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Bumgore
 
*이 글은 커미션 글입니다
*드림글입니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결국 그녀를 먼저 발견해낸 것은 그 조그맣고 맹랑하던 꼬마였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콧대 높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루치도, 아닌 척 여자의 고운 미모에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리던 재브라도, 누구보다 항상 한발자국 물러서 상황을 돌아가는 걸 지켜만 보는 블루노도, 누구에게든 열성적으로 자신의 마음만을 내보이던 쿠마도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사방팔방에 사소한 소문들을 물어 나르고 떠드는 것을 좋아하던 후쿠로조차도 그 여자가 나오던 날은 입을 닫은 채 연신 불안해하며 태연하게 여자의 마중을 나가는 칼리파의 등뒤에서 파르르 떨곤 했으니 결단코 첫인상이 온화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온몸에 붕대를 휘감고 드러나는 살갗에는 모조리 피고름과 딱지로만 이루어졌다는 것을 본 이후로 꼬마아이는 여자를 도무지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어쩌다 다쳤을꼬, 격하고 험한 훈련 도중에도 그리 아프게 상처입지는 않을 터인데 허면 따로 정부에서 관리하는 실험체라도 된단 말인가?



그렇다 하기엔 꼬마아이의 감은 그 여자가 무척이나 중요하고도 귀한 인물임을 꼭 집어 골라주고 있는 듯했다.





실험체라 하기엔 자유의사를 넘치도록 가지고 있는 듯했다. 누구보다 자유롭다는 듯 자신조차도 함부로 다니지 못하는 사법의 탑을 휘젓고 태연하게 뒷모습만을 보인 채 타박타박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영영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아 초조함이 일었다.



아예 이 세상에 완전히 사라져버려도 유감 없을 듯이 구는 소녀의 태도에 괜히 스스로 먼저 조바심을 내곤 했던 것이다.





그런 꼬마아이의 걱정을 들었다면 때마침 새로운 타투에 관심이 생겨 새겨놓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걸 모조리 벗겨낸 상처였을 뿐인 여자는 무척이나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니깟게 뭔데 걱정이라는 알량한 감정을 제 앞에 들여놓았느냐 고고하게 화를 냈겠지만.



아쉽게도 아직 그들이 그토록 친하지는 않아 말을 섞지는 못하는 것이 기회였다.



바짝 말라 뼈만 삐끄덕거리며 움직이는 소녀. 하나코, 귀신, 뼈다구 등 다양한 명칭으로 소근거리며 괴담의 주인공이 된 여자를 까아만 눈동자에 가득 담은 꼬마, 카쿠가 처음으로 괴담의 주인공을 보았을 때 느꼈던 생각은 아쉽게도 '자랑할 거리가 있으려나?'였다. 그 역시 그저 호기시 왕성한 소년이었으니 어떻게 생각하자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게 그의 첫번째 관심이었다.




괴담의 주인공을 직접 보았다 말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여자를 살피는 눈길에도 여자는 태연히 그 마르고 마른 붕대감긴 다리를 휘적거리며 사법의 탑, 꼭대기로 향하는 것이었으니. 카쿠는 그 뒤로 골똘히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훈련 중에 딴 생각하지마라."

"그 여자 이름이 뭐요?"




목도로 때려맞는 것 정도론 이제 그렇게 아프지 않은 카쿠의 맹랑하기 짝이 없는 질문에 교관은 다시 한번 휘두르려던 목도를 놓치고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니 그걸 니들이 어떻게, 첩보요원으로써 거짓말도 못한다며 도리어 스승을 놀리고 조롱한 꼬마아이의 곁에 금발의 단발을 바람에 흩날리며 칼리파 또한 날카롭게 조르기와 질문폭탄에 가세를 더했다.




"기밀 대상이 아니라면 저희 또한 알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저희는 강하니까요."




당연하다는 듯 드러내는 칼리파의 자존심에 교관의 얼굴이 무참하게 구겨지는 것도 잠시 칼리파의 주장에서 허점을 발견한 교관의 입꼬리가 비죽 유치하게 올라간다. 아니, 아직은 강하지 않지! 너희는 아직 정식 CP요원도 아니고 그저 훈련생일 뿐이지 않나! 당당하고도 뻔뻔스럽게 내민 교관의 합당한 반박에 칼리파의 미간이 좁혀지고 못마땅함을 드러낸다.


