다는 죄악감이 자신의 목을 죄이는 순간 그는 불현듯 웃음을 터뜨렸다. 삭막한 방안,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서 그의 웃음소리가 공허하게 울려퍼진다. 만일 정말 귀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의 방안은 아마도 만석이었을테니. 문득 그런 허접한 상상을 하며, 신태진은 허파에 바람이 뚫리고 폐가 아프도록 공기를 채워넣고 다시 터뜨리듯 내뱉으며 웃었다. 겨우겨우, 숨을 쉬는 것보다 더 버겁게 터뜨린 웃음이 갑작스럽게 터진 것처럼 허무하게 사그라든다. 
 
 
 
 
이게 무슨 꼴이지. 허탈하게 내뱉은 한숨이 미친 웃음소리의 끝을 흐리며 내뱉어질 때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의 엉망이 된 손을 시야에 담았다. 잉크가, 흘러내리고 엉망이 된 손이다. 정갈하게 적어 내려갔던 첫 페이지와 달리 이제는 절규에 가깝도록 흐트러진 글씨가 자신의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해 부끄러움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사람이란 이다지도 많은 감정이 찰나에 스쳐지나가는 생물인데, 그들의 마지막 순간에는 어떠한 감정을 품었을까. 그는 문득 그들이 누리지 못했을 또다른 감정들이 아쉬워져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손을 저주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사랑으로 살아가지 않는가?
 
 
 
 
 
타인이 찾아낸 정답을 움켜잡은 채 신태진은 오래되고 낡은 한숨을 내뱉었다. 입에 거미줄이 엉키고 바짝 마른 듯한 음성이 유리조각을 삼킨 것처럼 거칠게 입안을 맴돌았다. 그 날카로운 빗면과 파편에 입과 혀가 모조리 베여 피가 흘러내리는 감각이 이토록 선명하거늘 어째서 입을 열면 변함없는 혀와 고르게 자리 잡힌 치아가 자신의 시야에 담기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하여 그는 노트를 덮기 전 자신의 심정을 적어보기로 결정했다. 앞장에 즐비하게 쓰인 수많은 기록들은 단순한 보고서만의 의미도 못 되었기에, 그는 자신의 심정을 적어내려가기 위해 만년필을 들어올렸고, 고급스러운 무늬가 새겨진 금빛 펜촉을 노트에 내려놓는 순간 새카만 웅덩이가 만들어지도록 첫 음절조차 적지 못했다. 무얼 써야하는가?
 
 
 
 
도대체 이 살인귀의 심정이, 이 악마의 이야기가 누가 궁금하다고.
 
 
 
 
무엇을 써야한단 말인가. 이것이 의미가 있는가? 자신조차 확신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검은 잉크가 노트의 한 페이지를 모조리 새카맣게 채우도록 멍하니 펜끝을 맞대어놓은 채 미동조차 않았다.
 
 
 
 
 
 
비로소
그는 자신이 누구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이 무엇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악마라고 손가락질을 받기에 그가 품은 죄책감이 너무 컸고 살인귀라 가리켜지기에는 자신이 너무 비참하였으니 신태진, 그는 다시 한번 낡고 엉망이 되어 헌것처럼 버려진 제 이명을 주워 올려야했다. 청소부. 자신이 없애는 것은 그저 단순히 더러운 것을 치우는 일이라고 되내이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검게 물들어버린 노트의 페이지를 내려다보며, 신태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끝으로 집어 올린 노트를 망설임없이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며, 그는 마지막 위선으로 남은 십자가에 잠시 입을 맞추었다. 새벽이 밝아오기 전이었다. 어슴푸레한 푸른빛이 감도는 거리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으며, 그는 오늘도 자신의 일과를 위해 조각낸 달의 파편을 쥐었다.
 
 
 
붉은 과실을 따러 가야할 시간이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과실을 따러 가야할 시간이었다.

'𝐂𝐀𝐒𝐓𝐋𝐄 > 𝙎𝙝𝙤𝙧𝙩 𝙀𝙥𝙞𝙨𝙤𝙙𝙚' 카테고리의 다른 글

  (0) 2024.09.12

W.MOMO
 
*커미션 글입니다.
*TYPE B


 
"로제프가 존이랑 싸운다는데."
 
 
 
 
 
심드렁하게 내뱉어진 문장에 한 사내가 고개를 들어올린다. 검은색 페도라 너머로 밝은 햇빛이 부드럽게 온몸을 덮은 흰 붕대 위로 어른거린다. 관심 있어? 딱히 기대조차도 하지 않는다는 듯, 툭 떨어진 제안에 커피 역시 시선을 다시 책으로 옮기며 말없이 제게 말을 건 해적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넘긴다. 싸움은 흔했고, 유달리 재물에 대한 탐욕이 큰 존에게 도전하는 머저리들 역시 이 배에서는 수두룩했다. 그다지 큰 흥미를 끌지 않는 말이었고, 그 말을 내뱉은 해적 역시 커피의 반응을 기다리지는 않았다며 고급스러운 테이블 위로 턱 더러운 팔을 올리며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인다.
 
 
 
 
 
"내기도 안하는건가? 벌써 링링은 존에게 올인했어."
 
 
 
 
 
답은 없다. 험상궂게 생긴 해적은 커피의 무반응을 익숙하게 넘기며, 턱을 괸다. 아침부터 벌어진 동료살해사건과 함께 저녁에 올라올 새로운 매치업까지 주르륵 읊어주던 해적이 입을 딱 다문 것은 뉴게이트의 그림자가 전망 좋은 갑판 위로 드리우고서였다. 큰 덩치와 함께 위압감이 느껴지는 무거운 분위기에 슬그머니 해적의 시선이 올라가며 뉴게이트의 얼굴에 닿는다.
 
 
 
 
 
"...뭐, 아무튼 그렇다고. 다음번에도 잘 이용 부탁해?"
 
 
 
 
 
당연하게 커피의 앞자리로 다가오는 그에게, 자리를 비켜줄 심산인지 냉큼 새하얀 테이블에서 팔을 치운 해적이 허겁지겁 의자에서 일어선다. 기다렸다는 듯 뉴게이트가 싸늘하게 해적을 내려다보고, 커피는 티팟 옆에 놓인 조그마한 돈주머니를 손끝으로 까닥인다. 정보값으로 놓인 소소한 금액을 탐욕스럽게 낚아채며 내일도 이용해달라 외친 해적이 히히덕거리며 동료살해 내기판에 뛰어드는 것을 멸시의 눈초리로 바라본 뉴게이트의 시선이 미끄러지며 커피에게 닿는다.
 
 
 
 
 
 
"내기할건가."
 
 
 
 
 
 
줄곧 답없던 커피의 고개가 드디어 움직임을 보인다. 짧은 그의 첫마디에 커피의 시선이 붕대 안에서 부드럽게 그에게로 닿는다. 평온하게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다물린 입이 벌어지며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울린다. 적당히 낮고, 부드럽지만 고와 얼핏 듣기에는 커다란 새가 우는 듯한 울음소리를 닮은 목소리였다.
 
 
 
 
 
 
"글쎄."
 
 
 
 
 
 
그게 커피의 오늘 하루 첫마디였다는 것을 알까. 그 귀한 목소리를 위하여 줄곧 아껴두고 있었음을 알까. 진한 자홍빛 눈동자에 오롯이 그가 담기는 순간 비로소 붕대 안에서 풀린 얼굴로 한껏 온화해질 수 있음을 그는 알까. 소소한 의문을 묻은 채 커피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지어진다.
 
 
 
 
뉴게이트는 커피의 한마디에 기가차다는 듯 허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린다. 둘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갑판의 난간으로 향한다. 곳곳에 피가 튀어있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 이유는, 아마도 피가 튀는 즉시 커피가 손끝으로 나비를 일으켜 깔끔하게 지워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전망이 가장 좋다는 이유 하나로, 커피는 그 자리를 사수하며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싸움을 금하곤했다.
 
 
 
 
그렇게 사수한 자리는 커피가 권력을 휘두르고 힘을 쓸만큼, 훌륭한 풍경을 선사해주었다. 짙은 고동색의 난간, 자세히 바라보면 은근 고풍스러운 디자인으로 깎인 난간의 구멍들 사이로 보이는 눈이 부시도록 푸르른 바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줄만큼 시린 하늘과 빙산을 닮아 보는 이의 마음에 이는 파문을 잠재울만큼 고요한 수면이 끝내주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좋은 분위기로군."
 
"그러니 내가 사수하는 것이지. 이곳에서 보는 풍경은 몹시도 아름답거든. 노을이 질 때에도, 여명이 올라올 때에도."
 
".....널 닮아 그러한가보군."
 
 
 
 
 
 
머뭇거리며 완성된 문장에 커피의 눈이 커졌다가, 천천히 휘어진다. 이 상식없는 배에서 뉴게이트는, 없는 말을 내뱉지 않는 사람이었다. 빤한 말이라고 하여도 그에게서 나온 말을 듣는 것은 느낌이 다른 이유였다. 자신을 닮았다는 말에 커피의 분위기가 누그러지는 것을 견문색으로 느끼며, 뉴게이트 역시 수줍게 고개를 돌리며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고자 애쓰듯 입을 곧게 다문 채 우물거렸다. 살짝 달아오른 볼은 강한 빛 때문에 그러하지는 않으리라. 다량의 해수가 물살을 가르는 배에 저항하듯, 부드럽게 한번에 몰려오며 뱃전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거의 살아온 생애의 절반을 바다에서 지낸 바닷사람들이 듣기에도, 기분 좋은 소리였다.
 
 
 
 
 
 
"글로리오사가 네게 고백했다던데."
 
