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MOMO
 
*커미션 글입니다




시작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드넓게 펼쳐진 푸르름의 초원이었다.



금이 가는 것처럼 쩌적거리던 소리가 부서지고 한순간의 장면처럼, 영화 속의 사진처럼 스쳐지나가며 애달프게 자신의 어깨를 꼬옥 잡고선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 공허하게 내뱉은 약속이 떠오른다. 사진과 같았던 찰나가 바스러지며 다시 떠오르는 풍경은 새하얀 해안가 너머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새로운 친구들의 얼굴,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태연하게 제 곁을 지키고 서있을 인물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이어 모습을 그리는 것은 바닷물을 잔뜩 먹어 엉망이 된 시야 사이로 언뜻 비추어졌던 그 걱정 가득했던 흑안이었다. 그녀를 향해 손을 뻗고 걱정말라는 듯 입을 벙긋 열어 목소리를 내는 앳된 얼굴의 소년. 내뱉어지는 문장은 완성되지 못하고 흐트러지고.




"따르르ㅡ"




눈이 떠지고 꿈이 부서진다. 부스스하게 자명종을 부술듯 내리쳤던 손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신경질적인 표정을 드러낸다. 창백하다 못해서 뱀파이어라고 착각할 정도로 희게 질린 피부가 투명하게 햇빛을 반사시키고 흑단을 닮은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이 여자의 손길에 따라 부드럽게 넘겨지며 적안을 드러낸다.


붉디 붉어 무저갱을 닮은 눈빛이 희미하게 꿈결을 헤맨다. 멍한 시선으로 한참이나 허공을 응시하던 것이 드디어 움직였을 때에는 경쾌한 참새소리가 창문을 흘러넘고,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미나, 아침 먹고 갈거지?"




다정한 목소리가 방문 밖에서 울리고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여자가 벌떡 일어나며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상대쪽은 이쪽을 못 보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뒤늦게 입을 열어 긍정의 답을 내뱉는다. 응, 먹고 갈 거야. 그리 말하는 여자의 목소리에 그마저 사랑스럽다는 듯 기분좋은 웃음소리를 흘린 방문밖의 유모는 그럼 준비하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1층으로 내려가버렸고 덕분에 약간의 시간을 벌게 된 그녀는 하품을 하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고 능숙하게 옷장속의 교복을 꺼내 일상처럼 갈아입었다. 능숙하게 느껴졌어야 할 일상이 유독 어색하고도 낯설게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오늘의 아침식사를 입안에 넣은 후 도시락까지 깜빡하지 않고 낚아채듯이 들어올린 후 학교로 떠나는 걸음에, 유모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나긋한 어조로 그녀의 뒷모습을 배웅해주었을 뿐이었다. 달리는 듯 걷는 듯 애매한 속도로 학교로 질주하고 있던 그녀의 진로를 방해한 것은 어느새 그녀의 곁에서 비슷한 속도로 질주하는 한 소년이었다.



"윽."




소리내어 내뱉은 신음소리에 잔뜩 찡그린 얼굴까지 질렸다는 표정이 여실하게 드러남에도 소꿉친구로 쌓아온 뻔뻔스러움을 드러내며 꿈속의 소년, 카쿠는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경쾌한 아침인사를 건넸다.



"이야아, 미나! 오늘도 좋은 아침일세! 같이 가자고 한 127번쯤 말한 것 같은데 또 잊어먹은 것 같아서 말일세! 등굣길이라면 이쪽으로 오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였구만!"

"너때문에 일부러 등굣길 코스도 바꾼건데."

"응? 그럴수가! 원래 코스보다 더 길어졌는데, 설마 나와 같이 가는 시간이 더 길어지는 것을 염두해둔겐가?"

"아니, 그게 아니라... 하. 말을 말자..."

"에이, 그것보다 들었는가? 드디어 신세계제가 슬슬 코앞에 다가왔는데 말이네. 작년에 참석하지 못해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아는감. 칼리파도 은근히 서운함을 팍팍 드러냈다고."

"은근히라는 단어와 팍팍이라는 형용사가 같이 쓰이기에는 모순적이지 않나...?"

"아무튼 그래서 이번 신세계제,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아주 기대만반이던데 말이네."

"안 듣고 있잖아."