물론 즉시 카쿠가 생글거리는 낯으로 교관의 반박을 다시 한번 정면에서 구겨버렸지만.




"아하하, 하지만 우리가 아니면 그 누가 CP요원이 될 수 있다고 그러는감? 우리보다 더 미래가 유망한 후보생은 없네, 교관."




자랄만큼 자랐고 우리는 이제 호기심을 억누르고 훈련에만 매진할 어린애들도 아니지. 물론 교관 자네에 비하면 한없이 어리지만 아예 천지분간도 못할만큼 멍청하지는 않단 말이네! 자네들이 그리 길러주었지 않는감? 고맙게도 말이지!



태연스럽게 교관의 성질을 긁어내리고 칭찬까지 덧붙여 나락과 극락을 동시에 경험하게 해주는 화법에 교관의 얼굴에서 어이가 가출한다. 대체 어쩌고 싶은 것인지 이제는 제법 울먹거리는 표정까지 만들어지자 이 소악마들은 잠시 서로에게 눈짓을 교환하고 자신들의 흥미와 호기심을 잔뜩 앞세워 느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간단하네, 그저 그 아이의 이름만 알려주면 될 일이네."

"어머, 욕심이 너무 없는 것 아닐까, 카쿠? 나는 아냐, 나는 그 아이 이름부터 인적사항, 왜 사법의 탑에서 머무르고 있는건지 온갖 정보가 다 궁금해. 아는대로 다 불어줘야겠어."




칼리파의 말보다 카쿠의 말이 더 무서운 것은 왜일까, 교관은 바르르 떨며 대체 누가 부주의하게 유망한 요원 후보들이 견학을 하러 오는 시점에 정체불명의 그 귀신, 미나가 나오지 않게 막아세우지 않은 것인지 사법의 탑에 있는 모든 것들을 욕하며 허겁지겁 두 손을 들어올려 항복의 자세를 표했다.



사자가 먹잇감을 몰아넣듯 슬그머니 거리를 좁혀오던 아이들의 눈에 승리자의 달디 단 미소가 지어진 순간 교관은 울상으로 마침내 미나에 대한 정보를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음을, 그 잔인하고도 괴이한 성격의 소녀에게 솔직히 고백할 수 없었다.



자신이 정보를 털어놓았다는 것이 밝혀지면 자신의 피로함의 원인이랍시고 냅다 칼들고 쫓아와 포를 떠버릴테니까. 교관은 자신의 최후가 여자에게 얇게 포뜨여 과다출혈로 끝장나는 상황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피눈물 머금고 알려진 조그마한 여자의 이름에, 카쿠는 괜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려 여자가 있을법한 사법의 탑을 유심히 바라보며 눈동자를 굴렸다.



미나.

미나. 귀하게 얻은 여자의 이름을 속삭이며 한껏 조심스럽게 굴린 그 이름으로 카쿠는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름을 알았고 칼리파 덕분에 어쩌다가 그곳에 있어야 하는 사연도 알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곁으로 데려올 일뿐이었다.



하여 당당하게 교관실의 문을 부수고 들어온 카쿠의 모습에 이번에는 또 뭐냐며 지긋지긋해하는 교관이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게 된 것도 덤이었다. 이번에는 또 뭘 요구하려고! 무엇이 되었건 이제는 순순히 당해주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교관의 머리통을 열어젖히게 만든 건 역시나 해맑은 인재 아이의 발언이었다.


이게 정말 인재 人材인건지, 인재 人災인건지 이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수준이었지만 상부에서는 인재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 그것이 교관의 불행이었다.




"안돼!!"




무얼 요구하던 아무튼 범상치 않은 것이리라. 다짜고짜 말부터 꺼내기 전 거절하는 교관의 말에도 카쿠는 놀란 눈을 잠시 둥그러니 떴을 뿐 역시나 가뿐하게 교관의 말을 씹어버리곤 손바닥을 펼쳐 보이는 것이었다.



마치 거래라도 하듯, 여자ㅡ미나와 함께 지내고 싶어, 폭탄선언을 내뱉었다.