 
 
 
 
 
파도가 두어번 쳤을까. 평화롭던 분위기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에 뉴게이트는 헛숨을 들이키며 급하게 기침을 쏟아냈다. 사레가 들려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기침을 내뱉는 그의 반응을 태연하게 무시하며, 커피는 활기찬 제 동료를 떠올렸다. 그녀는 꽤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는 편이었으며 상식없는 와중에도 눈은 높았던 해적들이 침만 꿀꺽 삼키며 눈을 돌리기에 급급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와중 자신의 낭군을 찾겠다며 이리저리 눈돌리고 쓸만해보이는 남자를 찾아 나서는 그녀의 적극적인 태도 역시 일상에 가깝다는 것도, 그 사실을 굳이 지적해주지 않은 채 커피의 시선이 파란 없는 수면 위에 고정된 채 뉴게이트의 반응을 기다린다. 하여 너는 긍정하였던가 부정하였던가. 그 대답에 자신은 어찌 반응할지, 그 반응을 이리 초조하게 기다리는 자신조차도 이해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커피는 자신의 얼굴을 모조리 가린 붕대에 잠시 감사함을 표했다. 약간의 시간을 들여 발휘해준 인내심에 대답한 것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랬지."
 
 
 
 
 
 
 
담담하기 짝이 없는 긍정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담백한 반응에 비로소 커피가 고개를 돌려 뉴게이트를 먼저 바라본다. 그 반응이 기뻐, 뉴게이트의 굳게 다물린 입가가 미묘하게 올라간다. 질투하는가? 그 짧은 질문이 입가에서 얼마나 맴돌았을까, 결국은 끝내 내뱉지 못한 채 쓰게 입안으로 삼킨 뉴게이트의 노오란 눈동자에 커피의 심기 불편한 시선이 닿는다.
 
 
 
 
 
마치 그게 끝이냐고 묻는 것처럼 빤히 고정된 시선에 뉴게이트의 유리를 닮은 눈동자가 능글맞게 휘어진다. 먼저 묻기 전까지는 답하지 않겠다는 듯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가에 결국 커피의 입에서 기어코 질문이 튀어나온다. 여러모로, 제게만 궂은 장난을 걸곤 하는 그가 밉지는 않았다.
 
 
 
 
 
 
 
"받아주었는가?"
 
"글쎄, 아직 고민중일세."
 
 
 
 
 
 
커피를 놀리듯 나온 대답에 커피의 미간이 미묘하게 일그러진다. 늘 전전긍긍해하는 입장에서 여유를 갖고 놀리는 입장으로 바뀌니 제법 즐거운 듯, 뉴게이트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걸린다. 즐거워 죽겠다며 대놓고 숨기지도 않는 표정에 커피의 눈꼬리가 못마땅하게 올라간다. 사람 갖고 놀기는, 짧게 혀를 차며 악취미라 중얼거리는 커피의 반응에 뉴게이트가 어이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비죽, 입술을 내민다.
 
 
 
 
 
 
 
"자네가 하던 것과 다를바가 없다만."
 
"지금 그 말은 내가 그대를 갖고 놀았다는 뜻인가?"
 
"그럼 아니었나?"
 
"그대는 갖고 놀기에는 재미가 없어서, 굳이."
 
 
 
 
 
 
충격에 휩싸이는 얼굴을 보며, 커피는 필사적으로 올라가려는 입꼬리에 힘을 주어 내려야만했다. 이러니 놀리는 것을 그만둘수가 없지. 확실히, 뉴게이트와 커피는 유독 서로에게만 반응이 후하곤 했다. 지금도 보라, 어떤 비난을 듣고 어떤 비판과 무자비한 폭설을 들어도 심드렁하기만 하던 뉴게이트가 커피의 한마디 한마디에 세상이 무너진 표정을 지었다가 툴툴거리며 투정도 부린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욕설을 퍼붓던 모욕적인 언사를 쏟아내던 듣고는 있나 싶을 정도로 무관심한 반응을 하는 커피는 현재 붕대 안에서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내고 있다. 적어도 둘은,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품던 그것을 부정할 사람이 아니었다.
 
 
 
 
 
 
 
"너무하는군."
 
"사과하지."
 
"됐어, 뭐 그런 거에 일일이 삐지겠나. 애도 아니고."
 
 
 
 
 
 
 
고개까지 홱 돌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애다만. 그 말은 꼭꼭 접어 입안으로 밀어넣으며, 커피는 다시 한번 눈까지 질끈 감으며 급하게 웃음을 참았다. 너무 삐지게 만들었나, 이제 달래주려고 입을 연다. 옅은 체리빛을 머금어 탐스러운 입술이 벌어지고 노련한 목소리가 나오려는 순간.
 
 
 
 
 
 
찌르르ㅡ
 
 
 
 
 
 
눈이 뜨인다. 기분 좋게 후덥지근했던 공기와 그것을 식혀주듯 서늘하게 불어왔던 바람이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진다. 등뒤에서 들리던 요란한 동료들의 웃음소리와 술잔을 부딪히며 경쾌하게 퍼지던 농담들이 흩어진다. 어디로 눈돌리기만 하면 새파랗던 풍경과 보석보다 더 찬연한 빛을 머금고 있었던 푸르름도 역시 없다. 고개를 돌리면 늘 그렇듯 테이블에 앉아 나직한 미소를 짓고 있는 네가 없다. 찻잔을 들어올리고 해적답지 않게 고상한 취미를 섭렵하고 있던 네가 없다. 널 닮아 창백하지만 언뜻 청량한 색채를 머금은 다기잔을 들어올리고 있는 네가 없다.
 
 
 
 
 
 
하늘에 찬란하던 푸르름은 어느새 어둑해진 밤으로 뒤덮여있었고, 소란스럽던 주변은 어느새 풀벌레 소리와 풀밭을 스치는 바람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린다.
 
 
 
 
 
 
좋은 꿈을 꾸었다. 간만에 네가 나오는 꿈이었다.
 
 
 
 
 
배에서 내렸던 때도 아니고, 포악하던 선장이 죽은 그날의 꿈도 아닌 네 꿈을 꾸었다. 실로 지옥도와 닮았던 그날의 전쟁도 아닌 네 꿈을. 실로 간만에 맞이한 평온하기 짝이 없던 꿈이었음에도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는 이유는 분명 그 꿈이 행복하였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는 방법 중 하나로는 행복한 꿈에서 깨어나도록 하는 방법이라더니. 뉴게이트는 헛웃음을 지으며 떴던 눈을 돌려 창가에 비추어지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꿈결의 자락이 아직 남은 듯, 등뒤로 아직도 네가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차라도 한잔할텐가, 실없는 소리로 나는 입에도 대지 못할 독차를 권유하고는 장난스럽게 웃었던 네 목소리가 아직도 울리는 것 같았다.
 
 
 
 
 
그리움은 늦다. 후회만큼이나 늦었다. 우리가 조금 더 솔직했다면 달랐을까. 대놓고 함께하자 손을 내밀고 가자 말하였다면 달랐을까. 그럼에도 끝내 바라보고 있던 방향이 달라 헤어졌을까. 뉴게이트는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내 숨은 네 호흡보다 더 가치있었을까. 대체 왜 너는 나를 두고 그리 수월하게도 떠났다.
 
 
 
 
 
쏴아아.
 
 
 
 
이 손길마저도 너를 닮았다. 바닷바람을 품어 짠 향을 머금고 나보다 더한 수라를 거쳐온 주제에 홀로 고고하게 핀 꽃처럼 슬쩍 내민 손길을 닮았다. 홍차의 향과 자주 마시던 독차의 코끝 아릴 정도로 단 향이 뒤섞인 그 향이 지독할 정도고 그립게 가슴을 후벼판다. 시린 은빛을 머금고 반들거리는 저 꽃이 너를 닮았다. 보라색과 붉은색 사이 그 위험한 색을 닮아 섣불리 다가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시선도 떼지 못할 정도로 매혹적인 너를 닮았다.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이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웃음짓는 너를 닮았다.
 
 
 
 
 
뉴게이트는 천천히, 창가의 책상에 앉는다. 그 위에 올려진 티팟에 담겨있던 차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미리 만들어둔 것인지 아니면 의욕을 잃어버린 자신을 위하여 살려낸 자식들이 두고 간 배려인 것인지. 식은 티팟에서 홍차의 향이 흙냄새에 얽혀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허무하게 웃는다. 결국은 모든 것은 전부 다 흩어지고, 흐릿해지며 색을 잃기 마련이었다. 한때에는 싱그럽게 녹음을 머금고 있던 갈대가 시간이 지나면 옅은 금빛으로 물들어지듯이. 영원한 것은 없다. 그 사실을 뼈져리게 알고 있음에도 어째서 또다시 헛된 희망을 품었던가, 너는 틀리지 않고, 너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기억만큼은 이토록 추억이 되지 못하고 생생하게 살아숨쉬는가. 아직도 눈을 뜨면 이 바다 너머에 네가 있을 것 같고, 해군에서는 지긋지긋하게 네 행적을 샅샅이 파헤쳐 신문 한 구석에 반드시 끼워넣었을 것 같다. 여느날처럼 네 소식을 신문에서 읽고 그런 사고를 치기 전에는 먼저 얘기해달라며 픽 웃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게 답장을 기대하지 않은 편지를 보낼 것 같고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진부한 인삿말이 적힌 전화를 나직하게 몇번이고 중얼거리고 실없이 웃었을 것 같은데.
 
 
 
 
 
하필이면 네가 이 세상을 떠난 날이 겨울이었기 때문일까. 봄이 오지 않았다. 언 땅이 녹고 새순이 돋아 이제는 녹음을 머금어야 하는 땅이 아직도 겨울처럼 창백하기만 한 땅이다. 눈앞에 즐비하게 놓은 녹음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다. 뉴게이트는 고개를 돌려 창틀 너머로 붉고 푸른 빛을 섞어 머금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날과 똑같은 풍경이었다. 네가 죽었던 그날, 나는 울지 않았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몇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전화가 울릴 것 같았으니까. 전화를 들어올리면, 그럼 우리는 다시 과거를 얘기하고, 미래를 가늠했다가 결국 푸스스하게 웃어버리고 끝나는 그런 실없는 이야기를 하겠지. 뉴게이트의 손끝이 천천히 떨린다.
 