뾰족하게 대꾸하는 미나의 발언에도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히죽거린 카쿠의 대화가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는 사이 점점 거리는 좁혀졌다. 저멀리 보였던 학교의 시계가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카쿠는 함께 등교하고 싶지 않다! 라고 확고하게 주장하는 그녀의 의사를 존중하듯 아쉬운 표정으로 손살같이 학교 내부로 사라졌고, 이어 흩어진 기척에 그제서야 미나는 한숨을 내쉬며 속도를 줄일 수 있었다.



마침내 도착한 신세계 중학교의 정문 앞에서, 약간 달아오른 호흡을 가라앉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침내 1학년 1반이라고 쓰여있는 팻말을 찡그린 미간으로 바라보던 미나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젖힌 순간.




"....!!"

"쾅ㅡ!"




무언가 날아오는 듯한 기척.


늦지 않게 빠른 속도로 거리를 벌린 그녀가 발견한 것은 벽과 문이 동시에 부서진 교실의 모습과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사방에 널브러진 학생들, 그리고 그런 소란스러움의 한 가운데에서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서있는 소년 한명이었다. 그러니까, 이름이 몽키 D 루피라고 했었나.


능숙하게 신입생 환영회 때의 기억을 훑어보며 얼굴의 주인을 떠올린 미나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진다. 선호하는 유형의 사람은 결단코 아니었다.




"에? 늬들 왜 퍼자고 있냐? 곧 수업 시작할텐데."




멋대로 치고 들어와놓고선 널부러진 학생들에게 내뱉는 첫마디가 사과도 아니다. 그럼 그렇지, 기가차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찾아 앉은 미나에게 하늘을 닮은 푸른색의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비비가 생긋 웃는 낯으로 그녀의 등교를 맞이해주었다. 뻥 뚫린 벽의 구멍과 그 사이로 들이닥치는 상쾌한 바람은 이제 지긋한 일상으로 느껴질만큼 드문 일도 아니었다.




"미나, 좋은 아침."

"응. 좋은 아침."




떨떠름한 표정을 금방 원래의 무표정으로 되돌린 미나가 편안한 얼굴로 필요없는 교과서를 가방에서 책상에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지는 전학생의 인사와 시원스러운 막장전개에도 심드렁한 얼굴을 고수하던 그녀의 눈빛이 반짝인 것은 동아리를 구경하러 가자는 말을 하며 그녀를 흘끗거리는 쿠잔 선생님의 눈빛 때문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정해야한다, 응? 제발, 나 징계먹어. 그리 애원하는 목소리가 투명도 50%로 들린 듯한 것은 환청이겠지. 늘 그렇듯 쿠잔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은 그녀가 마지못해 일어선 것은 소심해보이는 코비가 꽤 간절하게 내뱉은 부탁과 루피의 당찬 합류 선언 때문이었다.




"근데 왜 굳이 내가 너랑 같이 가야하지?"

"미나 씨가 이중에서 가장 정상으로 보여서요."




생각보다 눈이 날카롭다. 전학생! 정상처럼 보인다는 말이 썩 불쾌하지는 않은 듯, 아니 오히려 그것이 흡족스럽다는 듯 제법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총총 경쾌해진 걸음은 개판에 가까운 동아리실의 풍경에 조금씩 싸늘해지고 있었다.



여기 정상이 없다더니 과연, 코비가 두려움에 떨며 제법 사나워보이는 인상인 미나에게 도움을 요청할 법했다. 오히려 그 용기가 소심해보일 지경으로 눈앞에 펼쳐져있는 동아리실의 풍경들은 하나같이 상식선에서 꽤 어긋나있는 것들이었으니.




은근 제대로 나가서 장사를 해도 될 정도의 퀄리티는 입다물고 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20개 이상의 동아리 회장을 겸하고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상식선에서 제대로 벗어났다. 동아리 회장직만 도는데도 등교부터 하교시간까지 살뜰하게 써먹겠네. 짜게 식어버린 표정으로 25개의 동아리 회장을 바라본 미나는 고개를 돌려 이 미쳐버린 시스템에 대해서 항의하기를 포기했다.



그나마 정상적인 동아리를 고르자면ㅡ. 이라는 말로 서두를 꺼내며 자리를 옮긴 쿠잔 선생님이 보여준 것은, 광활하게 펼쳐진 운동장과 꽤 정교하고도 단단하게 구성되어있는 무도장이었다. 물론 역시 이쪽도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듯 목검이 아닌 진검과 진짜 쇠로 된 무기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다는 것에 입이 떡 벌어질만했지만 말이다.