어차피 사법의 탑에서 계속 머무르게 하려면 CP여야만 하지. 그렇다면 정식 훈련코스를 거치는 게 역시 더 좋지 않겠어? 설마 훈련코스도 거치지 않은 불안요소인 사람을 사법의 탑에 계속 머무르게 하려는 건 아니지? 칼리파가 일러준 것이 틀림없을 말을 맹랑하게 지껄이며 카쿠는 이번에도 자신의 미래를 걸고 여자를 불러왔다.



루치 이후로 두번 다시 나오지 않을 범재 소리를 듣는 소년의 깜찍하고도 소소한 요구에 상부는 작은 웃음을 터뜨리며 기꺼이 그의 논리에 져주었고 그렇게 미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법의 탑의 귀신 노릇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사연이었다.




"...미나."




자기 소개를 하라는 말에 퉁명스럽게 이곳에 오기엔 너무 나이들지 않았냐는 항의 없이 이름만 툭 내던진 그 여자의 몰골에 어리고 앳된 아이들은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음도 어느정도 한몫했지만, 그럼에도 카쿠는 무작정 자신의 시야 안에 들어온 그 여자가 마냥 좋았다.



그토록 바라던 요원다운 일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선의로 구해낸 첫번째 사람이었기에.



물론 당사자가 그것을 구명이라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구해낸 사람의 비극까지는 헤아리기 어려웠으니 카쿠에게만큼은 미나의 존재 자체가 증명이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못하지 않는다는 증명, 묘하게 열등감과 약간의 체념으로 바라보았던 루치마저도 사법의 탑에서 그 귀신을 구원하기란 쉽지 않아보였으니까!


물론 루치가 그런 일에 상관하지도 관심도 없다는 건 알지만... 희열과 시무룩한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던 카쿠가 마침내 결정한 것은 구안하오에서도 유독 조용한 인물로 손꼽히게 되어버린 미나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이었다.




"난 카쿠라고 하네! 자네를 사법의 탑에서 꺼내준 장본인이지! 어떤가, 밖의 공기는? 제법 상쾌하지 않은가?"




영 그 삭막한 탑에서는 볼 수 없는 색이지 않느냐 물으며 새파란 잔디와 엉성하게 솟아오른 나무들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미나는 당시 어이가 잠시 나가있는 상태였다. 이제는 이런 조그마한 녀석한테도 무시를 당하나? 부터 시작해 그 단단하고도 호의로만 옹골지게 차오른 흑안에 사뭇 날카롭게 버려졌던 신경을 누그러뜨리는 것이다.



모르겠다는 아주 두루뭉술한 대답에도 환히 그것을 긍정의 의미로 읽어내고 좋아해주는 소년의 미소에 대고 대놓고 귀찮은 일에 휘말린 듯해 기분이 안 좋다고 말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쉽게도, 미나는 호의와 선의처럼 좋은 감정으로만 자신을 대해주는 따스한 사람에게는 어찌 대해야할지 몰랐기에.



그게 그둘의 만남이라면, 공식적으로 칠 수 있는 첫만남즈음이 되겠다. 저리 마르고 앙상해 어찌하누,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대했던 카쿠의 마음이 바스러진 것은 식당에서 우렁차게 비명을 내지르는 훈련생 한명을 만난 후였다.




"아아아악!! 아파! 아파아!!"




고막을 찌르는 비명소리에 돌아본 그곳엔 철로 된 식판이 우그러지도록 힘차게 시비건 아이의 얼굴을 짓뭉게는 미나가 있었다. 연상의 몸을 이용해 한껏 키가 작은 아이들을 짓밟고 무참하게 보복하는 그 장면에서 카쿠는 심드렁하게 맞을 짓을 했으니 맞는다, 라며 무시를 택했다.


그까짓 폭력성쯤이야 길러질 때부터 숱하게 접해온 그에게는 그리 흠이 아니었기에. 어쩌면 그러한 점들이 우연과 필연처럼 엮에 마침내 운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미나아~. 오늘은 뭐할건감? 또 훈련인가? 그럼 대련을 청해도 되겠남?"




애늙은이 같은 말투로 사근사근히 굴어오는 소년을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미나 또한 그런 호의와 친절이 익숙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카쿠의 들이미는 것마저는 막을 수 없었으니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는 초원의 아름다움과 엉성하게 심어진 나무들을 가리켜 숲이라 불렀기 때문이었을지도.