 
 
 
 
 
쨍그랑. 데구르륵... 
 
 
 
 
 
창가에 놓인 꽃병이 깨진다. 안에 담겨있던 자홍빛의 꽃이 짓이겨지고 썩어 말라있다. 군데군데 깨져 뭉텅이가 진 고급스러러운 다기가 언뜻 자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는 몹시도 단단해보이고 깨끗하지만 막상 손을 대면 너무나도 쉽게 깨질 수 있는 한없이 연약하기만 한 것. 금이 가는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는 추락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진실이란 이토록 가혹하다. 유독 이 세계는 그에게 환히 긍정했던 적이 없었기에, 가혹하게 들이밀었던 운명들이 수월하게 넘어가주었기 때문일까, 이번 한번만큼은 미친 척 달려들었다면, 그러했다면 너는 살았을까.
 
 
 
 
 
 
네가 없는 세계에서
내가 살아갈 가치가 있을까.
 
 
 
 
 
앞으로 다가올 모든 계절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봄이 오면 자주빛으로 피어날 꽃을 보며 널 떠올릴 테고, 여름이 되어 소낙비가 내린다면 풍랑을 함께 헤치며 나아갔더너 네가 떠오를테고, 가을이 되어 단풍이 지면 붉고 탐스럽던 단풍보다 더 붉고 검은 피를 흘리며 마지막 숨을 쉬었던 네가 떠오를테니까. 영원히 겨울일 터였다. 분명 그러해야할 터인데. 손끝이 아릴 정도로 시리고 추워 눈물이 쉼없이 흐르는 것이 옳아야하는데.
 
 
 
 
 
 
 
너는.
살아있었던 너는.
살아있었을지도 모르는 너는.
 
 
 
 
 
 
분명 내 꼴을 보며 뭐가 그렇게 문제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리고선 손을 펼쳤겠지. 네 품안에 기어가듯 그렇게 머리를 박으면, 그때에는 고양이를 쓰다듬듯 나른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선 너답지 않다는 단조로운 감상평만 남겼을 터였다.
 
 
 
 
 
 
 
"....에스프레소."
 
 
 
 
 
 
그러니 그리움은 여기서 끝내는 게 맞다. 너라면 분명 내가 없는 세계에서도 잘 살아냈을터니까. 네 곁에 서기 위해서는 최소한 모습이라도 같아야하지 않겠나. 너는 울지 않는 사람이다. 너는 내가 없는 세계에서도 담담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내 생을 채워나갈 사람이니 버겁더라도 나 역시 생을 살아가야겠지. 뉴게이트의 눈가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해가 지는 줄 알았는데, 새로운 날이 되고 있었다. 은빛이 사라지고 금빛으로만 찬란하게 펼쳐지는 스핑크스 섬에 아침이 오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부정해도 결국 시간은 흐른다. 언 땅은 아무리 애를 써봐도 결국 녹을 터였고, 아무것도 심지 않은 땅에서 억척같이 잡초가 피고 그 위로 벌레가 꼬여 기어코 꽃이 고개를 치켜들 터였다. 그게 자연이니까, 그게 순리이며 운명이었으니까. 하여 뉴게이트는 고개를 치켜들고 동터오는 순간을 바라보았다. 밤은 지났다. 이제 단 꿈에서 깨어나야할 시간이었다.
 
 
 
 
 
 
 
 
비로소 네가 없는 봄이 왔다.
네가 없는 첫 봄이었다.
 
 
 
 
 
 
겨울보다 더 서럽게 다가올 봄이었다. 그러한 봄을 몇번이고 맞이하며, 이번에는 어떤 계절을 사랑하게 될지, 어떤 계절에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지. 기어코 나는 겨울에서 벗어나지 못할지. 뉴게이트는 몸을 일으켜 문을 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세상으로 나아가야할 시간이었다. 네 곁에 서기 위해 다시 한번 더 살아가야할 순간이었다. 네가 대신 이어놓은 내 호흡이 벅차오르도록 낭비조차 허용하지 못할 순간이었다. 찬연한 봄이었다.

'𝐎𝐍𝐄 𝐏𝐈𝐄𝐂𝐄 > 𝐶𝑜𝑚𝑚𝑖𝑠𝑠𝑖𝑜𝑛'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애  (0) 2024.10.30
무지의 사랑  (0) 2024.08.21
고독  (0) 2024.08.10
동경과 사랑 그 어딘가  (0) 2024.08.08
빛바래지지 않을 기억  (0) 2024.07.19

캐슬
수리 X 유우성 드림

 


 
때로는 태양보다 더 빛나는 의지가 있다.
때로는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찬란하기 그지 없는 꿈이 있다.
 


 
 
밤을 살아가고 그늘 속에서 숨쉬는 자들이 그것을 발견했을 때에 대체적으로 갖는 감정은 두가지로 분류가 되곤 한다. 시기, 혹은 동경. 나의 경우에는 후자였다. 내 손에 쥐여진 칼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 내가 빼앗은 목숨과 수없이 많은 생명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지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내가 밟아온 모든 발자국들이 붉었다.
 
 
 
 
그러니 저 눈부신 재능에 더러운 것이 묻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타고난 재능을 가감없이 발휘하는 자들의 행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들의 움직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단장이 귀에 못이 박히고 피딱지가 얹어 다시 떼어내질 정도로 말했을 때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 두 눈으로 보니 느껴졌다. 타고난 재능이라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게 펼쳐질 수 있는 것인지.
 
 
 

 
그건... 여명이었다.
 
 
 

 
탄탄하게 잘 짜여진 무대 위에 올라와 정해진 역할만을 수행하는 극. 어떻게 보자면 좁은 세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세계가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재능이 있었다.
 
 
 
 

그의 발이 무대에 올라가는 순간, 조그마한 틀처럼 보였던 사각형 안에서 온 세상이 펼쳐졌다. 내딛는 걸음과 시원스러운 목소리, 떨림없이 내뱉어지는 대사들이 단순히 종이 위에 쓰여진 활자가 아님을 증명하듯 생생하게 살아 숨쉬었다. 호쾌하게 내뱉어지는 문장들에 실려있는 감정에 홀려 매료되었다. 그의 극을 조금 더 오래 보고 싶어졌다. 그가 펼쳐내는 수많은 이야기가 기대되었다. 그가 결국 올라가 펼칠 스크린 속의 풍경이, 그가 연기할 하나의 이야기가 몹시도 궁금해졌다.
 
 
 
 
 
 
 
 
"예? ...후원...이요? 그.. 사람한테?"
 
 
 
 
 
 
 
 
아주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냥 흔적처럼 남겨놓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그냥 정말 숨만 붙여놓을 정도의 금액. 이따끔 그가 절실해질 때에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남겨놓은 금액이었다. 티끌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그가 찾을만큼 절박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아, <흑주> 후원자님? 그가 돈을 받아갔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다. 소식을 들었으니까. 배신을 당했다고.





그래도 그는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맡겨두었던 금액을 찾아가서 그 돈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듣지 않았다. 구태여 찾지 않았고, 소식이 흘러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내 쪽에서 외면을 택했다. 내가 보았던 순수하고도 찬란했던 그 세계로 기억하고 싶었다. 그렇게 끝을 맺고 싶었다.










운명은 늘 그렇듯
나를 외면했다.

 
 



 
 
 
 
 
 
 
"롱터우! 롱터우!!"
 
 
 
 
 
 
 
 
목청껏 외치는 이름에 환하게 웃는 얼굴이다. 내가 보았던 그 얼굴이었다. 연기를 위해 없던 진심을 만들어내는 그 미소였다. 찬란하고도 빛나는 거짓을 위한 미소였다. 결국 이쪽으로 왔구나. 종내에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하겠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끝은 파멸일 것임을 알면서도 네 끝은 극처럼 찬란하게 끝나기를 바랐다. 눈이 아프도록, 시리도록 비추어지는 태양같은 조명에서 두 손을 들어올려 관람객들을 향해 기꺼운 인삿말을 내던지는 결말을 바랐다. 해피엔딩은 환영받는 서사가 되지 못함을 알면서도 네 극은 해피엔딩이기를 바랐다.
 




 
 
 
 
커튼콜이 내려가고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나면 보이는 새카만 화면 너머에서, 네가 웃기를 바랐다. 큐 사인이 끝나고 고생했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을 꿈꾸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번 꿈꾸어봤다. 타인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은 상관없으리라고 여겼으니까.
 
 





 
 
 
나같은 사람이 빌어서 안되었던걸까. 이미 한가득 손에 피가 묻은 사람이 맞잡은 손이라서 기도가 잘 되지 않았던걸까. 사람을 너무 많이 죽인 사람의 목소리이기에 닿지 않았던걸까. 더럽혀진 기도였기에 빌어준 행복이 저주가 되었던걸까.
 
 






 
 

무참하게 끝이 난 사진을 보며, 거의 다 망가졌음에도 겨우 얻어온 CCTV의 메모리 카드를 보며, 그 안에서 맞이한 장대하고도 화려했던 네 서사의 마침표를 바라보며.









너의 오연했던 거짓이 결국은 여명이 아니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네 해는 없었다. 우리의 새날은 결국 얼룩진 채로 오지 않았다. 우리의 밤은, 끝나지 않았고 네 낮은 결국 오지 않았다. 너는 백열등에 눈멀어 달려든 벌레가 되었고 나는 네 비극을 두 눈으로 똑똑히 담으면서도 늘 그렇듯ㅡ 방관자만이 될 수 있었다.










내도록 죽인 살인의 대가가 이러할까.







탄생의 순간부터 죽어나가는 순간까지 결국 타인의 생을 먹어치워 삶을 이은 결과가 이러할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며, 친애하는 자들의 자멸극을 두 눈을 뜬 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 어느쪽도 잃고 싶지 않아 그러했다.
눈물이 두려워 피눈물을 택했고 차악이 두려워 최악을 택한 최고의 머저리가 바로 나였다.









