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MOMO (@MOMO_jabduk)

*연습글입니다.
*단편글입니다.
*소재: 우타, 버림받고 난 직후
감히.
그 두 글자가 지독하게 쓴 맛을 만들어내며 혀끝에서 뿌리깊게 어른거린다. 감히.
그러나 완성되지 못할 문장이었다. 그 뒤를 이어나가는 것마저도 힘이 벅찼기에, 그 뒤로 이어나갈 문장들이 앞으로 그녀의 생을 어찌 움직일지 알았기에 소녀는 목놓아 울고 피눈물을 흘리며 흙을 그러모으고서 잇지 못할 문장의 첫마디만을 공허하게, 그리고 악에 받쳐 외칠 뿐이었다. 감히, 감히.
감히 자신을 버리고 가.
감히 내게 미래를 약속해놓고선.
감히 나를 버려.
짓이겨진 입술이 더이상 피가 나오지 않을만큼 굳고 말랐다가 다시 날카로운 이빨에 찢겨지기를 몇십번 반복하고서야 소녀는 혹시라도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미약한 기대감이 드디어 고개를 떨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그들은 다시 오지 않는다. 활기차고 무엇보다 우렁차게 성가처럼 울렸던 사랑하는 건물은 사랑했던 것이 되어 처참하게 부숴져버렸으며 소녀의 노래에 누구보다 높게 찬사를 부르짖고 앙코르를 외쳤던 흥 넘치던 국민들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백골로 썩어가고 있었다.
그들, 도무지 그 많던 국민들을 모조리 묻을수가 없어 나뒹구는 두개골들을 바라보며, 소녀는 자조적으로 그에게서 가끔 듣곤 했던 자장가를 나직하게 부르곤 하는 것이다. 소녀가 아는 가장 평화롭고도 잔잔한 곡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평안을 빌고 듣는 자의 안온한 밤을 바라는 노래였다.
소녀가 아는 가장 다정한 곡이었다.
소녀가 처음으로 들었던 친애였다.
어떻게 처음을 잊을 수 있을까. 당연하게 손에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풍경들이 한낱 모래가 되어 흩날리는 것을 바라보며 소녀는 마침내 체념이라는 감정을 배웠다. 그가 자신을 버리고 떠난 것에 이어붙이던 '만약'이라는 선택지들을 올렸다가, 짓뭉게고, 다시 어떻게든 모양을 잡아내며 덕지덕지 붙였다가 떨구는 것이 반복된다.
만약 그가 지금이라도 나타나준다면.
지금까지 느꼈던 모든 고독들을 쏟아내며 우렁차게 외치고 욕설을 내뱉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울 것이었다.
만약 그가 사과의 편지를 보내준다면.
그것을 수십번 칼로 난도질하여 잘게 종이 조각이 될 정도로 아주 오랫동안 찢어놓을 것이었다. 그 문장들을 죄다 외워버릴 기세로 몇백번을 더 읽고 난 후에 말이다.
만약 그가 그렇게 떠나지 않았다면.
만약 그가 이 나라의 국민들을 모조리 죽이지 않았다면.
만약 그가 떠나기 전에 언질이라도 주었다면.
만약 그가 고든마저 죽여버렸다면.
만약 그가 노래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만약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는 진창 속에서, 우타는 마침내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느새 짧아진 소매와 정처없이 걷던 해변가에서 우타는 이해를 배웠다.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공감하며 타인의 감정에 역지사지를 하는 방법을 배웠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남이 처한 상황이 같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이해했다. 다만 그것을 현실로 가져오기는 자신의 상황이 너무 비참했다.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은 사랑을 받아야하잖아?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은,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서 부모가 곁에 있어줘야했잖아? 물론 소녀의 곁에는 고든이라는 훌륭한 보호자가 있었으나 그는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해주지는 못했다. 그저 우타가 최소한의 희망을 놓지 않게끔 두는 안전장치, 그쯤의 역할밖에 못했다. 이거 뭐 한명이라도 살려줘서 고마워 죽겠다고 말해야하나. 삐뚤어진 미소가 제 국민들을 모조리 살해한 학살범의 딸에게 지어진다. 감히 그의 사랑과 더없는 친애에 몸둘바 없이 떨며 그것을 기꺼이 받아든다. 실로 공허하고,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친애였다.
