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MOMO

*해당 글은 커미션 글입니다.


 
그는 좀처럼 후회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의지로 택한 길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는 해군의 길 위에 선 사람이었으니까. 비록 그게 제 형의 필사적인 외면으로 인해 떠넘겨진 자리였다고 하더라도 그는 어쨌건 움켜잡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우직하게 자신의 할일을 다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런 종류의 사람이 몇 없다며 듬직하다 칭찬하는 조교들과 교관들의 목소리에 조금은, 보람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소 한마리에 이끌려 끙끙거리던 이전과 달리 주먹 한방에 곰을 기절시키고 어마어마하게 성장해버린 스스로에게 흐뭇함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탐욕스럽게 남의 생을 짓밟은 해적들의 머리를 으깨어놓았을 때 환희에 가득 찬 목소리로 감사하다 외쳤던 순간이 평생 기억에 남겠구나, 짐작했다. 그 찰나의 순간 때문에 영원히 자신은 바다를 놓을 수 없게 되겠다고 짐작해버렸을지도 몰랐다. 그가 늘상 보았던 녹음 가득한 광활한 초원은 아니었으나 비슷한 푸름을 지닌 바다를 사랑하지 않는 법을, 휴고는 몰랐다. 그저 똑같은 푸르름을 지녔기에 마땅히 이곳 역시 지켜야겠다고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우와, 네가 그 강제로 입대했다는 녀석이구나? 난 아인, 얜 빈즈라고 해."
 
 
 
유연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쑥 내밀었던 것을 잡지 않았다면. 그 경쾌한 미소에 깜빡 속아 미주알고주알 가프의 억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았다면, 무심하게 서있는 자신의 낯선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개성으로 받아들여 끊임없이 제 있을 곳을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피할 틈도 없이 쏟아진 애정과 친애에 못 이기는 척 그들의 친구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다면.
 
제 형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형제란 정말 이런 관계 뿐이냐며 부루퉁하게 내민 입술로 투덜거리지 않았다면, 훈련마다 살뜰하게 건네는 동기의 친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함께 흙바닥에 뒹굴고 엉망이 된 모습을 비웃고 결국 웃음을 터뜨렸던 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멋대로 제 경계를 부수고 들어와 굳건한 마음 속에 스며들지 않았다면. 그 녀석들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폐에 가득 들어차는 비릿한 혈향에 초조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죽음에 이토록 비참하게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다.
 
 
 
"...허억.. 헉.."
 
 
 
무의미한 가정들 속에서 휴고는 이를 악물고 부러진 팔을 끌어올려 주먹을 쥐었다. 손끝이 떨리고 한쪽 어깨가 부러져 아작이 나도, 얼굴 위로 그어진 날카로운 상처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와 시야를 뭉게버려도 그는 쓰러질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럼 얘도 죽이냐고 물어보는 목소리가 아직도 떠들고 있었으니까. 너무 쉽게 죽어 재미없다고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니까.
 
 
금이 간 다리로 다시 한번 힘차게 람각을 날린다. 날카로운 궤적을 손쉽게 언월도로 비틀어버린 사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체 왜 자신이 공격당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며 불안한 듯 늙은 여자의 명령을 기다린다. 어린애와 딱히 다름이 없었다. 간식을 기대하는 개와 같은 표정으로 서있던 악귀가 움직인 것은, 늙은 여자가 싹을 말려버리자며 가냘픈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킬 때였다. 두껍게 립을 바른 입술이 옹졸하게 움직여 사내의 이름을 사랑스럽다는 듯 부른다.
 
 
 
"위블."
 
 
 
에드워드 위블. 휴고는 그 이름을 머릿속에 똑똑히 새겨넣었다. 등뒤에 즐비하게 놓여있는 끔찍한 광경을 만들어낸 장본인. 갑판 한가득 시체를 늘어뜨리고 생기 넘치게 뛰던 심장들 수십개를 베어버린 학살범. 제 동기들의 목숨을 모조리 앗아가버린 악귀의 이름을 그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었다. 살아남는다면, 그의 가족을 모조리 도륙해내서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확고한 증오가 심장에 또렷하게 박힌다. 지독한 무력감과 함께 미약한 희망이 피어오른다.
 