너만큼은 다른 결말을 맞이하길 바랐다.
너만큼은 다른 결과를 이어나가길 바랐다.








그것이 이토록 아픈 일인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그 찬연한 세계에 눈을 빼앗기지 말았어야 했는데.
네가 펼친 그 조그마한 틀에 온 세계를 넣지 말았어야 했는데.
펼쳐낸 손끝에 묻어나온 찰나를 친애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기어코 나는 너를 결국 친애하였구나.
이리 아프게 깨닫는 것이다.

트레틀 사용(나나곰 님)

 

 

CM

 


이름: 수리(Voron)
성별: 여
나이: 20대 초반 추정
별명: 갈까마귀(Voron)

외모: 짙은 녹발. 흑안. 주근깨. 왼쪽 허리에 문신있음.
체격: 182.7cm / (몸무게는 비밀)
소속: 前 토레소아 > 現 무소속(자유 해결사)
기술: 쌍검.  총검술.
출신: 러시아 혼혈
주특기: 괴력. 약물
가족: 오하영(父) / 옥사나 스베틀라나(母) / 전원사망.
체향: 월계수. 나무향. 겨울바람.
 꿈: 바텐더. 자신만의 가게를 가지는 것이 꿈이다. 그 가게에서 피아노맨을 들여 노래를 틀고 가끔 친구들을 불러 노는 것을 꿈꾼다.

성격: 이해득실을 몹시 따지는 성격. 소소한 손해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지만 단위가 클수록 깐깐하게 따지고 들어간다. 은원을 확실하게 구분짓고 갚는 타입이며 표면적으로는 소소한 손해를 넘어가주는 덕분에 너그러워보이는 성격이다. 한가지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저돌적인 성격으로 직진밖에 안하며 무서운 집중력을 보여준다. 흥미를 끌지 않는 것들에게는 거의 관심이 없다. 최대한 불필요한 싸움은 하지 않지만 굳이 싸워야한다면 한번에 끝내는 것을 선호한다.
 
좋아하는 것: 정장 쇼핑, 겜블링, 단 음식, 검 구경. 한국사람.
싫어하는 것: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 물건파손. 신 음식.
 
특이사항: 검은 정장을 즐겨 입으며 왼쪽 허리 쪽에 톱니바퀴를 물고 있는 갈까마귀 문신이 있다. 검은 코트와 정장 사이에서 꺼내는 검이 죄다 검은색인 덕분에 언뜻 칼의 궤적과 갯수를 놓치기 쉽다.
 
호적수: 반드시 정당하게 부딪혀서 이기려는 타입. 본인이 이기더라도 최대한 정중하게 보내주지만 한번 호적수라고 느껴지는 이상 반드시 싹을 없애버리려고 한다.
 
민간인: 최대한 부딪히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필요한만큼 온화하게 대한다. 어지간하면 수리 쪽에서도 거의 건드리지 않으려는 타입.
 
대사: "나는 내가 제공할 수 있는 최대의 선의를 베풀고 있는거야."
"돈이 되는 복수를 해." 


설정:

 
토레소아_
러시아의 살수 전문 살수 집단. 마피아나 살수들만 전문적으로 죽여주는 집단이다. 우두머리는 '단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렸으며 실명은 아무도 모른채로 사망했다. 후계자는 본래 수리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수리가 거부하고 스스로 조직을 와해시켜 다시 역사에서 등장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수리가 물려받은 것으로 되어 있기에 토레소아에게 의뢰를 하기 위해서는 수리를 찾아야한다. 받아줄지는 의문이지만.
 
 


관계:

 
오도화 _ 어렸을 때 일본에서 만나 수리가 장기체류하면서 아득바득 한국어를 배운 스승. 오도화에게 수리가 매달리는 수준으로 한국을 알려달라고 떼를 썼다. 초창기 오도화와 함께 싸워주며 기어코 얻어낸 수업으로 지금의 회화 수준에 도달했지만 가끔 일본식 욕설을 쓰게 가르친 장본인. 한국어 이름도 뜯어냈다. '수리'라는 이름을 오도화 본인이 지어줌. 이름이었는데 성씨 개념을 몰라서 성이 '수', 이름이 '리'로 외자가 된 것을 후에 듣고 어처구니 없어했다.

+) 수리가 순수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임무열 _ 어렸을 때 일본에서 토레소아와 협력하여 회사를 차린 장본인. 토레소아의 단장과 거래하여 수리에게 경험을 쌓고, 보호해주는 대신 대가로 수리의 노동력을 받아가기로 했었다. 그러나 뜻밖에 아이가 너무 순종적으로 굴고 억압되어 있음을 알아차리고 오도화를 통해 어느정도 해방감을 알려준 인물. 수리에게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수리가 순수하게 대할 수 있는 인물.

"보로나, 나는 신이 아니야. 아니, 하물며 훌륭한 신도라고 하여도 무작정 따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 거부할수도 있어. 네 논리에 그릇된다면 말 정도는 해볼 수 있는거다."



단장 _ ???


서진태(사로카) _ 러시아에서 한번 마주쳤던 인물. 노예시장에서 서로 만난 적이 있다. 돈을 많이 모아서 언젠가는 아빠의 고향인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었다. 수리가 유일하게 자신의 꿈을 얘기해준 인물이다.


 
김신(티그로) _ 토레소아 소속일 때 마주쳤던 인물. 원래 김신이 타깃이었기에 수리가 암살하기 위해 찾아왔으나 한국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의뢰를 파기했다. 단지 한국사람이라는 이유로 수리가 호의를 보였고, 김신은 그런 수리를 어느 정도 받아주며 친분을 쌓았다. 단장을 죽이고 토레소아가 와해된 이후 찾아온 수리를 김신이 한국으로 보내줬다. 이후 김신이 한국에 귀국하자 찾아갔으나 귀국 목적을 듣고 난 후에는 합류하지 않기를 선택했다.

"토레소아는 네가 세운 것이나 다름없지. 네가 토레소아이지 않은가."
"리야, 부탁 한번만 하자."

 
 
유우성(롱터우) _ 토레소아 소속일 때 만났던 인물. 홍콩에서 액션스쿨의 오디션을 보고 리천에게 추천한 인물이다. 유우성은 수리를 모르지만 수리는 알고 있으며, 개인적으로 그를 응원한다. 그러나 서로 엮이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이따금 그의 행보에 미소짓기도 하는 등 비밀스러운 후원자로써 활동하고 있었다.
 
"...네가 후원자, 였나. ....'흑주'가 너였어."
"내 극이 마음에 들었나?"


주변평가:

 
오도화 _ 광휘를 누려라, 검귀야.
단장 _ 넌 내 최고의 걸작이야.
서진태 _ 다시 후회할 일만 만들지 않으면 돼.
유우성 _ 나의 유일무이한 관람객.
 

(이후 수정할수도 있음)

W.MOMO


*드림글입니다.
*커미션 글입니다.
*TYPE D





사랑의 첫 시작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일반적으로는 호기심이지 않을까. 효타, 루치의 쌍둥이 형인 소년은 틀림없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던 무리에 불쑥 끼어들어 사고와 소란을 몰고 다니는 소녀를 향해 악의적인 호기심이 똘똘 뭉친 시선을 던진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분명 틀림없이 그것으로 시작했을 터인데. 궁금해졌다. 단순히 저 녀석이 뭐하는 녀석인지부터 어떤 힘을 가지고 있고, 어떤 생각을 품고 있으며 어떤 행동을 좋아하는지, 어떤 꽃을 선호하는지부터 시작하여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까지 꼼꼼하게 알아내고 싶었다.




이 감정은 정보원으로써의 버릇 때문일까? 효타는 능숙하게 입꼬리를 올려 미소지었다. 지나치게 빤한 시선에 불쾌감을 표현하는 미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밀조밀하게 구깃한 미간이 더더욱 일그러지기 직전 당연하다는 듯 쑥 시야의 반절을 가려버리는 손. 굳은살이 군데군데 자리를 잡아 누가보아도 검을 쥐고 훈련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흔적이 다분한 그 손바닥을 바라보며, 효타는 눈꼬리를 휘어접었다.




표정을 숨기는 것은 그에게 숨쉬는 것보다 더 간단한 일이었으니 능숙하게 불쾌함을 잠재우는 것은 가능했지만ㅡ 효타 본인조차도 영문을 모르겠는 감각이 불쑥 고개를 치켜드는 것은 숨기기가 어려웠다. 간지럽고, 따가운 감각, 아마도 다양한 단어와 문장들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직관적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을 '불편함' 혹은 '불쾌감'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의문이 드는 것이다.





왜?
본인은 대체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가?



상황을 파악하자면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을 막는 게 못마땅하니 불편함, 은 납득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불쾌감, 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비슷한 감정이라 동시에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이 헷갈리고 있는 것인지. 아직 정확하게 파악이 불가능한 감정을 막연하게 가시덤불처럼 움켜잡고, 효타는 익숙하게 웃는 낯으로 독설을 혀에 휘감았다.






"너무하네, 혹시 본다고 닳는 종류?"

"자네가 보면 닳을 것 같구만. 싫다는데 빤히 쳐다보는 게 실례라고 안 배웠는감? 아,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던겐가?"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잔뜩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은 듯 그저 웃는 낯으로 태연하게 그를 마주보고 있는 재수없는 금발. 봄날 어지럽게 핀 개나리를 그대로 빼닮은 듯한 금발. 효타는 일그러지려던 얼굴을 애써 다시 가다듬으며 웃는 낯으로 비난에 가까운 말을 받아냈다.



어쨌거나 결국 그녀의 곁에는 익숙하게 곁을 차지하고 앉아있는 카쿠였으니. 그녀의 곁에 슬그머니 다가서려면 카쿠와의 마찰은 사실상 확정된 수준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굴 필요는 없지 않나? 싶어 고개를 빼꼼 내미는 순간 이제는 한톨의 시선조차도 허락하지 못하겠다는 듯 쑥 시야에 따라 손바닥이 따라 올라온다.