그런 경악이 수그러든 것은 이번에야말로 봐주지 않을테니 덤벼들라며 경쾌한 웃음소리 덕분이었다. 익숙하다 못해 아주 질릴 정도로 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미나의 표정이 온화함을 스치며 고개를 돌렸고 그곳엔 예상처럼 그녀와 제법 닮은 눈빛으로 비릿한 미소를 짓고 서있는 아침등교의 파트너, 카쿠였다.



비록 억지로 주장하는 파트너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변칙적으로 코스를 짜고 귀신같이 쫓아오는 그를 향해 투덜거린 대화가 제법 나쁘지만은 않았기에, 미나는 기꺼이 카쿠를 아침등교의 파트너, 라고 불러주곤 했다.



"아이아이! 덤벼! 캡틴이 보고 있으니까 나는 지지 않아!"

"하하, 봐주지 않을테니 각오하게나ㅡ. 응?"




의기양양하게 두자루의 검을 꼭 쥐고 고개를 치켜든 카쿠가 갸웃거린 것은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시선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린 미나를 발견한 카쿠의 눈빛에 일순간 반가움이 들이치고 이내 잠잠하게 가라앉는다.



일상처럼 받아들여온 친애를 머금으며 곱게 눈동자를 휘어접은 그가 이번만큼은 대충대충 넘어갈 수 없겠다며 잡고 있던 검자루에 힘을 주고 비처럼 쏟아지는 참격을 날린 것도, 아마 미나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에 비명을 지르며 자기를 죽일셈이냐고 울부짖는 베포와 캡틴을 부르짖는 샤치, 펭귄의 목소리 또한 듣지 못했을 것이다. 들었다고 할지라도 깔끔하게 무시해버렸겠지만 말이다. 으레 그렇듯 미나는 자신이 선안에 들이지 않은 인물에게는 지독한 무관심으로 일관하곤 했다.




그들은 그저 그런 관계라고 칭할 수 있었다. 각자의 위치에서 움직이다가 이따금, 정말이지 우연에 가까울 정도로 자주 마주하면 생긋 웃으며 먼저 손을 팔랑팔랑 흔드는 카쿠와 그런 그의 인사에 잠시 건조하던 시선 속에서 무언가의 감정을 끌어올리다가 이내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관계. 카쿠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비로소 입가에 반가운 미소를 띄우곤 했던 관계.



혹은 이곳이 자신의 자리라는 양 1학년 1반의 학생들 사이에 우뚝 선 채로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미나를 바라보며 부스스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관계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물론 완벽한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겠지만. 적어도 그들 스스로는 제법 삭막하지만 역시 친한 친구 사이, 라는 얼렁뚱땅한 말로 포장해서 내밀 것이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만큼 납득되지 않는 정의였지만 말이다.



세상의 그 어떤 '어색한 관계'가 서로를 보면 미미하게 입가에 미소를 짓는 사이인건데? 표정변화가 얼마 없는 미나는 뭐 웃긴 게 떠올랐다고 해서, 이모저모 잘 깎인 듯 각도가 예술적으로 각목과 심히 닮아있는 사각코가 웃겨서라는 아주 그럴듯한 이유를 가져다붙인다고 해도 역시 납득이 어려운 변명이었다. 미나의 미미한 무표정이 미소로 스치는 것까지는 봐줘도, 늘상 돌아있는 눈을 유지하는 카쿠가 그녀를 볼 때마다 미미하게 온화함을 띄우고 수줍게 몸을 비트는 것까지는 못 봐줬다.



그의 동료들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오묘하고도 풋풋한 관계에 오글거리며 질색을 하는 사람들이었으니 더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본인들이 주장하는 관계를 '우정'으로 포장하는 것도, 그리고 애타는 얼굴로 미나에 대한 말을 늘어놓으며 학생회의의 물을 흐리는 것도 도무지 봐줄만한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1학년의 복지가 썩 괜찮아진 수준으로 발전한 것도 학생회의 눈물겨운 노력과 카쿠의 강력하고도 편파적인 주장 때문임도, 봐줄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당사자들의 극구부인이 끝날 기미가 보인 것은 드디어 고대하고 기대하던 신세계제가 코앞에 다가왔을 때였다. 반 종합우승을 노리자며 왁자지껄하게 소리를 지르고 메뉴가 야키소바로 결정되는 순간까지도 무심한 표정을 고수하던 그녀의 눈이 반짝거린 것은 식재료를 모조리 강탈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였다.