 
제파 선생님이 오면, 아직 살아있는 녀석들은 무사히 마린포드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라. 최근 깨우친 견문색으로 늘어진 시체들 사이 느껴지는 희미한 심장박동과 끊길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숨소리가 아직은 살아있노라 최선을 다해 내지르는 비명과 같았다. 그러니까. 휴고는 어느새 힘이 풀어진 손가락에 다시 한번 힘주어 주먹을 쥐고 천천히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러니까 제파 선생님이 올 때까지만 버틴다면 분명 자신은 죽어도 더 많은 생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휴고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기꺼이 버릴 수 있었다. 숭고한 희생에 대한 가치를 알았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해군은 남겨두면 안되는 법이란다. 해치워버리렴."
 
 
 
마치 그것이 세상의 진리라는 듯 말하는 그들의 태도가 역겨웠다. 그 말에 신의 계시라도 되는 양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의 모든 말이 맞다 광신도마냥 고개를 끄덕인 그가 가여울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영 모자라보이는 사람을 냉큼 붙들고 와서 훈련만 무작정 시켰을 수도 있다. 세상을 모르는 아이를 데리고 와서 세뇌를 시키듯 세상의 진실과 선악을 뒤집어 설명해주었을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압도적인 상황 앞에서 마침내 악의 길을 기꺼이 걷기로 한 몸만 큰 어린 아이일수도 있었다. 수많은 불행 속에서 마침내 탄생해버린 악귀일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위블을 제 정의의 대척점에 세우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아무리 절절한 사연이더라도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듯이, 휴고는 눈앞의 대상이 당장이라도 죽어 나자빠지기를 바랐다. 그의 박복한 인생과 서글프기 짝이 없는 운명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의 평원에, 그의 푸르름에 위블은 끔찍한 오명이자 더러운 흔적이었다. 바다의 파수꾼으로써 그가 살아 숨쉬는 것이 그에게는 치명적인 모욕이었다.
 
 
그렇기에, 휴고는 부러진 다리를 들어올리고 턱이 아리도록 힘주어 휘둘렀다. 그가 해군으로 살아본 세월은 노병들에 비하면 찰나라고 할 수 있는 순간이었으나 해군으로써의 마음가짐과 정의는 확고하게 있었다. 자신의 불행을 이유로 남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당연한 진리 앞에서 휴고는 기꺼이 자신이 정의라고 믿을 수 있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시 깨어났을 때 생존자는 단 둘 뿐이란 절망적인 결과 앞에서도 그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단 둘이더라도 살아남은 게 어디냐며 시체라도 건져서 장례식까지 다 치뤘으면 된거라고 답하고 담담하게 사라진 수십, 수백명의 이름들을 가슴 속에 묻었다. 아직까지는 확고하게 자신의 행동이 후회되지 않았으니까. 그저 자연재해처럼 다가온 것이었고, 그것이 해군으로써 바다를 지키는 자의 최후라 생각하면 제법 그럴싸하고 훌륭한 결말이었기에 휴고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의 후회는, 해군의 선택을 의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위블이 칠무해로 임명되는 것을 선언하다 중얼거리곤 차마 얼굴조차 마주하지 못한 채 허겁지겁 자리를 떠버리는 센고쿠 원수의 등을 사납게 쏘아보던 그때부터 휴고는 정의正依라는 글자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군림 속에 자신의 정의를 찾을 수 없어 허망해지기 시작했다.
 
 
 
끝내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에 분노해 떠나버리는 스승의 뒷모습을 향해, 같이 가자 기대하는 눈빛들을 향해 거절의 대답을 내뱉었던 순간 휴고는 견딜 수 없는 죄악을 짓는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자신의 절망을 이해했다. 유일하게 마지막으로 남은 친구를 해치고 싶지 않다 중얼거리면서도 미묘한 거리감을 내세우는 아인 앞에서, 휴고는 고개를 숙이고 그들과 다른 위치에 서는 것을 택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마침내 서글픈 눈빛을 품는 빈즈의 뒤통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배웅하면서도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는 후회를 배웠다. 돌아가고 싶은 세계를 그리워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저 멀리서 네오해군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유일하고도 무이한 스승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과 똑 닮아 따르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만드는 행보들을 바라보며 휴고는 천천히 체념을 학습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면 아직도 광활한 운동장에서는 힘차게 기합을 내지르고 훈련을 하는 병사들이 있어서, 그들의 풍경 위로 돌아가고 싶었던 순간이 아직도 어른거렸기에 휴고는 고개를 숙이고 오늘도 굳건한 걸음으로 천천히 마린포드를 거니는 것 외에는 할 수 없었다.
 
 
한번도 잊지 않았던 친구들의 목숨을 헤아리며 이제는 흐릿해진 이름들 위로 자신의 이름을 다시 한번 덧씌워 그리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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