"알았어, 안 보면 되잖아. 까칠하네~."

"도서관에서 정숙이라는 말도 모르는 놈팽이의 말은 믿을수가 있어야지~."






거울을 보듯 서로를 향해 반들거리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을 흘끔 바라보며, 미나의 눈동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책상 위에 올려놓아진 교과서로 고정된다. 저런 유치찬란한 싸움에 본인이 끼어들 이유는 없었다. 어려운 과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을 한참이나 붙들고 눈싸움을 걸고 있을 무렵 푸른 머리카락이 불쑥, 미나의 손목을 간지럽힌다.





"내가 도와줄까?"





무슨 일이든 도움을 청한다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온화하게 받아줄법한 비비, 그녀였다. 순순히 도움을 받아들 작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미나가 교과서를 넘겨주려던 찰나 카쿠의 손이 비비보다 빠르게, 그러나 미나의 눈보다는 느리게 그것을 가로챈다.





"내가 알려줄수도 있네, 미나."






어머. 감탄인지 경탄인지 모르는 것을 가볍게 흘린 비비는 카쿠의 굳건한 손바닥에 낚아챈 책을 한번, 미나와 카쿠를 한번 돌아보더니 그럼 됐다며 사르르 눈웃음을 짓고선 제 공부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도서관임을 잊지 않은 듯 소근거리는 음성에 미나는 잠시 한쪽 눈썹을 쑥 밀어올린다. 뻔한 개수작이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예쁘게 보인다면 역시 효타에게는 승산이 없는 거겠지. 아니나다를까 카쿠의 수작질에 어이가 없다는 듯 표정관리를 실패한 효타가 카쿠를 노려본다. 물론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선 펜끝을 휘둘러 공식들을 적어내려가는 카쿠에게 신경쓰이지 않는 일이었지만.





이 공식을 쓰면 된다고 소근거리는 와중 다시 거리를 좁히고 바짝 붙어서는 것. 그것마저도 수작질에 가까운 행동이었으나 1반 학생들은 그저 익숙한 듯 고개를 돌리며 제각기 할일에 집중했다. 별로 신경쓰이는 일도 아니었고, 낯선 광경도 아니었다. 그동안 미나 근처를 빙빙 돌며 영역표시라도 하듯 으르렁거렸던 나날들을 떠올리면 오히려 순하게 구는 카쿠가 이상하게 보일 지경이었으니.




그리고 그 곁에, 누가봐도 대놓고 못마땅함을 드러내는 효타가 있다. 보면 닳는 종류라더니 이제 아예 접근도 못하게 해버리네. 쳐다도 보지 말고 근처에도 오지말고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간신히 참아준다는 듯한 반응.






"너무하네~."

"실례지만ㅡ 자네는 너무 루치랑 닮아서, 영 거북함까지 느껴질 지경이거든."

"쌍둥이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 아닐까, 이해해줘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싫다네."





이해해줘야할 이유라도 있다면 생각은 해보겠지만. 얄밉게 눈꼬리를 휘어접어올린 카쿠를 향해 다시 한번 무섭게 인상을 쓰는 효타였으나, 아쉽게도 루치의 상시 무표정에 대해서 내성이 생겨버린 학생들은 그렇게 큰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소소하게 인상을 쓰니 루치랑 굉장히 닮았다고 감상평이나 남길 정도로 무감했다.




도리어 울상으로 되돌아온 효타의 표정에 괴리감을 느낄 지경이었다. 효타의 갖은 노력은 별로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뜻이 되기도 했다. 결국 포기한 채 미나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을 만족한 효타의 시선이 같이 교과서로 향하고 도서관은 다시 정적을 되찾는다.




팔락거리며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 사각거리며 잉크가 종이에 묻어나오는 소리, 흑연이 거친 공책의 종이에 닳아가는 소리와 저 멀리 찌륵거리는 풀벌레 소리까지 공부하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문제라면 정말 이대로는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떠나야하는 효타의 처지였다. 효타는, 고작 단순히 같은 공간에 있는 것으로 만족할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등교를 하며 아침햇살을 같이 쬐고, 하교를 하며 다음에는 어디에서 놀지 얘기하는 건 솔직히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럴수만 있다면 물론 두 손 두 발을 들고 냅다 달려들어서 했겠지만 효타는 이상을 꿈꾼다고 말하면서도 현실적인 사람이었기에 그럴수는 없었다.




그는 단지 자신의 호기심만 채우면 되었다. 자신의 의문만 해결되었다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그의 의문은 꽤 자잘한 것에서부터 시작했으니 그럴듯하게 포장하자면 우정, 이라는 이름으로도 포장이 가능하겠다.





그러나 효타, 그가 바라고 있는 정도를 말해보라고 한다면 태연하게 내뱉기에는 제법 망설여지는 부분도 있었다. 등하교는 포기한다고 치더라도 그녀의 곁에서 관찰을 하고 싶은 것은 솔직하게 긍정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정보원으로써 비밀을 두르고 다니는 미나가 궁금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원한다면 학생회의 기록일지에서 그녀에 대한 모든 내용을 볼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카쿠의 방해 때문이 아니라 직접 그녀에게서 듣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예의가 아니잖아? 자신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면에서는 냉혹한 루치와 제법 닮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자신이 처음으로 가진 '호의'를 풀어보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다.




호의라니, 루치와는 아주 다른 점이지 않은가? 그 녀석이 미나에게 호의를 품을리가 없으니 아무렴 그 녀석보다는 자신이 몇배, 구체적으로 수치를 따지자면 한 1.8배 정도는 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자신의 호기심이 누구를 죽이는 천연덕스럽고 잔혹한 아이와 같은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날을 세워서 으르렁거리는지.




다가오는 모든 남자들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경계하는 카쿠의 행동은 단순히 소년의 질투라고 치기에는 과한면이 있었다. 효타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어느새 공부에 집중했는지 조금의 소란도 없이 일정하게 책이 넘어가는 소리를 나른하게 풀린 얼굴로 경청했다. 때마침 임무도 없었던지라 한가한 덕분이었다.




해가 뉘엿하게 움직여 하늘을 주황빛으로 물들여가는 때, 비로소 원하는만큼 시간을 보낸 것인지 1반의 학생들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책들을 가방에 집어넣고 그럼 자신은 가보겠다며 속삭이는 음성을 남긴 채 점점 줄어가는 인원은, 어느새 셋밖에 남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킬 것처럼 굴었던 트라팔가 녀석조차 오니기리의 밥을 챙겨줘야한다는 얼토당토 없는 소리를 하고선 쏠랑 나가버렸으니 이로써 효타에게 기회는 굴러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하, 꿈도 꾸지 말게."






굴러들어온 기회가 방금 데굴데굴 굴러 카쿠 앞에서 무참하게 밟혔다. 효타의 토라진 듯한 표정변화에 징그럽다는 감상평을 가감없이 내던진 카쿠가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에는, 어느새 규칙적인 숨소리와 함께 엎드린 채 잠들어버린 미나가 있었다. 공부를 하겠다는 높다란 의지로 펜은 꼬옥 쥐었으나 몰려오는 수마를 이겨낼 수 없었는지 곱게 잠들어버린 미나의 턱에는 언제 가져다 바쳤는지도 모를 정도로 신속하게 얹혀있는 노란색 쿠션이 있었다.




앙증맞게 기린그림까지 그려져있는 그 쿠션의 주인을 모를리가. 효타는 다시 한번 눈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간신히 내리며, 입술을 비죽여 웃어보였다. 영역표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빙빙 주변만 돌면 미나가 불편해하지도 않나봐. 나긋한 어조의 시비에도 역시 카쿠는 환하게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암, 미나는 불편하면 바로 불편하다고 말하는 강단있는 사람이라서 말이네. 누구처럼 음침하게 돌려말하는 버릇도 없네."

"나같으면 무슨 소유권이라도 주장하는 것처럼 구는 태도가 살짝 성가실 것 같은데 말이지~."

"소유권이라니?"





어불성설이지. 그녀가 날 가진걸세.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내뱉는 문장에, 효타는 잠시나마 패배감을 느껴야했다. 강적이다. 그걸 넘어서서 소유권에 대한 생각마저도 뒤바뀐 말에 말을 잃은 효타를 바라보며, 카쿠는 다시 한번 둥그렇게 눈을 휘어접으며 웃어보였다.





"자네는 그렇게 생각 안하나보군."






좋아하는 사람을 가져야 속이 풀리는 타입인겐가? 놀리듯 신경을 살살 긁는 질문이었다. 눈썹을 한번 꿈틀거린 효타가 입을 다문채 무섭게 카쿠를 노려보는 것을 끝으로 그들의 신경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승자는 카쿠, 패자는 효타인 상태로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대화를 잠든 척 들어야 했던 미나는,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야했던 자신의 노고를 회상하곤 했다. 웃겨 죽는 줄 알았다. 입술끝에 경련이 일어난 것 같아서 얼른 뒤척이는 척 얼굴 전체를 기린쿠션에 파묻어버렸다는 것을 둘은 알련지 모르련지.





지나치게 소란스러웠던 덕분일까. 여느때와 다름없이 가방을 챙겨들고 들어가려던 그들을 막아선 것은 도서관의 문 앞에 선명하게 경고가 쓰여있는 종이였다. 결국 도서관 출입금지를 당해버린 내용에 미나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눈을 홉뜨고 루피를 쏘아봤다. 덕분에 공부할 곳이 없어졌잖아. 따지려던 찰나ㅡ, 효타가 능글맞게 웃는 낯으로 불쑥 등장한다.





"뭐야, 1반 도서관 출입금지 당했어~? 세상에, 엄청나게 소란피웠나봐. 미나, 불편하겠는걸. 도서관이 공부하기에는 최적의 공간이잖아?"

"....그렇지."