인자하게 맞이해주고는 식재료를 부탁하는 말에 돌변해 다짜고짜 줄 수 없다고 외치는 것에 미간을 좁히며 소인배 영감탱이라고 투덜거린 것은 그저 그의 쪼잔함에 질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먹질 한방에 머리가 찌그러졌고, 이에 가여워진 사연을 설명해주었을 때에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외면해버리는 미나였다.




"내게서 송곳과 직업을 빼앗은 것은 신세계 중학교의 교사임에 틀림없다!"

"그거 확실해?"



응. 확실해. 차마 확답을 내리지 못하고 곧 돌아갈 기세로 돌려버린 고개에 나미가 걱정할 지경이었다. 학생회와 연관이 있고 친분도 넘치도록 있어서 알고있다고 말할수도 없고 이거.



곤란한 표정으로 찡그린 미나의 표정을 뭔가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것으로 착각한 듯 나미의 입이 꾹 다물리며 더이상 묻지 않았고 덕분에 식은땀을 흘리기 직전에 멈춘 미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땅바닥에 고정시키며 불안한 표정으로 말문이 막혀 빡친 칭자오를 흘끔거렸다. 가프 씨인 건 눈치채지 못했겠지? 아직 눈치채지 못했을거야. 음, 그렇고말고.




"시끄럽구나! 아무튼 나는 그 교사가 있는 신세계 중학교와 나를 두고 가버린 사이만한 중학생이 질색이다아!"



그런 것 같긴 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 루피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나선다. 이어 얼음을 깨고 가져가겠다는 발언에 칭자오가 불같이 화를 토해내고 뒤돌아본 루피가 내뱉은 문장이 뒤흔든 것은 비단 칭자오 뿐만이 아니었다.



"거기 쭉 가만히 있어봤자 아무것도 안 변하잖아."




마치 자신에게도 하는 듯한 말 같기도 하여 잠시 입술을 벙긋 벌렸던 미나는 그대로 쏟아내지 못한 물음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그럼 역시 더 다가서는 게 좋을까? 라는 질문이었다만 분명 루피라면 네 마음가는대로 하라는 명쾌하고도 허술한 정답을 내뱉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지만 미적지근한 관계에서 조금이나마 더 나아가는 것이 두렵다는 발언에는 어떻게 반응할지, 이번에는 뛰어나고도 훌륭한 추리력을 갖춘 미나의 두뇌로도 예상하기 쉽지 않았다. 루피의 말에 집으로 돌아온 그날도, 신세계제가 시작하는 화려한 날의 아침에도 고민은 끊기지 않았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면 이제 돌이킬 수 없지 않을까? 가까이 다가갈수록 원래의 사이로 돌아가는 것조차도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있는 그녀였기에, 미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손가락 끝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불안할 때마다, 초조해진 기분이 들 때마다 했던 행동의 시작이 멈칫거렸던 것은 그때마다 슬그머니 그녀의 손을 잡고는 입가로부터 떼어내주었던 카쿠 덕분이었을 것이다.




"미나! 쉬는시간이니까 이제 우리도 축제를 즐기러 가자!"




줄곧 입고있던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나미의 손에 이끌려 온갖 음식들을 맛보고 있을 무렵 그들의 걸음이 멈춘 곳은 각 부문상의 투표소였다. 투표를 기다리며 앉아있는 진행위원들 속 익숙한 기운을 느낀 미나의 눈에 일순간 반가움이 스친다. 기괴하게 생겼다고 투덜거리는 나미의 음성 너머로 보인 것은 해골가면을 쓴 소년이었다. 어떻게 모를수가 있을까, 그가 바로 그녀의 고민이었기에 미나는 적안을 가늘게 뜨며, 나미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윽.



투표를 독려하는 듯 내밀어준 종이. 무심결에 받아든 종이는 좋은 것을 쓰지는 않는 듯 거칠었다. 학생회의 문화제 실행위원이라는 설명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미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스칠 듯 제 손에 꼬옥 쥐어주는 종이와 굳은살이 박힌 따듯한 손의 주인을 흘끔, 바라보았다.



어디에 투표할 것인지 먼저 묻지도 않으면서, 가면의 주인은 입을 다문 채 그저 능숙하게 제 교복 마이에 있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에 묻은 타코야키 소스와 메밀소바의 찌꺼기들을 닦아내 줄 뿐이었다.




"...하. 이 짓거리를 대체 언제까지 봐야하는건지."




