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MOMO
딱히 기대라는 것을 품을 수가 없는 인생이었다.
그러나 편한 삶이었다. 정신적으로는, 시키는 명령에만 충실하다면 살인에 대한 이유조차도 정당화되는 곳이었으니. 소속된 곳에 불만을 품으라고 명령한다면 따르겠으나 구태여 발버둥쳐 빠져나가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대체 그놈의 자유가 뭐라고 목숨을 내던진단 말인가? 물론 목숨도 딱히 귀중한 것은 아니었지만, 살아있으면서 누릴 수 있는 것은 다분하게도 많았기에 기왕 귀한 것을 고르라면 그는 망설임없이 삶이라 말할 것이었다.
실로 지루하고도 평온한 숨이었다.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삶이었으나 큰 불만은 없었던 꼭두각시의 삶. 그리고 제 팔다리에 묶인 줄이, 그것이 성가셔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더라. 명예의 정점에 섰다는 CP0의 게르니카는 미간을 좁히며 루피의 첫 등장을 떠올리기 위해 헤집어진 머릿속을 뒤지며 기억의 파편을 찾아 떠돌아다녔다.
니카, 세계정부에서는 언급조차도 금해진 그 이름에 처음으로 든 생각은 생각보다 별것 없는 이름인데, 라는 뻘생각이었다.
오래되고 낡고 닳아 전설이 된 것들은 으레 이게 맞다고 증명하듯 길고도 아름다운 이름들을 가졌으니. 레비아탄이나, 베헤모스나 하다못해 악마의 이름마저도 꽤 선뜩하고도 멋있는 어감이었다. 루시퍼와 루시엘 등등. 물론 고대의 것을 알아내려고 하는 것도 읽는 것도 세계정부에서는 죽을 일이었지만 하는 일이 그런 걸 없애러 다니는건데 조금쯤은 알고있을 수도 있지.
태연하게 세계정부의 감시를 외면한 게르니카의 머릿속에서 마침내 루피가 니카로써 자신의 기억에 똑바로 각인된 순간을 떠올려냈다.
그가 기억을 할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니카일지도 모른다고 오로성들이 근심어린 말이 무거운 입들 사이에서 오르내릴 때였다. 절대 그가 각성을 하지 못하도록, 아니 그 전에 처리해야한다며 쑥덕이는 오로성들 사이에서 게르니카는 눈썹을 꿈틀거리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막아내? 저들이 필사적인 것이 무료한 생애 꽤 적절한 파란으로 다가왔음을.
호기심도, 의아함도 내비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았으므로 게르니카는 입매를 굳혔고 단호하게 무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들에게는 그저 손쉽고 다루기 괜찮은 도구가 필요할 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도구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게르니카는 아직 그 얄팍한 정보 하나에 자신의 신변을 모조리 내던지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제 목숨이, 제 호기심보다 더 귀했으며 제 길게 이어젼 온 생이 의아함보다 더 값졌다.
오로성들 또한 그걸 잘 알아서인지, 아니면 꽤 오랜 나이가 되도록 그들에게 충성을 다 바쳐서인지, 신뢰를 위해서인지 입을 다문채 그런 잔잔한 파동을 모른 척 넘어가주었다.
너무 구부리고 억척같이 두드리면 결국 아무리 단단한 쇠라도 깨지는 법이었으니. 도구의 안전과 호용성을 떠올린 그들의 입이 굳게 다물린 채 눈빛으로만 경고가 지나간 순간, 게르니카는 무표정하게 일탈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꽤, 마음에 드는 어감이었다.
[와노쿠니로 가라. 그곳에서 니카의 탄생을 막아라.]
명령을 받은 순간부터 그것을 뒤집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오로성들은 절대 그를 와노쿠니로 보냈을리가 없었을텐데. 게르니카는 늘 그렇듯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조아렸으며 그들의 명령에 기꺼이 어떤 고통도 감당할 것처럼 굴어 명령을 받아냈다.