표정으로 대놓고 이게 무슨 수작이지, 하는 얼굴이었으나 포커페이스의 달인이자 연기의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효타는 능글맞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다시 한번 살금, 미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 재주 하나로 학생회에 들어와 루치의 그림자노릇을 했는데,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는 미나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에, 자신이 있었다. 실로 오만하고도 거만한 마음가짐이었다.





"내가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때?"

"대가는?"






아, 차가워라. 보통 이렇게 나오면 상냥하거나 고만고만한 녀석들은 고맙다는 인사부터 나오는데 말이야. 만만치 않다는 생각을 입속으로 쓰게 삼키며, 효타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보통 이런 경우의 사람들에게는 '없다'라고 말한다면 오히려 의심만 키울 뿐이다.



역효과라는 뜻이지. 입을 벌리려는 순간 저 멀리 카쿠의 구두소리가 울린다. 그렇지, 카쿠에게도 엿먹이고 미나의 거리도 좁힐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긴 것 같았다.





"단둘이 카페 가는 거, 혹시 어려울까~?"





멈칫한다. 청력이 뛰어난 카쿠의 얼굴은 이미 일그러진 채 살기를 숨기지 않았고 그런 야차같은 얼굴을 느긋하게 감상하며 웃는 낯으로 미나의 대답을 기다린다.



카쿠의 걸음이 미나의 대답을 끊어내기 전, 미나의 눈동자가 빠르게 효타의 위아래를 훑는다. 마치 감정이라도 하듯 완벽하게 평가하는 듯한 시선으로 훑은 그녀가 내린 대답은 긍정이었다. 아슬아슬하게 합격점까지는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 정도쯤이라면야, 시간과 장소는 네가 정해서 얘기해."





귀찮은 건 질색이니까. 알아서 정해서 통보해주면 되겠다는 말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려 카쿠와 팔짱을 끼고 걸어 사라지는 미나의 뒷모습이다. 허리끝에서 넘실거리는 흑단같은 머리카락을 마찬가지로 까만 밤하늘 같은 눈동자에 담아놓은 효타는 마스크를 올리며 심드렁하게 중얼거린다. 그러니까... 여왕님 타입이신건가ㅡ.




정보원으로써 거의 평생을 살아왔으니 맛집 같은 소소한 것들이야 일도 아니긴 하지만. 학생회실에 드러누운 채 곰곰히 미나와의 데이트 코스를 짜던 효타의 휴식을 방해한 것은, 당연하게도 학생회실의 문을 부술듯이 들어온 카쿠였다.






"효타, 자네 미쳤는감? 드디어 머리가 돌아버린겐가? 대체 어쩌자고 그런 개수작을 내 앞에서 부린겐가? 아, 나랑 싸우고 싶은 속셈이었는감? 그런거라면 말을 하지. 굳이 그런 짓거리 안해도 싸워줄 수 있다네."

"....아이, 왜 싸우려고 그래. 난 그냥 단순히 친해지려는 거라고. 친.구.사.이. 도 못하는거야?

너무 빡빡하다~. 내가 누구처럼 교제를 원하는 것도 아닌데 단순히 우정도 허락 안 해주려는 거면 너무한 거 아닐까~? 이성친구는 아예 안되는건가봐? 그거 미나가 허락한 거 맞아~?"





사르르 눈읏음을 치며 내뱉는 말들에 속이 뒤집힌 것처럼 숨을 몰아쉬던 그의 주먹이 파르르, 떨린다. 잔뜩 힘이 들어갔는지 하얗게 핏기마저도 사라지는 카쿠의 주먹을 흘끔 바라보며 효타는 생글 웃어보이는 것이다.





웃는 낯이 좋다고 하잖아? 침은 못 뱉어도 웃고 있는 얼굴은 생각보다 여러가지로 도움이 되는 편이다. 때아닌 소란에 놀란 표정으로 들어오는 스팬담 선생님처럼 우연이 겹쳐 꽤나 소소한 행운을 거머쥘수도 있으니 말이다.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로 반쯤 부숴진 문고리와 헐거워진 쇠부분을 바라보던 스팬담은 아주 문을 부수지 그랬냐며 바락바락 카쿠를 혼내기 시작했고 덕분에 뚱한 표정으로 꾸중을 죄다 감당해낸 카쿠만 서러울 뿐이었다.





대충 효타가 웃고 있는 것과 학생회가 수근거리는 이야기를 통해 정황은 알았으나 니들 힘을 좀 생각해보라는 말과 함께 꾸중을 마무리 지은 스팬담이 떠나고, 스팬담의 청력으로는 듣지 못할 정도로 멀어지고서야 카누는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을 수 있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욕설과 육두문자에 짐짓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는 효타다.






"우와, 무서워라. 양아치야~?"

"....하나만 묻자."





누그러지는 말투에 효타의 눈에 의아함이 올라오자, 카쿠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 차가운 어조로 묻는다.







"네놈이 미나에게 품은 감정이 대체 뭔감?"

"감정? 그야 호기심이지. 단순 호기심."





그녀가 궁금해. 정보원 앞에서 비밀을 다 두르고 다니는 건 굶주린 맹수한테 고깃덩이를 휘감고 쇼를 하는 것과 같은걸. 효타의 장난기 다분한 말투에 카쿠는 잠시 말을 잃은 듯 짧은 침묵을 이어나가더니 이내 결정했다는 듯, 고요히 팔짱을 낀다.






"그런 마음가짐이면 안되네.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는 안돼."

"가벼워도 안되고 무거우면 더더욱 안돼. 어쩌라는건지 모르겠네~. 으하핫."






살포시 신경을 긁는 말에도 카쿠의 반응은 없었다. 호오, 무시하기로 한건가? 카쿠의 반응에 효타가 지루하다는 듯 눈썹을 쑥 밀어올린다. 말없이 그대로 나가버리는 카쿠의 뒷모습을 손을 흔들어 배웅하는 시늉을 하고, 효타 역시 자신의 감정이 대체 무엇인지 철저하게 분석해보기로 결정한다. 카쿠는 의미없이 시비를 거는 녀석은 아니었으니. 정말 단순히 순수 100%의 호기심인가?





안타깝게도, 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이 애매했다. 호기심이냐는 질문에는 당당하게 긍정할 수 있지만 완벽하게 호기심이느냐고 묻는다면 조개처럼 입을 다물게 될테니. 따지자면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삐딱한 시선으로 보게 된다. 사랑의 시작은 호기심이지 않는가?





처음에는 그녀가 가진 비밀이 궁금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단순히 취향을 알아내 그것을 객관적인 '정보'로 취급하기에 그녀가 품고 있는 소소한 정보들을 어쩐지 자신이 사용할것만 같았다. 귀하게 얻어냈든 손쉽게 얻어냈든 정보를 얻어오는 것은 본인의 소관이었으나 사용은 허가가 필요한 일이었기에.




무엇보다 윤리적으로 옳지도 않았다. 남의 연인을 냅다 채가는 것은 아무래도 도덕적인 관념에서는 심하게 어긋나 있는 관계였으니 말이다.




물론ㅡ 효타는 그 생각을 냉큼 뒤로 넘겨버렸지만 말이다. 아무리 루치와 달리 유순하고 제법 온화하다고 할지라도 역시 그는 루치의 쌍둥이였다. 윤리적인 관점보다는 본인의 흥미와 개인의 임무가 더 중요한 녀석인지라. 효타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임무를 멋대로 미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내기, 로 정해버렸다.



만나다보면, 자신이 품고 있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내릴 수 있으리라. 애매한 관계보다 낫겠다 생각하며 미나를 불러낸 곳은 분홍빛 파스텔 톤과 커플들이 가득 모여 꽁냥거리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카페였다.




'진짜 카쿠랑 싸울 작정인건가.'





아예 마음을 제대로 먹은 것 같은 카페의 분위기에 뭐 씹은 듯한 표정으로 응수해준 미나였으나, 정보원으로써 수집해온 것들이 허사는 아니었는지 정말로 주문한 음료와 디저트들은 전부 미나의 취향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들이었다.




지나치게 달지 않고, 인공적인 맛이 강하지 않은 과일향으로만 이루어진 디저트. 혀끝에 어른거리며 묵직한 맛을 내는 생크림의 양은 적었으며 오히려 새콤한 딸기잼이 부드럽게 씹히는 덕분에 식감까지 상당히 괜찮았다.





뾰족하게 날세웠던 것이 무색하게, 효타는 그저 미나가 먹는 모습을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미나가 추가로 디저트들을 더 주문한 후 결제까지 대신해준 후에야, 다음에도 만날 수 있냐는 단조롭고 깔끔한 질문을 던졌을 뿐. 이 순간 거절해도 정말 그대로 신경을 끌 것 같은 쿨한 반응이었다. 도리어 그것이 미나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그녀는 짧은 고민 끝에 승낙한다.




"...그래."

"좋네~. 다음에도 맛집 투어 가자구. 여기 바나나 케이크도 맛있어."




카쿠 몫도 사갈거지? 태연하게 그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인상 하나 찌푸려지지 않는 효타다. 그의 속내를 짐작해보려는 듯 가늘게 뜨였던 눈동자는 금방 풀어지고, 미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나나 케이크와 몇가지 디저트들을 추가 주문을 넣었다. 포장을 기다리며 안전바에 몸을 기대어 선 뒷모습을 바라보는 효타의 눈은 이전과 달리 꽤 깊게, 가라앉아있었다.




카쿠와 미나. 둘의 사이를 파고들 틈은 없었다. 서로 가장 힘든 때에 곁을 지켜주었던 사람들인데 쉽게 부스러질리가 없었다. 아마도 서로가 더없이 소중하고, 그 귀한 인연을 함부로 폄하하지 않고 신중하게 접근하겠지.




몇번이나 고비를 넘기며 숨차게, 벅찬 순간들을 채워나갔을 터였다. 이제 막 학교에 돌아와 겉돌고 다시 나가야하는 그의 입장으로써는 너무나도 불리한 조건이었다. 본인도 나돌아다니고 싶어서 나돌아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거부했을 권한은 이미 잃었던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할말은 없었다. 학생회를 떠들석하게 휩쓸었다던 그 사건에서조차 효타는 그렇게까지 깊게 관여하지 못했으니 더더욱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 인내심에는 자신이 있는 그였기에.