진짜 자유와 꽃밭에 대해서는 영 모르겠다는 듯 어리숙하게 구는 소년을 향해 미나는 호감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하게 되었다. 피와 시체, 그리고 알뜰하게 자신의 비극으로만 채워졌던 모든 순간들, 고향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은 꽃밭을 단 한번도 본적 없다 말하는 어린 소년 때문이었다.



형형색색 온갖 꽃들을 알려주고 노란색과 붉은색 다홍색과 푸른색 온갖 색들을 가리키는 형용사에 입을 벌린 채 정말 그런 낙원이 있느냐고 천진난만하게 물었던 탓에, 미나는 카쿠의 무지에 안타까움을 품었다.



꽃 한번 보지 못하고 끌려왔구나, 나의 의지와 달리 너는 너의 의지 없이 이곳을 너의 고향삼아버리고 꽃밭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자라나겠구나. 미약한 연민이 피어오르는 순간 그것이 연민으로만 끝마쳐지지 않았던 이유는 카쿠의 해맑은 물음 때문이었다.




"꽃의 나라라니, 그런 근사한 곳이 다 있나! 그럼 미나, 자네도 꽃을 좋아하는감?"




아. 그 끔찍한 곳을 떠올리게 하는 그곳을 낙원이라 이름부르고 기대감 섞인 표정으로 바라보는 소년의 눈이란. 미나는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꽃이 싫어.


그 단호한 거절에 카쿠는 잠시 놀란 듯 바라보았다가 이내 푸스스 미소를 그려냈다. 그럼 이곳이 좋을 터, 이곳은 단 한 송이도 꽃이라곤 볼 수 없지 않나. 만약 새순이 돋고 나무에 꽃이 피어오르면 가장 먼저 그 가지를 잘라내 불태우든 바다에 던져버리도록 하겠네.




언뜻 과격하기까지 한 카쿠의 친절에 미나는 미간을 좁히고 폣속에서부터 간질거리는 물음을 서슴없이 뱉어냈다. 그녀는 의문을 참아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래도록 이어진 학대 속에서 홀로 가졌던 의문과 분노가 너무나도 많았기에 더이상은 참기 싫은 마음이었다.




"너, 왜 나한테 잘해줘?"




돌직구로 들이박은 질문에 어린 소년은 이전보다 더 놀란 표정으로 휘둥그레 눈을 뜨고 뒷걸음질로 주춤 물러섰다. 말을 고르며 수줍게 볼을 붉히는 소년 또한 망설임이 없는 부류였으니 어찌 보자면 둘은 참 닮은 점이 많은 이들이기도 했다.




"몰랐을 줄은. 나, 자네가 좋네. 좋아서 그러해."




좋아하는 이에게 잘 대해주는 건 당연한 상식이지 않은감. 카쿠의 담백하고도 솔직한 고백에 도리어 말문이 막힌 것은 미나였다. 딱히 대답과 반응을 기대하지는 않은 듯 카쿠는 그 이후에도 어색하게 대하는 미나와 달리 언제나처럼 친근하게 자신을 가져다붙이곤 사근하게 굴곤 했다. 그런 그에게 확답을 내려주지 못하고 거절도 긍정도 못하게 되었을 무렵 그녀를 구해준 것은 다름아닌 장관의 부름이었다.





"미나, 상부에서 널 CP9의 요원으로 임명했다. 내일 오는 군함에 타고 구안하오를 떠나 사법의 탑으로 돌아가도록."




자신이 끔찍하게 여겼던 고향보다 눈이 아리도록 새하얀 백야의 섬이 더더욱 고향갔았기에, 미나는 '돌아가라'는 말에도 딱히 큰 감상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뒤에서는 역대 최연소라며 수근거리고 또 선망과 동경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도 역시 감흥이 없었다.



마땅히 자신이 누릴 것이 제 손에 떨어졌을 뿐인데 일희일비하기에는 그녀의 신경줄이 그리 얇지도 않았기에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언뜻 약간의 분노가 뒤섞인 루치의 시선이 오히려 그녀의 흥미를 자극했기에, 미나는 비죽이 입꼬리를 올려 루치의 순수한 분노를 비웃어주었다. 시기도, 질투도 아닌 그저 오롯한 분노인 것이 도리어 신기했다. 물론 그만큼이나 괴이할 정도로 그녀를 자랑스럽게 바라보는 카쿠의 흑안 또한 그녀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반응이었지만.