시킨 명령만 따르는 생각없는, 무미건조한 기계. 그리 칭해지는 건 아마 굳이 표정을 숨기지 않아도 될만큼 굳어버린 얼굴 근육과 미비하기 짝이 없는 변화 때문일 터였다. 그리고 이 순간 게르니카는 자신의 담백하고도 견고한 얼굴근육을 칭찬해주고 싶어졌다.
마침내 와노쿠니에 도착해 카이도를 마주한 순간, 그리고 그 아래에 짓밟히고 망가진채로도 기세만큼은 등등한 루피를 본 순간, 게르니카는 제 가슴속에서 줄곧 꿈틀거리던 파란波瀾 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의 이름은 해방이었다.
"네놈.. 지금.. 무슨 짓을..한건지 아는거냐!!! 20년 만에 만난 호적수였단 말이다아!!!"
우렁차게 외치는 카이도의 소리를 들으며, 게르니카는 터져나오는 실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니카의 모습을 숨겨라, 니카가 각성하지 못하도록 막아라. 그 명령에 정면으로 도전해보는 것은 생애 있어서 처음으로 해보는 반항이었기에 더더욱 기뻤던 것 같기도 했다.
도구조차도 오래 사용하면 닳고 낡아 이가 빠진다.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하게 누려야할 자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소속에 대한 의심조차도 허락하지 않은 당신들이 믿은 변치 않을 충성이라는 것은 얼마나 얄팍하고도 한심한 가치인지, 이번 기회에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 직접 온몸을 내던져 기회를 만들어냈지 않은가. 흥이 식어버렸다는 듯 온갖 짜증을 모아 힘껏 내리찍히는 몽둥이 아래에서, 게르니카는 하얀 분칠이 모조리 갈라지도록 폭소했다.
으깨지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쓰러진 이후로 와노쿠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직 요셉의 시선이 남아있기 때문이었지만. 사실 니카가 되어 울린다는 그 북소리를 한번 들어보고 싶어서였을수도 있었다. 니카를 알리지 마라, 묻히도록 만들어라.
그 명령에 정면으로 대들기로 결정했다면 기왕 덤빌 것 온 세계가 다 알아버릴 정도로 크게 대들어봐야하지 않겠는가? 자신의 희생을 짓밟고 일어설 찬란하고도 새하얀 태양신이여, 내 세계를 부수고 악마처럼 삶을 앗아가주기를. 하여 마침내 당도할 지옥을 선사해주기를. 게르니카는 고요히 무릎을 꿇고 기꺼이 자신의 시체를 밟고 일어설 자유를 기다렸다. 하여 마침내.
쿵——! 쿵——!
귀가 멀어버릴 듯 힘차게 뛰는 심장소리. 단순히 두근거리는 것을 넘어선 소리였다. 심장이 힘차게 혈액을 솟구치며 승모판막이 닫히고 열리는 소리. 혈액이 발끝부터 머리까지 한번에 힘차게 돌며 나 이곳에 살아숨쉬고 있노라고 외치는 몸의 소리. 살아있음을 누구보다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는 소리에 게르니카의 눈이 압도된 청력에 집중하듯 천천히 감긴다. 단순히 심장이 뛰는 소리를 넘어서 온 세계를 아우를 듯 압도적으로 넓고, 광활하게 울리는 소리.
그래, 오로성들이 왜 이 소리를 두려워했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주위의 다른 소리를 모조리 잡아먹으며 점점 커지는 북소리에 저도 모르게 덜컥 믿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희망이, 조금씩 고개를 치켜든다. 작고 보잘것없어 스스로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한 소망이 생명을 틔워내라 울부짖는 소리에 봉오리를 피워낸다.
창백하여 아무 색 없었던 세계를 가르고 숨이 멎어버릴 듯한 파아란 색이 쏟아져내려온다. 흑백으로만 이루어졌던 세계에 처음으로 빛이, 눈이 멀어버릴 듯 새하얗고도 다채로운 빛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의 세계를 온전히 하나도 남김없이 휩쓸며 산산히 부숴뜨린다. 흔적조차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창백했던 세계가, 그의 전부가 모조리 거짓되어 바람에 흩날려간다. 봄바람이었다. 새로운 것을 불러내고 생명을 움틔우는 바람이었다.