효타는 너그러운 웃음을 지어보이며 디저트를 들어주기까지 했다. 손수 카쿠에게 바나나 케이크를 내밀면서도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으며 말이다. 그래, 이번에는 카쿠가 맞았다. 이제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그녀를 갖고 싶었다. 제 곁에 두고 카쿠, 그 녀석이 채워넣었던 순간만큼 자신이 곁에 있고 싶었다.




그리하여 공평해진 조건에서 겨루고 싶었다. 순전히 자신만의 이기심이었지만 어디 그 오만한 핏줄이 사라지겠는가? 효타 역시 슬프게도 제 쌍둥이를 지독하게 닮아버린 모양이었다.





"시험공부, 화이팅~."






앙증맞게 주먹을 쥐어 흔들어주며 효타는 미나와 카쿠가 자리를 완전히 뜨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기어이 중간고사가 다가오고 마지막 시험까지 끝마치고서, 효타는 느릿하게 다가와 두번째 데이트를 청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미나는 떨떠름해하는 낯으로 승낙했다. 물론 곁에서 카쿠는 같이 듣고 있는 상태였지만 효타에게는 알바가 아니었다. 그를 긁는 것 역시 퍽 재미난 일이었으니 일타쌍피지, 단순하게 게임으로 생각해버리는 효타의 사고방식이 상황을 정리해낸다.






"궁금한 게 좀 여러가지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응."

"카쿠의 어떤 점이 좋아서 교제를 허락한거야~?"





허락. 누가 우위에 서있는지 확고하게 드러내주는 단어에 우쭐해진 듯 눈썹을 쑥 밀어올린 미나는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기울이며 답했다. 착하잖아. 이런, 그 부분이라면 효타는 점수를 따지 못한다. 그러나 카쿠 역시 선한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는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효타의 얼굴에 푸스스하게 웃음을 터뜨린 미나. 속을 간지럽히는 웃음소리에 효타의 눈꼬리가 살짝, 떨린다.





"푸흐흐, 알아. 카쿠는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내게는 착하게 구는걸. 그게 기특하기도 하고... 일단 내 앞에서는 세상 다 줄 것처럼 구는데 싫을리가 있나."





고마운 것들도 많은걸. 미나의 웃음소리에 홀린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효타의 얼굴이 의식보다 먼저 습관적으로 나긋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렇구나. 그러나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은 그대로 드러나는 어투였다. 걔가 착하다니, 이해할 수 없다.




세상 다 줄 것처럼 구는 건 자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왜 자신이 아니라 그를 택했을까. 역시 곁에 없었기 때문인걸까. 나른한 표정으로 카쿠의 좋은 점들을 늘어놓는 미나의 말에 경청해주던 효타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역시 이번에도 미나의 말을 모조리 들어준 뒤였다.






"바나나 케이크 하나랑ㅡ."

"미나, 내가 다 주문해놨어. 기다리는 시간 아깝잖아? 아이스박스에 넣어뒀으니 가는 길에 녹을 걱정도 없다구~."

"아, 고마워. 애들 기다리겠네. 그럼 다음에 봐."





다음을 약속하는 문장이 두번째 만남에서 흘러나온다. 뛸듯이 기쁜 마음을 억누르며 손끝을 여상히 흔들어 배웅한 후, 효타의 고개가 살포시 비틀린다. 뒤에 놓인 테이블에 책상을 부술듯이 노려보고 있는 카쿠를 흘겨보는 시선은 흥미와 즐거움으로만 가득 번들거리고 있었다.






"책상 부수면, 그것도 학생회비로 메꿔야하는건가?"






빠직. 이런, 책상에 금이 갔다. 안타깝다는 듯 휘파람을 불어 책상의 명복을 빌어주는 효타를 향해 낮고, 살벌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으르렁거린다. 이전과 달리 장난이 아님을 드러내듯 날이 잔뜩 서있다 못해 그대로 달려들 기세인 목소리였다.





"언제까지 그녀 주변을 맴돌 생각인겐가, 효타."

"으음~.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나올줄은 몰랐는데~. 사실 방금 결정했거든."

"....?"





효타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마음껏 날뛰어도 좋다고 허락을 받았을 때 흡족해하는 루치의 표정을 닮아있는 모습. 카쿠가 본능적으로 경계하며 주먹을 움켜잡는 순간 효타의 입이 벌어지고 그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쏟아낸다.





"미나랑 더 가까워지고 싶네?"

".....너."

"기왕이면 사귀어보고 싶고. 가능하면 계속 곁에 있고 싶고ㅡ"

"너."

"어쩌지, 난 질 자신은 없는데. 너랑 달리 난 한번 매달리면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재주가 있거든!"

"...야."

"너무하네, 선배한테~."







능청스럽게 이어나가던 말이 끊기고 카쿠의 주먹이 효타의 뺨을 스친다. 찰나와 같았던 순간이었으나 그 짧은 순간에도 고개를 비틀어 방향을 바꾼 효타와, 그런 그를 따라 허공에서 궤도를 바꿔낸 카쿠였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실력면에서는 비등했다.



마음먹고 나선다면 오히려 효타 쪽이 조금 더 우세하리라. 언론전과 온갖 정보들을 풀어 본인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도가 튼 녀석이었으니 오히려 나선다면 패배는 불보듯 빤한 일이었다.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대치상태를 유지하는 카쿠와, 그런 그가 가소롭다는 듯 느긋하게 바지주머니에 손까지 넣어놓고선 생글거리는 효타다. 불안하게 떨리는 동공을 바라보며 그와 똑 닮은 빛깔을 띄운 효타의 눈동자가 둥글게 말려올라간다.





"잘해보자?"





같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을 내뱉는 저 입에 주먹을 꽂아넣을수만 있다면. 카쿠의 턱이 힘차게 물리고 힘줄이 드러나도록 쥐어진 주먹이 애꿎은 땅에 박혀 파르르 떨린다.




자신과 똑같은 빛. 카쿠는 이제 효타가 미나에게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눈치였으나 카쿠, 본인은 그 감정을 몇년이나 끌어안고 버둥거렸으니 그 의미를 모를리가 없었다. 그건 분명 연심이 아니었다. 그건 단순한 사랑이 아니었다.




그들의 사랑은 소설책에 나오는 것처럼 풋풋하지 않고 싱그러운 여름의 빛도 없었다. 그들의 사랑은, 질척거리는 붉은빛과 발목을 움켜잡고 수렁으로 끌어당기고자 작정하고 힘주어 당기는 관계였다.



그리고 그걸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칭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소유욕이라 불렀다. 제 품안에 당겨 사랑스러운 것을 담아놓고 남에게는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을 사랑이라 칭하지 않았다. 나락으로 떨어지더라도 같이 떨어지자 발목을 움켜잡고 끌어당기는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감정이 아니었다. 하여 카쿠는 이를 악문 채 효타를 미나로부터 떨어뜨릴 계획을 부지런하게, 머릿속에서 굴릴 따름이었다.




감정에 대해서만큼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무지의 사랑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사랑이 아님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자신이 어디에 위치했는지를 알아차릴 터였으니. 카쿠는 이번에도 그 풍랑과 매서운 바람에 그녀가 깎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제 품을 한번 내려다보는 것이다. 그녀를 품을 정도로 넓은지, 그녀가 마음놓고 자신을 탐낼 수 있을만큼 단단한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다.




계절이 바뀌는 시간 동안, 그 바람에 생채기라도 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몫이 될 것임을 알았다. 그녀의 눈물 한방울이 심장을 그어내리는 핏방울이 될 것임을 알았으니까. 가을은 금방 스친다. 곧 겨울이었다.



괜찮아. 그리 속삭이는 음성은 자신을 위해서다.



다시 한번 괜찮다고 되내이며 일어선 몸이 흔들거릴 때, 카쿠는 굳건하게 힘주어 발을 내딛고 균형을 바로잡는다. 그동안 얼마나 수많은 연적이 그녀를 탐내었던가?




그 추잡한 손들을 치워낸 것도 그의 몫이 맞았다. 효타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성 친구가 곁에 있으면 미칠듯이 불안했고 마음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웃음소리는 행여 남이 들을까 귀들을 모조리 뜯어내버리고 싶었으니까. 하다못해 동성 친구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보내는 것을 멈출수가 없었으니 효타의 눈은 매우 정확한 셈이었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자신이 그녀의 곁에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녀가 힘들었던 때, 그녀의 찰나와 스치는 하루마저도 카쿠는 그녀의 곁을 올곧게 지켰다. 그렇게 하여 얻어낸 자리를 어디 순순히 빼앗기겠는가? 카쿠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남은 책상이 부서지도록, 힘주어 잡으며 카쿠는 입꼬리를 당겨웃었다. 어느새 제법 효타와 닮아보이는 미소였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고. 바보자식의 사랑 같은 건 치우기 아주 간단하니 말이네..."





바보는 영원히 바보로 남아있어야했다. 그가 영원히 자신이 품은 감정을 모르도록, 카쿠는 최선을 다해볼 심산이었다. 실로 아둔하여 추잡하기까지 한 수컷들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멀찍히 바라보며, 미나는 고고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그들의 재롱을 한껏 지켜볼 심산이었다.



원래도 귀여운 수작질을 부리는 카쿠와 새롭게 등장한 만만치 않은 녀석. 살살 눈웃음을 치면서도 정확하게 미나의 취향만을 파악해 마음에 드는 행동만 쏙쏙 골라하는 것이 카쿠가 괜히 위협을 느끼는 게 아니었다.




처음에 먹었던 컵케이크, 생각보다 굉장히 취향에 들어맞아서 혼자 가서 몇번이나 사먹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른한 기지개를 피며 가을의 볕을 만끽하는 미나다. 귀가 있었더라면 까닥이며 기분좋게 햇빛에 녹아내렸을 듯한 포즈를 취하며, 미나의 걸음 또한 편안하게 퍼진다.