가기 전에 대답을 해야하나. 그 고백에 정답이 있었던가? 약간의 혼란을 머금고 적안과 흑안이 허공에 부딪혔을 때 카쿠는 둥글게 흑안을 접어 환히 웃어보일 뿐 그 안에는 어떤 의문도 서러움도 없었기에 미나는 어설프게 떠다니는 답들을 가라앉히기로 결정했다. 어떠한 질문과 어떠한 답들은 그저 묵혀두고 다물어두는 것이 더 좋았기에.




뭐, 정확하게 따지자면 미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자신을 꺼내주고 무작정 대하기 낯선 호의로만 자신을 대하는 카쿠가 아닌, 익숙한 적의와 경계로만 자신을 대하는 루치였다. 어린 것이 싸가지가 없었으니까. 만약 루치같은 성격이었다면, 자신이 변하기 전부터 저런 성격이었다면 조금 더 빨리 사랑했던 이를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여 루치를 보는 시선은 쥐톨만한 흥미와 약간의 부러움이었다.



"야."





물론 그런 감상은 구안하오를 떠나 그들이 더이상 미나의 시야에 닿지 않자 금방 희미하게 흩어져버릴 감상이었지만. 미나는 자신을 향해 욹으락붉으락 달아오른 얼굴로 차갑게 자신을 부르는 장관을 향해 눈썹을 쑥 밀어올렸다. 왜.



"너 임무하는 도중에 자꾸 다른 길로 새지 말라고 했지."

"음... 그랬나?"

"미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천연덕스럽게 장관의 분노에도 어깨를 한번 으쓱이는 것으로 끝을 내버린 미나의 반응에 다시 한번 뒷골을 붙잡고 저 새끼 임명한 과거의 자신을 후드려패고 싶다 한탄하는 장관이었다.


물론 입으로만 나불거리는 것에 그치겠지만. 아무렴 임무성공률은 최악을 향해 달려가고 있어도 마음에 드는 임무를 고르면 완벽한 달성률을 보여주곤 했던 묘한 인재이니 그런 사람을 제멋대로 내치기에는 역시 아쉬웠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가치를 잘 알고있다는 듯 미나의 태도 또한 강경하고도 태연스러웠다. 니가 날 안쓰면 어쩔건데, 지나칠 정도의 자신감과 자존감에 저 새끼를 사법의 탑에 들이는 게 아니었다 우렁차게 다시 한번 장관의 목소리가 창밖으로 흩어졌고 요원들은 그저 일상이구나 싶어 지나치며 오늘은 몇분 안에 장관이 고혈압으로 기절할지 조곤조곤히 내기를 나누었다.




"나가아ㅡ악!!"




오늘의 기록 6분 13초라는 신기록을 채우고 상쾌하게 장관실을 나선 미나의 걸음이 멈춘 것은 루치가 드디어 이곳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루치가 온다고, 그 싸가지없고 퉁명스럽지만 누구보다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고 응수하는 그 녀석이 온다고.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골라내지 못했던 답을 마침내 찾을수도 있겠다. 미나는 미약한 기대를 품고 오는 군함을 마중하러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만나면 부자연스러운 재회가 될까? 아니면 이제는 지울 수 없을만큼 짙어진 혈향에 덜컥 겁을 먹을까, 그도 아니라면 이번에는 자신의 변함없는 모습에 또 천연덕스럽게 웃어보이며 끝도없는 호감을 보일 것인가.


이번만큼은 미나 자신조차도 해결하지 못할 숙제였다.



혼자의 문제에는 혼자의 답을 내려도 괜찮았지만 혼자의 문제가 아닐 경우에는 혼자 답을 내릴 수 없었기에. 미나는 자신의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기대감이 자신조차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군함으로 걸어나갔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 홀로 고고한 인영이 나오고 미나는 그것이 루치임을 확인하고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크게 자신의 심장이 동요하지 않는 걸로 봐서는 종종 떠올렸던 구안하오의 풍경 속, 그는 없었던 듯했다. 자신이 기다리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의 심장이 기다리던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그러나 루치의 등뒤로 노오란 금발을 짧게 잘라 산들거리는 바람에 맡기는 저 소년은.