아 정말 어쩌면. 기대라는 것을 품어도 괜찮겠다. 지루하게 이어져온 생애에 미련은 없었건만 어째서 후회를 불러오는건지.
시키는대로 죽였고, 명령한대로 행했으며 그 사이에 자신의 감정은 겉치레에 가까운 것이라고 여겨 쳐내고 뭉쳐 버렸었다. 텅 비어 아무것도 못 느끼고 있다고 여겼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들은 훌륭한 도구가 탄생했다며 박수를 치고 기꺼워하는 표정으로 제 몸을 맡겼다. 완벽하게 무감정한 살인병기 하나.
죽일 이유가 없으니 죽이지 않는다. 그 단순한 명제 탓에 천룡인들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은 인지하고 있었으려나?
하늘을 날고 달리는 신, 천룡인. 그러나 원래 뛰면 떨어지고 날아오르는 자는 언젠가 추락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영 모르는 듯했으니. 높은 곳에 있는자는 영원하지 않다. 도약한 후 뺨을 스치며 내려오는 공기 또한 상쾌하기 그지 없는 것을 나고 자랐을 때부터 높디 높게 태어나 이제는 나는 법마저도 잊어버린 저들이 하늘을 두려워하게 되는 때는 언제가 되려나. 게르니카는 그때를 조금 앞당기기 위해 자신의 생이, 지루하고 무미건조하던 흑백의 세계가 갈려나간다고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저 희끗하여 빛바랜 색채의 세계가 이제는 이곳에 자신이 살아 숨쉬고 있노라고 온 사방의 색을 자랑하듯 보여지고 있었으니까. 비로소 제 곁에 쿵쿵거리며 호흡하는 것들이 사람같았다. 흐느끼며 루피의 이름을 부르짖는 저들의 소리가 먹먹하지 않았다. 기대하며 울부짖는 사무라이들의 목소리가 벌레의 날개짓으로 들리지 않았다. 비로소. 이제야 비로소.
그는 삶을 되찾았다.
자신이 내던지고 버려 귀히 여기지 않았던 생이 벅차올랐다.
"이거, 진짜냐? 그림이나 그런 게 아니라 확실히 사실이야!?"
"믿기지 않는다면ㅡ,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사진들도 보내주지."
"아니 뭐 나야 좋긴 한데... 수상쩍잖아..? 갑자기 익명의 요원으로 사진들을 배송해준다니.. 그것도 와노쿠니에서만 볼 수 있었던 그 니카의 모습을 말이야! 대체 원하는 게.. 뭐지?"
화제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걸로. 수배서를 바꿔주기를 바란다. 신문사에 전한 아주 간단하고도 확실한 문제에, 수화기 너머로 우스꽝스러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 그런 건 원래 전문가에게 맡겨야하는 거 아니겠는가? 곧 이 세계에 니카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도록 확실하게 온 세상에 뿌려주지. 확고하고 단호한 장담에 게르니카의 웃음이 힘없이 흐트러져 바스러진다. 나른하고도 잔잔한 미소에 갸웃거린 알바트로스가 꽥꽥거렸고 그 높고도 당찬 목소리에서 자신감을 읽어낸 그는 느릿하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드디어 제 자유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이 어떤 결과로 다가올지 기대되기 시작했다. 영겁의 세월을 지나 마침내 게르니카는 자신의 세계가 썩 괜찮다고 느껴졌다.
다시금 색을 잃고 추락해 떨어져버려도 온 세상을 다 감싸쥐었던 찬연한 색만큼은 결코 잊지 못할 터이니 잔악하고도 음흉한 노인네들이 제 머릿속을 들춰내고 심장을 끌어내도 결코 다시는 잊지 못할 색이었다. 벅차오른 생이, 내딛는 걸음이,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이 기껍게 그의 풍경을 조금씩 물들어갔다. 만연하고도 광활한 세계에 자신을 던져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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