약간의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것을 질렸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소 가면의 시선은, 역시 둘만의 세계에 갇힌 미나와 카쿠에게는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학교에서 연애질은 교칙위반인지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는 소가면의 주인, 학생회장 루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고 덕분에 그런 그의 반응으로 정신을 차린 미나였다. 얌전히 자리에 앉아 주머니를 뒤적거린 그녀가 펜을 가지고 오지 않았음을 알아차리고 망설임없이 제 손끝을 물어뜯으려던 찰나 다시금 단단한 손이 불쑥 들어와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들어가려던 연한 손끝을 붙잡았다.




"응?"

"펜으로 쓰게나, 피 말고."




다른 아이들이 놀라고, 또 아프지않나. 그 말과 함께 붙잡은 손에 검은펜 하나를 쥐여주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뒷모습에서 미련을 읽어냈다면 과대해석이라고 불리울지, 미나는 잠시 고민에 잠겨야했다. 그러나 동시에 켜둔 견문색 사이로 그의 불안함과 두려움 또한 느껴졌기에 처음에는 의아함을, 다음에는 동질감과 이해를 깨닫고 고개를 숙여 무표정하게 투표용지에 학년과 반을 적어내려갔다.




책에서 보았던 것과, 유모에게 들었던 사랑 이야기와 겪고 있는 과정은 차원이 달랐다. 쓰여있는 내용은 설렘과 기대로만 가득했던 낭만적인 사랑이었으나 그녀가 겪고 있는 것은 불안함 뿐이었으니까. 이게 사랑인지조차도 그녀에게는 의문이었다.




단지 자신이 그에게 갖고 있는 수많은 감정 중 하나를 사랑이라고 착각해버린 것은 아닐까? 싶은 불안감. 고백하고 그것을 받아주면서 진전될 관계에 대한 두려움. 사랑한다고 고백하여 만일 잘못된다면? 잘못되었을 경우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지금의 관계마저도 귀해질까봐 미나의 눈은 드물게도 겁에 질려있는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다가가기를 멈추고 싶냐, 혹은 싫으냐는 질문에는 입을 꾸욱 다물게 될만큼 그녀 자신도 카쿠에게 갖고 있는 감정은 감히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들이었다. 이것들이 전부 버겁다, 무겁다고 느껴질만큼. 애매한 선에 질색이 되어 결국 먼저 포기해버릴까 고민이 들만큼 무겁고도, 벅차오르는 감정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확고한 감정들은 아직도 느껴졌다.



이를테면 동경이라던가, 동경이라던가. 생각해보니 정말 동경밖에 없잖아. 조금 부루퉁해진 마음에 입술을 슬쩍 내민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동경이라는 감정을 품는 것에 불만은 없었다.



누군가 그 이유를 묻는다면 당당하게 답해줄 수 있었다. 그야, 바닷물을 먹어 흐릿해진 시야의 끝에서 미나는 꿈의 끝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니까. 카쿠의 곁이라면, 자신에게 지극하고 또 늙은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몹시도 천천히 그는 그녀의 삶에 스며들어와주었으니까. 다만 그걸 받아들이기에 미나 자신이 아직 지독하게 낯선 것이다.



"하아..."




결국 자신의 문제였다. 늘 그렇듯, 또다시 자신의 문제. 복잡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후야제에서 슬그머니 자리를 뺀 그녀가 카쿠를 마주한 후 표정이 굳은 것 또한ㅡ, 설명할 수 없는 예의 '자신의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황급히 고개를 숙인 미나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카쿠는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않고 걸음을 멈추어주었다. 저 멀리 아직 축제는 끝나지 않았음을 드러내듯 음악소리는 어슴푸레하게 들려왔고 풀벌레들은 한참 떨어진 거리에 비로소 재잘거리며 자신들만의 노래를 경쾌하게 울었다.



주변에는 학생들이 바쁘게 돌아다녔고, 학생회의 인원들 역시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각자의 할일에 매진했다. 그런 소란스러움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유독 이 공간만큼은 조용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던 건 아마 그 모든 소리들을 압도하며 잡아먹을 듯 두근거리는 심장 고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나."

"...응."

"나는 재촉할 생각이 전혀 없었네."




목적어를 쏙 빼먹은 대화였으나 그걸 못 알아들을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아마 그 빈 자리에는 여러가지 단어들이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애매하게 그어진 선을 확실하게 그을 때까지 기다려주겠다는 뜻이겠지. 아마 카쿠는 미나가 평생동안 연인인지 친구인지 모를 관계 위에서 널을 뛴다고 결정하더라도 재촉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예상은, 어쩐지 미나를 토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나만 혼자 너무 애가 타는 것 아닌가? 평생 이런 관계성이어도 정녕 카쿠는 상관없는 것인지. 자신만 홀로 이 관계에 아등바등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에 입술이 비죽 튀어나올 무렵 카쿠가 얼굴을 불쑥 가까이 가져다대며 생긋 입꼬리를 올렸다.