아, 저 소년은.그녀가 기다리던 그 누군가였다.
자신조차도 모르고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품어버렸던 그였다.



앳되고 어렸던 얼굴을 아직도 간직한 채 자신을 발견하곤 변함없는 미소를 지어보이는 그였다. 어린시절의 그를 똑닮은 미소를 지어내며 자신을 향해 힘차게 두 팔을 휘드르며 인사하는 순수한 그였다. 순진이라는 단어보다는 이제는 순수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만큼 깨끗한 감정이었다.




"...카쿠."




이제는 쉬이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되겠구나. 미나는 가슴속에서 복받쳐오는 감정을 느끼며 천천히 잊지 못할 이름을 속삭였다. 카쿠. 찬연한 미소를 머금고 거리낌없이 타인을 사랑해줄 유일한 사람. 그 속에 자신이 속한다면 오래되고 짓물려 이제는 흉터처럼 남아버린 상처가 조금은 아물지 않을까.


금이 가고 깨져 도무지 제정신이라고는 칭할 수 없는 스스로를 기워내고 맞춰주지 않을까. 산산히 깨진다면 기꺼이 그 조각들을 모아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주겠다고 말할 그 소년을, 이제 미나는 사내로 보기 시작한 제 마음을 알아차렸다.




"미나. 보고싶었네."





봄바람보다 더 온화하게 웃어보이며 제게 다가오는 그의 손에 들린 것이 약속한 것과 비슷함을 알아차렸을 때, 미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버리고 싶었다. 꽃이 싫다는 그 한마디에 구안하오의 기릴 것을 고르고 골라 꽃이 짓뭉게져 뽑힌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되돌아온 너를 어찌 미워할까. 소년으로 만나 사내로 자란 그 아이를 미워하는 법을 몰랐다. 누군가 일러주더라도 이제는 그다지 알고싶지 않았다.



자신의 흠과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보아주고 아프지 않게 살뜰히 쓰다듬는 녀석이니까. 자신 또한 그의 상처와 흠을 보게 되더라도 괜찮으리라. 미나는 그렇게 어렴풋 떠올랐던 감정에게 '호감'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다른 의미로 불릴지언정 결국 사랑의 형태임에는 변명의 여지없이 확고했다.




"으음? 잠입임무 나가는감?"




사법의 탑에서 보낸 시간은 길었다면 길었고 짧았다면 짧다 평하겠지만 그 기간 동안 보냈던 시간이 모조리 숨막히는 시간은 아니었다.


잠입임무를 나가고자 열심히 카페 알바생을 연기하는 그녀를 향해 경박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재브라. 미운 말만 골라 내뱉곤 성질을 건드리던 그였건만 이제는 누군가 그를 상처입힌다면 기꺼이 람각 한대 정도는 쏘아줄 정도로 그를 울타리에 들였다.


날카롭게 안경을 치켜올리며 자신이 분석한 것이라고 빼꼭히 글자와 팁이 소설 수준으로 적혀있는 노트를 건네주는 칼리파. 처음에는 그저 아는 척하는 재수없는 여자애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카쿠를 도와 자신을 탑에서 빼냈던 인물임을 알아차리곤 어느새 그녀마저도 수용하고 있었다. 삭막하고도 길었던 그 탑에서 자신을 꺼내 주었던 것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분명 같이 보내고 지냈던 시간이 찬란했음은 부정하지 못했다.




"챠파파~, 미나가 카페 알바생을 연기한다! 드럽게 못한다! 카페 알바생이 사람 도륙 낼 것 같다고 한다! 챠파파파~."




재브라와 함께 경박스러운 웃음을 터뜨리며 폴짝폴짝 온 사방팔방에 흥미 가득한 소문을 실어나르는 후쿠로도, 처음에는 그저 시끄러운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떠났을 때에 그토록 서럽게 울었다는 것을 듣고 다정한 이임을 알았다. 재회한 그날 카쿠만큼이나 순진하게 웃어보이며 기다렸다고 그리워했다 서슴없이 다가오는 소년 또한 언제부터 자신의 곁에 서는 것이 익숙해졌는지.