결국 자신이 고를 선택지는 하나겠지만 뭐 늘어난 후보군 역시 나쁘지 않으니 재롱이나 구경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미나의 미소가 상쾌하게 가을하늘을 향해 비추어진다. 청명하고 구름 한점 없는 날씨, 바람은 딱 시원하고 서늘한 느낌이었다. 가늘게 뜬 적안이 카쿠를 닮은 미소를 자아낸다.




많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즐거운 계절이 될 것 같았다.

'𝐎𝐍𝐄 𝐏𝐈𝐄𝐂𝐄 > 𝐶𝑜𝑚𝑚𝑖𝑠𝑠𝑖𝑜𝑛'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애  (0) 2024.10.30
네가 없는 첫 봄이었다  (0) 2024.10.01
고독  (0) 2024.08.10
동경과 사랑 그 어딘가  (0) 2024.08.08
빛바래지지 않을 기억  (0) 2024.07.19

W.MOMO


*커미션글입니다.



살아남아라.

 
 
그렇게 흔하디 흔한 대사 하나 얘기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육중하고도 무거운 철문이 믿을 수 없이 부드럽게 닫히는 순간 환하게 아이들을 비추어주던 빛들이 단숨에 삼켜진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훈련받은 성과를 발휘하듯이ㅡ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무리지어 앉았다. 그리고선 각자에게 주어졌던 아주 밤톨만한 식량을 움켜잡은 채 교관의 멱을 어떻게 딸지, 수근거리며 즐겁게 이야기하곤 했다.
 
 
이곳에서 살아나가는 것은 하나뿐이라는 말은 없었다. 그저 버티라는 말 뿐이었으니,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며칠이나 걸릴지 내기를 입에 올렸다. 와중 현명한 몇몇 아이는 숫자를 세기 시작하며 시간을 판단하고자 노력했고 소수의 아이들은 한숨을 내쉬며 그저 체력보충이나 하겠다고 구석에 자리잡아 앉아있곤 했다.
 
 
소년은 어떤 경우였느냐 하면ㅡ 불행스럽게도 그는 첫번째 부류였다. 물론 얼간이들처럼 무리를 지어 교관욕을 신명나게 하지는 않았으나 그 역시 분명 구석에서, 제 식량이 들어간 소박한 가죽주머니를 움켜잡은 채 교관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곤 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나간다면, 그리고 버티라는 그 허접하기 짝이 없는 명령을 완수해내면 꼭 가서 멱살을 붙잡고 탈탈 털어야지, 그대로 엎어치기도 하고 람각 연습 상대도 되어달라고 고집도 부리면서 있는 힘껏 괴롭힐 생각에 골똘하던 아이들이 조용해진 것은 나흘이 지난 후였다.
 
 
눈치 빠르고 영악한 녀석들은 제 식량주머니에 든 조그마한 빵 부스러기가 그 어떤 보석보다 귀중한 가치를 지녔음을 깨닫고 손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고 순박하고 상냥했던 아이들은 일찌감치 다른 아이들에게 빼앗겨 그 어떤 것도 먹지 못한 채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야금야금, 때로는 사납게 식량을 빼앗긴 아이들이 서넛, 일곱, 열둘, 스물에 달하기까지 단호하게 빛을 앗아갔던 철문은 열리지 않았다.
 
 
 
"열어! 빌어먹을, 열으라고!!"
 
 
 
쇠된 목소리로, 거친 호흡으로 굳건한 성처럼 서있는 문을 있는 힘껏 두드리던 아이들은 힘이 빠진 채 손톱이 다 빠진 손가락을 들어올렸고 아득바득 이를 악문채 피묻고 깨져 조각난 손가락으로 저주를 새겨넣은 아이들의 숨은 여느 날의 들꽃보다 더욱 허무하게 스러졌다.
 
 
그 아이들의 시체를 짓밟으며, 이제는 그 안에서 혹시라도 남은 식량이 있는지 찾아보려던 찰나 뒤에 있던 굶주린 아이가 달려든다. 높게 치켜올린 다리가, 한때에는 람각을 위하여 누구보다 힘차게 비상할 듯 올려졌던 다리가 겨우 반절까지밖에 올라가지 못한다. 그 다리로ㅡ 첫날에는 분명 소근거리며 다함께 교관에게 복수하자 말하였던 친구를 짓밟는다. 있는 힘껏 내질렀던 손가락이, 지건을 위해 뼈가 부러지도록 연습했던 손끝이 부족한 힘으로나마 생생하게 두근거리던 심장을 꿰뚫는다.
 
 
비명조차도 사치인 곳이었다. 굶주린 승냥이들은 느릿한 걸음으로 제 품속의 식량을 아주 조금씩, 떼어내며 짓씹었고 습격받은 아이는 부러진 이빨로 다른 녀석의 팔을 씹어먹는다. 그곳에서 흐르는 피에 일제히 바짝 마른 목을 축이려고 개처럼 달려드는 것도, 이제는 그렇게까지 이질적인 풍경이 아니었다.
 
 
함께, 다같이 나가자고 호소하던 녀석은 어느새 사방천지로 찢어져 이 창고 구석의 어딘가에서 나뒹굴고 있고 유독 이기적으로 굴었던 아이는 무리지어다니는 녀석에게 한꺼번에 물려 식량은커녕 사람의 형체조차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시체가 쌓이고, 그 안에서 들끓는 구더기와 파리들을 바라보며 한 아이는 헛웃음 지었다.
 
 
 
"쟤네는.. 배고프지 않.겠다..."
 
 
 
힘없는 목소리에 일순간 개떼가 되어버린 아이들의 눈에 연민이 일렁인다. 짐승과 금수보다 못해진 가여운 스스로와 친구, 가족보다 귀하게 여겼던 인연들을 스스로 잡아먹고 살아남은 자신들을 끔찍하게 혐오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이제 누구보다 스스로를 가장 증오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던 인연의 목에 이빨을 박아넣고 탐욕스럽게 찢어진 가죽 주머니를 낚아채고 그 안에 들은 손톱만한 빵 부스러기에 헐떡거리며 입 안으로 털어넣는 스스로를 가장 혐오하기 시작했다.
 
 
소년, 마찬가지로 금수가 되어버린 소년 또한 스스로의 생에 가치가 있는지 골똘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저 멀리 누군가의 숨이 꺼지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니까. 아직 힘이 남아있는 녀석은 부러 숨이 끊어진 척 힘없이 연기하고 다가오는 녀석의 목덜미를 물어뜯었으니 또 감히 다가설수도 없는 곳이었다.
 
 
고독, 소년과 아이들은 그곳에서 자신의 고독과 싸웠다. 형편없는 가치로 전락하고 그저 허울좋은 것이 되어버린 제 존엄을, 생명의 숭고함 따위를 땅바닥에 내던진 채 귀신의 눈으로 이리저리 누군가 죽기를 기다릴 뿐인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단 둘만이 남았다고 생각되는 때, 소년은 오래도록 일어나지 않았던 몸을 일으켰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사방으로 덜덜 떨리는 다리, 말을 듣지 않는 손이었으나 하나남은 아이 역시 때가 되었음을 느끼듯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것이다.
 
 
살자. 살아남자.
 
 
입밖으로 내뱉은 문장은 아니었으나 같은 의지였다. 삐쩍 말라 생기를 모조리 빼앗긴 채 죽지는 말자. 무력하게 식량을 강탈당하고 짐승이 되어 굶주림에만 눈이 멀어버린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던가. 사랑, 친애, 우정, 존엄, 선, 다정, 오직 생존이라는 것 하나를 위하여 내던진 대가가 지독하게도 많았으니 우리는 죽지 못했다.
 
 
우리가 지금 짓밟고, 넘어서며 서로를 향해 다가서는 동안 흐리게 스쳐지나온 시체들처럼 죽지 말자. 그리고 손수 배운 살인기술로 죽어버린 친구처럼 죽지 말자. 친애하고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그리워할 풍경에 함께 있었던 그들처럼 죽지 말자. 녹음이 지나치게 찬란했던 그때로 돌아갈 것이다. 지나치게 눈이 부셨으나 도리어 그렇기에 아름다웠던 그때로 돌아갈 것이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순간임을 알면서도, 소년은 이를 악문 채 과거의 편린을 움켜쥐었다.
 
 
그리하여 소년, 손을 들어올린다.
 
 
아이의 손과 소년의 손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의 목을 향해 다가서는 순간, 아이는 왜 손을 떨구었을까. 아이는 왜 소년에게 순순히 죽어줬을까. 어쩌면 먹은 게 소년보다 없어 힘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미처 마지막 순간에 피워올리기도 전에 꺼져버린 불꽃일지도 몰랐다. 있는 힘껏 끌어모았던 절박함이 소년보다 모자랐을지도 몰랐다. 정말 어쩌면, 소년이 조금 더 절실하게 생을 갈구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어 드는 생각은ㅡ 어쩌면 그마저도 환상이면 어떻게 해야하지, 하는 염려와 혐오로 뒤덮인 마음이었다. 다가온 친구의 목을 물어뜯고 죽은 친구의 주머니를 뒤져서 살아남은 소년의 죄악감으로 만들어진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살아남고 싶어 발악을 하고 있는 소년의 꿈일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저기 기다렸다는 듯 기적처럼 쏟아져내리는 빛은.
눈에 시리도록 아프게 박혀오는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찬란한 흰 빛은.
 
 
이마저도 환상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𝐎𝐍𝐄 𝐏𝐈𝐄𝐂𝐄 > 𝐶𝑜𝑚𝑚𝑖𝑠𝑠𝑖𝑜𝑛'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가 없는 첫 봄이었다  (0) 2024.10.01
무지의 사랑  (0) 2024.08.21
동경과 사랑 그 어딘가  (0) 2024.08.08
빛바래지지 않을 기억  (0) 2024.07.19
친애親愛  (0) 2024.07.0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