"미나?"

"듣고있어."




부루퉁한 반응이 재미있었던 듯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풋풋한 웃음이었다. 여느날 훈련을 받는다는 명목으로 운동장을 힘차게 달렸을 때에도, 높다란 하늘에 멍하니 드러누워 가을 하늘은 정말 높게 보이냐는 실없는 질문을 내뱉었을 때에도 똑같이 심장을 간지럽히는 것처럼 가볍게 터져나왔던 웃음이었다. 호흡이 가파르게 폐를 간지럽힌다.



내뱉은 숨이 줄곧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달아오르고 잘 움직이지 않았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에도 그는 그저 전부 다 기다려주겠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그녀의 곁에 서있곤 했었다. 종내에는 호흡이 안정되고도 그의 곁에 좋아 모른 척 점점 곁에 있었던 시간을 늘려갔듯이. 미나는 공연히 올라온 심술로 카쿠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순수한 동경이 애증으로, 그 다음에는 질투로 모습을 뒤바꾸었던 것은. 그리고 마침내 정착한 사랑이라는 감정이 된 것은.


그 부분에서 미나는 다시금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ㅡ, 단언코 1등을 놓치지 않고 원한다면 언제든 거머쥘 수 있었던 수석의 자리를 꿰어찰만큼 영리한 두뇌로 생각해보아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논리였다.



처음에는 그저 루치의 뒷꽁무니를 쫓아다니는 한심한 녀석, 다음에는 타고난 재능을 이기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그만큼 자신의 재능에 대해서 깨닫고 써먹는 똑똑한 녀석이었는데. 단지 그 의미에서 조금 더 진전된 것은 늘상 까칠하게 굴며 이를 드러내는 미나에게 지치지도 않고 꾸준히 제 곁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넌 변하지 않을거지? 불순한 의미가 가득 담겨있는 질문에도 그저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는 사실 하나로 말갛게 웃는 미소를 어떻게 잊을수가 있겠는가? 미나는 없던 양심을 끌어당겨서라도 카쿠의 미소에서 추한 욕망을 읽어내지 못했다.



다음에는 싫다고 표현하는데도 다가왔던 그를 향해 싫고 미운 감정이 들었고, 신경질을 잔뜩 부리고 온갖 히스테리를 다 부린 날에도 태연하게 언제나처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앉아있는 카쿠를 향해 세번째로 질투를 느꼈다. 그의 인생은 순탄하게 살아온 것 같아서, 어떤 난리를 피워도 그의 감정만큼은 평온할 것 같아서 제 복잡한 심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지어낸 감정이었다. 결국 마지막에는 그가 내미는 온화함이 기꺼워서 결국 자신의 곁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던가.




그가 자신의 곁을 허락해준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회상해보면 곁을 허락해준 것은 미나이기도 했다. 물론 꾸준히 하악질을 하는 미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카쿠와 그런 그에게만큼은 은근슬쩍 경계를 풀곤 했던 둘을 바라보며 기가차다는 표정을 지었던 교관도 추억의 한 구석쯤은 자리한 것 같았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기에 기억 저편으로 능숙히 밀어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저건 우정인지 풋풋한 사랑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며 입술을 나불거렸던 재브라와 루치도 빼먹지 않고 기억 저편의 쓰레기통 비스무리한 공간에 집어던져놓았다.



"으응~? 미나, 또 손을 물어뜯으려고 하지 않나, 피가 나겠구만. 그러지말게, 아프지않나."

"...아까도 했던 말이야. 그리고 내 몸이니까 내가 알아서 할건데?"

"물론 미나는 미나의 것이지, 맞네. 그래도 옆에서 지켜보다 걱정하는 소년의 마음도 알아주었으면 할 뿐이지. 언제쯤 알아차려줄까~, 하고 두근거리며 기다리는 소년도 가끔씩은 한번 돌아봐주게나, 응?"




플러팅도 하필이면 어디서 배워온 듯 수준급이라, 미나는 자신도 모르게 달아오른 뺨을 급하게 고개를 숙여 가로등과 하늘을 천장삼아 주르륵 내걸린 깃발들의 그늘 사이로 숨겼다. 물론 눈치빠른 제 소꿉친구는 진작에 알아차린 듯 어느 여름날의 밤바람처럼 키득거렸지만 말이다.