놀리지말라며 후쿠로만큼이나 시끄럽게 석장을 흔들어재끼는 쿠마도리 또한 요란스러운 행동과 달리 꼼꼼하게 챙겨주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안 것도 그렇게 최근은 아니었다. 언제부터 이 사람들 사이에 녹아들었던 것일까? 당최 알 수 없는 문제였다.




묵묵히 자신에게 닿는 시선을 똑바로 마주해주며 무뚝뚝하게 응원의 말을 전하는 블루노는 언제 친구로 받아들였더라? 말수도 없고 행동거지조차도 얌전해 좀처럼 눈이 가지 않았는데 이제는 무슨 문제가 생기면 블루노부터 찾는다. 무슨 일이건 다 말끔히 해결해 줄 것 같다는 믿음에. 쉬이 믿지 못했던 습관은 언제 상처의 딱지가 떼어졌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나아버렸다.




온기와 귓가에 부드러이 퍼지는 기분 좋은 목소리들을 듣고 있노라면 잊은 줄 알았던 목소리가 소근거리며 그녀의 주변을 맴돌곤 했다. 사랑했고 처음으로 온 마음 가득 품어 그리워했던 유모, 그녀 어미의 목소리.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만큼은 사랑하겠노라 속삭였던 그 목소리를 떠올리면 미나는 여덟살 꼬마아이가 되어 유모 앞에 서곤 했다. 그 목소리가 들리면 세상 만사 두려울 것이 없었던 그날의 때로 돌아가곤 했다.



아. 이제는 자신이 먼저 버리고 원망해 닳아빠진 그리움으로 떠올리곤 하면.유모는 언제나처럼 환상같이 바스러질 희미한 목소리로 유언을 속삭이곤 하는 것이다.




[사람은 결국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야하는 법이란다. 내 착한 미나, 상냥한 미나야. 사람을 미워하지마렴.]




끝말은 지키지 못했으나 첫 문장만큼은 잊을 수 없는 유모의 유언이 떠오른다. 미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자연스럽게 그녀의 주변에 자리잡고 앉아 다시 한번 봐줄테니 연기를 해보라며 웃어보이는 그들을 향해 차례로 시선을 옮긴다.



벽에 기대어 선 채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루치, 석장을 흔들며 카페 알바생이라면 역시 커피를 잘 타야하는 법이 아니겠나며 머리카락으로 커피 믹스들을 가져오는 쿠마도리, 자신이었다면 얼굴로 누구든 꼬실 수 있다며 허세를 부리는 재브라, 비웃음을 보이며 아무렴 그렇겠다 냉소적으로 답하는 칼리파, 가장 먼저 다른 길로 샐 것 같다며 내기를 제안하는 후쿠로와....




"카페 알바생이라니, 잘 어울리는구만! 커피 냄새는 굉장히 고소하고도 부드러워서 무척이나 좋네. 특히 마시지도 않았는데 냄새가 좋아서 방향제를 대신해 쓰기도 한다지? 미나, 그대와 잘 어울리네."




그대가 꺼리는 혈향도 지워질테고. 카쿠의 덧붙인 말에 미나는 미간을 좁히고 입꼬리를 올려보였다. 그렇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수월하게 답한 너머에 사실은 혈향을 그리 꺼리지는 않는다는 진실을 삼켜낸다. 혈향의 비릿한 냄새가 싫은 게 아니었다. 붉디 붉어 눈이 아픈 것이 싫었던 게 아니었다.





붉은 피를 묻히고 비릿한 혈향을 흩어 나오면 걱정으로 뒤덮인 그의 얼굴을 보기가 꺼려졌을 뿐이었다. 우리 어떤 사이인감? 그리 묻지 않았던 것은 언제나처럼 확답하지 못하는 미나의 성격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모든 것에 확실하게 결정을 내리는 그녀가 유독 쉬이 결정내리지 못하는 것이 그와의 관계라는 것을 알면 카쿠는 뛸듯이 기뻐하며 자신에게 의미가 생겼는지 묻고 대답도 듣지 않고 환호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반응을 알았기에.