난 괜찮아.
걱정과 염려로 범벅이 된 고든을 향해 해맑게 미소를 보이면서, 우타는 내면의 자신이 썩어가고 있다는 것을 여실하게 느꼈다. 곪고, 도려내지도 못할만큼 점점 커다랗게 변하고 있는 썩은 상처. 새빨간 피가 고여 검게 썩어가는 제 속을 능숙하게 삼키며 우타는 제법 그럴듯해진 미소를 방긋, 지어보인다.
그것이 너무 아려 견딜수가 없을 때에는 고든이 뒤에서 부르든 말든 들려오는 사방의 소리에 귀를 막은 채 목이 쉬어라 비명을 질렀다. 내딛는 걸음이 산산조각난 보도블럭 대신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었던 이전의 길바닥을 밟는다. 힘껏 막은 귀로는 소름끼치는 적막 대신 엘레지아의 국민들이 나긋하게 웃으며 노래의 음절들을 연구하던 산뜻한 목소리들이 귀를 뚫고 들어온다. 소리들, 끔찍한 소리들. 사랑하는 소리들.
아아, 그 모든 풍경들을 지나며 있는 힘껏 내달리는 걸음들은 조금씩, 조금씩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사납게 조각난 엘레지아를 때려붓던 빗방울이 올라가고 청명하고 깨끗했던 푸르른 하늘이 드리운다. 과거였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세계를 뛰었다.
목에서 쇠를 긁는 듯 거친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 비명을 지른다. 듣지마, 속삭이는 음성들과 어느새 제 손에 쥐여져있는 양피지는 형편없이 구겨놓고선. 퀭하게 짓눌린 눈가로 마침내 도착하는 곳은 해안가. 샹크스와 함께 이 섬에 내렸던 그날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이 엘레지아야?
붉어진 눈가로 바라보면 그곳엔 과거의 자신이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어리고, 키도 작았으며 동시에 누구든지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었던 철없는 어린아이.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웃고 있는 선원들이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천진하게 웃으며 자신이 먼저 배에서 내리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어린아이.
소녀는 자신을 보았다. 꺄르륵, 어린아이가 기분 좋게 높은 웃음소리를 내며 마을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가면 그곳엔 음악의 나라라고 불리웠던 과거의 영광이 드러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것을 그가 부숴버리고 조각내어 찢어놓고 그곳에 자신을 버렸음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색이 바랜 영화와 사진을 보는 것처럼 몽환적이었던 과거로부터, 현실에 갑작스럽게 내던져진다.
빗소리가 들렸다.그때에는 들리지 않았던 빗소리가 두두두두 머리를 건드리며 떨구어지면 소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해안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올 사람이 그 누구도 없음을 알면서도 고개를 든다.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 위로 혹여라도 검은색의 해적기가 보일까, 익숙한 붉은색의 졸리로저가 보일까 이미 희망없는 눈동자를 고정하고 있다. 항구였던 나무조각들이 바다로 쓸려가고, 해류를 타고 넘어오는 쓰레기들로 가득찬 해안가를 느린 걸음으로 내딛으며 희망을 품은 스스로를 비웃고 조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더이상 미련이라는 것은 남지 않았다.만약이라는 가정을 덧붙이며 미련하게 희망을 부여잡고 있던 아이는 없었다.
다시 만난다면 반드시 그 심장에 칼을 꽂아넣으리라.그리하여 내뱉어지는 비명이 자신이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이 충분한 노래일 터였다.
어느새 제 손에 쥐여져있는 양피지를 내려다본 소녀는 픽 입꼬리를 당기며 그것을 발로 짓밟았다. 빗물에 그것이 흐려지도록 몇번이나 밟고, 지근지근 신발의 끝으로 눌렀다.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을거야. 그리 단호하게 내뱉은 선언을 알아들은 것처럼 양피지가 사라지고 소녀는 완벽하게 혼자가 되어 다시 습관처럼 해안가를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곤 이어 붙이지 못했던.아직도 이어 붙일 수 없는 문장의 첫마디를 중얼거려 보는 것이다.
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