"생각해보고."




심란한 와중에도 달아오른 속을 들키지 않으려 되려 더더욱 부루퉁하게 답하는 문장이었다. 이게 아닌데, 난처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무는 것까지 슬그머니 막아주는 카쿠의 손길에 결국 엉망이 된 얼굴을 들어올린 미나였고, 그런 그녀의 표정마저 사랑스럽다는 듯 한껏 다정함을 눌러담은 눈빛이 마침내 그녀의 조바심을 읽어낸 듯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주변은 폭죽놀이를 준비하는지 소박하게 타닥거리며 불꽃이 타들어가는 소리를 자아내고 있다. 어느새 경쾌했던 음악소리는 누군가의 낭만이 담긴 기타곡으로 바뀌었고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가 마이크를 붙잡아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을 때 카쿠의 흑안이 둥굴게 말리며 마침 노래선정이 좋고 타이밍도 완벽하다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래,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마치 이때가 아니면 안된다고 정해놓기라도 한 듯 아주 잘 짜여진 타이밍이었으니. 우물쭈물거리는 미나와 달리 카쿠는 시원스럽게 입을 벌렸고 이어 내뱉어지는 문장은, 아아, 미나 스스로조차도 겁에 질려 하지 못했던 문장이었다.




"우리 관계가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게 마음에 들는게야, 미나?"




카쿠의 말에는 꼬박꼬박 답하던 미나조차도 쉬이 내뱉지 못하는 대답이었다. 고르고 골라진 단어들 사이에서도 유독 결정이 어려웠던 것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의 관계에 만족하는가? 카쿠가 늘상 내미는 호의에 당연하다는 듯 대하고 투덜거리는 이 관계가 괜찮은 것인가? 그러다가 덜컥 카쿠가 질리기라도 하면? 물론 그럴리는 없겠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쉬이 변하지 않던가.



손바닥 뒤집듯 태도는 변하고 마음은 변색되어 처음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을 띄는 것, 미나는 사람이 무서운 생물임을 알고있었다. 변하기에 무서운 존재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바뀐 카쿠의 태도는 제게 괜찮게 다가올 것인가? 이 질문에 미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였고 이번에도 날카로운 치아의 끝이 연한 입술의 살을 찢기 직전, 어깨 위로 살포시 올려지는 손길 탓에 멈추어야했지만 미약한 불안감을 떨쳐내기에는 충분했다. 자문의 답은 간단했다. 부정이었다. 카쿠가 냉담하게 군다면, 다정하지 않은 온화함이 담기지 않은 흑안이 자신을 마주하는 순간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무너질 관계가 두려웠다.




"미나, 강요하지 않겠다고는 말했지만 역시 불안해서 그렇구만. 나는, 여기서 조금 더 관계가 진전되기를 바라네, 자네가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이제는 말해야하네."




나는 그저 그런 친구 관계로만 남고 싶지 않아. 카쿠의 확실한 문장에 미나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벌어졌다가 다시 닫힌다. 동시에 밀려오는 깨달음이 뒤늦게 미나의 심장을 거세게 흔들었다. 나 또한 이런 관계로 남고 싶지 않다. 그 문장에 긍정해버리는 순간 흐릿하던 선이 확고하게 지워질 것 같은 두려움이 다시금 고개를 치켜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사람의 관계는 변해, 그리고 동시에 변해버린 관계는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아,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로 고뇌했던 과거에 비해서 지금은 얼마나 초라하고도 별것없는 고민인가. 생을 버티느냐 고뇌하며 살아가느냐로 고민했던 과거의 자신이 지금의 미나를 보면 아주 복에 겨웠다며 냉소하고는 비웃었을 것이었다.



물론 그럼 너는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선택하겠느냐는 고민에는 냉큼 같이 주저앉아서 똑똑한 머리를 굴려 입을 다물어버리겠지만 말이다. 유독 친애와 다정함에 약해져버린 스스로에게 의아함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의 고민을 인생 최대의 고민이라는 양 평온한 일상으로 끌여올려준 것은 누구였던가. 붉디붉은 장미의 가시덩쿨이 목을 옥죄던 삶에서 꺼내 붉은색이 정열적이고도 뜨거운 색임을 알려준 것은 누구였던가. 겨우겨우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사이 루피의 우렁찬 목소리가 광장을 뚫고, 풀벌레 소리와 분위기를 만들어내던 백색소음들을 뚫고 들려왔다.