미나는 그 녀석이 역시 좋았다. 자신이 아주 미약한 감정에 호들갑을 떨며 자신이 다 느끼는 양 소란스럽게 그녀를 대신해 반응해주는 그가 은근히 기뻤다.




"오다, 주웠어."




그런 그녀가 퉁명스럽게 내민 첫번째 이름모를 들꽃에 온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웃는 미소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토록 기쁠 수 있는 감정이 존재함을 알았다. 기뻐 흘리는 눈물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슬픔으로만 가득찬 눈물이 아닌 행복으로만 가득찬 눈물은 그녀에게 있어선 유리구슬보다 더 고운 보석이었다.




"참으로 예쁘네!! 자네의 하얀 피부를 닮아 무척이나 청초하구만!"





세상 그 어떤 쓰레기를 가져다줘도 선물이라면 냉큼 받아서 좋은 점부터 골라 볼 사람이었다. 내민 손이 무안하지 않게 받아들이고 칭찬을 쏟아부을 사내였다.


그렇기에 미나는 이질적으로 찢겨지듯 지어보였던 미소 대신, 그를 닮아 폣속에서부터 간질거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도 모르게 촘촘하고도 고운 미소를 지어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하하하!! 그게 뭐야! 그냥 뭐든 가져다붙이는거잖아!"

"들켜버렸는감?"




언젠가 그녀가 누구보다 사랑했던 그 여인의 웃음과 닮은 한껏 곱디 고운 미소를. 그리하여 마침내 사내의 얼굴에도 비슷한 미소가 지어졌을 때, 사내는 그런 그녀의 미소에 다시 한번 반했노라 부끄럼도 없이 고백했고 언제나처럼 솔직히 다가오는 그 고백에 미나는 여인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온갖 피를 묻히고 사람을 죽이는 것에 서슴없는 그가 자신의 앞에서 유독 요령없이 구는 순박한 사내가 되었기에 미나 또한 수십을 도륙내도 멀쩡히 잠들 수 있는 사람이 아닌 다정한 친애에 담담히 응답할 수 있는 여인이 되기로 했다. 한순간 참아왔던 웃음이 사그라들고 마침내 겨우 숨이 골라졌을 때 미나는 자신의 문제에 대한 답을 정답을 적어내릴 수 있었다.




"그래, 카쿠. 나 좋아해?"

"변함없이. 영원히 좋아할 것이네. 세상에 그대만큼 빛나는 것은 없거늘 당여한 말을."

"아하하!!"




여인은 사내의 손을 잡고 마침내 그들이 연인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훨씬 전부터 구애해왔던 사내의 감정이 결코 단순한 호감이 아님을 알고있는 것은 당연했기에.


대체 언제부터 '자네'가 아닌 '그대'가 되었는지.


가장 귀하디 귀한 보석을 다루는 것처럼, 자신의 생의 이유인 요원의 삶보다 자신의 의사를 먼저 높게 쳐주는 이리 귀애해주는 이는 얼마 없다는 것을 알아서. 미나는 여인으로 웃었다. 신이라 불리우며 어릿광대처럼 고집만 부리는 천룡인들보다 더 숭고한 신처럼 대접받는 것은 썩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특히나 어리둥절한 상태로 여인이 자신의 손을 잡아줄 지 몰랐다는 듯 굴었던 사내에게는 더더욱.


마침내 제 품에 들어와 그녀의 곁에 자신을 놓겠다는 선언에 이번에도 하늘을 날아갈 듯이 기뻐하며 순박한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그 곱디 고운 미소가 서로를 소유하게 될지라도, 집착하게 될지라도 그 속에 묻어나오는 순수함을 결코 수월하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니. 이미 그 아래 순백의 색을 닮은 옅은 금빛의 감정을 두었거늘 그 위로 무엇이 쏟아지던 그건 중요하지 않으리라.



그녀는 그에게 잡혀살 사람이 아니었고, 그는 그녀를 잡아삼킬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런 상상을 하고 그리 바랄지언정 결국 그녀가 나아갈 길마저도 사랑해줄 이였다. 그렇기에 미나는 카쿠를, 자신의 사랑으로 정했다. 유모의 자리를 치워주지는 못하겠지만 적어고 그만큼 사랑하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후회를 남기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것임을 약속하는 단 하나의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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