"1학년 1바안ㅡ! 다같이 사진 찍자아!!"

"음. 저 망할 원숭이가 산통을 다 깨는구만."

"나...는 사진을 찍으러 가보겠어."




대답을 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지 않고, 카쿠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설 뿐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미나의 답없음을 지적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아침에 등교하면 또다시 태연하게 고개를 쑥 내밀고서는 히죽거리겠지. 언제 그랬냐는 듯 카쿠는 누가 먼저 그었는지도 모르는 선을 넘지 않으며 고개만 빼꼼, 내밀고 그녀가 다시 선을 넘을 용기를 가질 때까지 기다려줄 것이었다.



이제 왔냐며 발굽을 두드리고 환히 웃는 쵸파의 얼굴에서, 미나는 비로소 자신의 욕망을 깨달았다.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다. 지극히 순수한 동경? 헛웃음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자신이 그에게 품었던 감정은, 그가 자신을 보며 품었던 감정은 고작 그런 말들로 형용될 것이 아니었다.




"응? 미나?"

"별거 아니야. 사진 찍자."




그래, 순수한 동경과 친애는 이런 표정이었다. 쵸파를 바라보며, 미나는 무릎을 굽혀 쪼그려앉았다. 그저 미나가 자신의 곁에 앉아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사진을 찍는다는 것에 기뻐하는 것, 먹었던 솜사탕이 몹시도 맛있었다는 듯 단맛에 기분좋게 웃음을 터뜨리고 또렷한 기쁨이 까만 눈동자에 들이치는 순간 미나는 카쿠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이 결단코 평범한 우정으로써 이름지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나? 표정이 이상해, 혹시 어디 아픈건 아니지?"




갸웃거리며 대답이 늦는 그녀의 반응을 살피는 쵸파의 눈동자가 걱정으로 반짝거린다. 그래, 순수한 걱정은 이거였구나. 덕지덕지 붙은 추잡한 감정들, 소유욕과 질투, 그리고 그녀를 욕심내던 감정까지도 전부 없는 순수한 눈동자 속에서 미나는 자신의 감정까지도 깨달았다.


지독하게 깨끗한 거울은 때로 본인이 원하지 않는 것마저도 비추어주곤 하였으니. 카쿠가 품고 있는 감정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미나와 비슷했다. 미나, 그녀가 품은 감정도 그다지 순수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으나ㅡ. 결국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저 지금 미나는 기쁠 뿐이었다.



"응. 아냐. 잘못 알고 있었던 게 있었는데... 이제 아니야. 확실하게 알았거든."

"헤에, 그거 되게 다행이네!"




그래. 다행이지. 하마터면 오해를 할 뻔했지 뭐야. 흐릿했던 선을 그대로 즈려밟는 상상을 하며, 미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제법 그와 닮아 부스스해진 웃음을 지어보였다. 처음부터 선을 없었다. 그저 오래전 소꿉놀이를 하듯 그어두었던 상상을 했을 뿐이었다.



고작 그뿐이었다. 다음날부터, 미나는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똑 닮아버린 눈동자로 비슷한 감정을 품은 동공을 비출 것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등교 파트너를 자처하는 카쿠를 향해 속이 빤히 보이도록 투덜거릴 것이며 마주칠 때마다 무표정으로 가장하며 입꼬리를 당길 것이었다. 카쿠가 못 알아차리면 어쩌지, 자신의 인정을 깨달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소심한 걱정은 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품고 있는 감정과 똑같다면야 그의 숨결 하나, 시선 하나에 질투어린 표정을 짓고 사방에 이를 드러내는 것까지도 같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카쿠잖은가?



자신의 곁에서 단 한번도 벗어난 적 없고 그녀 스스로 곁을 허락한 존재. 유일무이한 자신의 파트너, 일생을 공유해도 괜찮다고 생각할만큼 자신에 한해서는 특급 눈치를 자랑하는 카쿠가 자신의 감정변화를 못 알아차릴리가 없었다. 분명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비로소 정해졌느냐며 목적어나 주어가 쏙 빠진 문장을 내뱉고는 속을 뒤흔들고 가겠지.



그리고 미나는 그 작은 파도를 즐길 준비가 되었다. 잔잔하게 몰려오는 파도도, 힘차게 온 천지를 뒤흔들 것처럼 몰아칠 파도도 이번에는 기꺼이 그 혼란을 설렘으로 부르며 뛰어들 준비가 되었다. 아, 정말이지 완벽한 후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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