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MOMO
 

*해당 글은 커미션 글입니다.


전쟁과 비극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자의 순수는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단언컨데 쿠잔은 이 말에 누구보다 당당하게 답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가치를 매길 수 없이 귀하고 소중하다. 함부로 하늘의 별에 돈을 걸고 사왔다고 하지 않듯이, 쿠잔은 단호하게 순수라는 가치를 귀히 여기곤 했다. 별 볼일 없을 것이라고 단정지어놓고 도착한 그곳에서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분명 아니었던 것 같은데.
 
 
 
"뭐, 상관없나.."
 
 
 
쿠잔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냉기를 품은 숨을 흐르는 바람에 따라 내뱉었다. 그날의 추억들이 흩날리는 것 같아 아쉽게 바라보던 시선은 선글라스 너머로 얼핏 숨겨지고 몇번 눈을 깜빡이던 그는 가볍게 고개를 치켜들어 밤하늘에 누구보다 생생히 살아숨쉬고 있노라고 은은한 위로를 건네는 별들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에도 지긋지긋한 임무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도착한 회의장에서 반짝이는 눈빛을 숨기지 못하고 들떠있던 그 여자의 얼굴을 보았을 때, 사실 이미 짐작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그녀와는 어떤 식으로든 엮이리라는 진한 예감을.
 
 
도리어 모른 척 고개를 돌려버리고 슬그머니 외면했던 모든 행동들도, 아닌 척 친근하게 다가가 말을 이리저리 걸었던 것도 어쭙잖은 그의 노력이었다. 그저 농땡이를 피우기 위해 은근슬쩍 돌아다녔던 습지에서 그녀를 마주쳤을 때, 누구보다 환한 눈빛으로 자원들을 움켜잡고 살뜰하게 그 땅에 살아가는 그 모든 것에 애정을 퍼붓는 것을 보았을 때, 미묘하게 올라왔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쿠잔은 아직 이름짓지 못했었다.
 
 
다정하게 웃어넘기고 소소하기 짝이 없는 농담에서 웃음을 터뜨렸던 그 곱고 깨끗한 미소를 잊을 수 있을리가. 그건 그가 살아오면서 즐비하게 보아왔던 추악한 얼굴과는 무척이나 달라 이질적이기까지했다. 그저 지긋하게 보아왔던 수많은 섬의 기후와 생태계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며 감탄을 내뱉는 여자의 눈동자에 박혀있던 진리는 잊을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 순수하기 짝이 없는 적안이 도르륵 굴러왔을 때마다 난처한 감정에 입술을 몇번이나 우물거렸던 것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아직 뭘 몰라서 그런 눈동자를 가졌을 것이라고 멋대로 추측하고 선을 그어두었던 것도 자기방어의 일종이었다. 자신의 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가 묻어있는지를 몰라서, 해군이 숨기고 있는 어둠을 몰라서. 자신의 등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절규와 비명이 추잡하게 뒤섞여 발목을 움켜잡고 있는지를 몰라서. 살릴 수 있음에도 입장과 명분이라는 것을 이유로 비열하게 고개를 돌린 자신을 몰라서. 수십개의 이유를 가져다대고 슬쩍 말을 걸어보았을 때마다, 그녀는 빛이 바래지 않은 눈동자로 똑바로 마주해오곤 했었다. 문득 튀어나간 질문은 자신의 그늘 중 하나를 드러내도 똑같은 눈동자로 보아줄까 의심하여 튀어나온 질문이기도 했다.
 
 
 
'어음.. 있잖아, 언니.. 살릴 수 있는데, 안 살린 건.. 나쁜걸까?'
 
 
 
그녀는 결단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질문에 담긴 의도를 정확하게 읽어낼 것이라고 기대하고 초조해하며 내려다본 그녀의 반응은 무척이나 뜻밖이었다. 끔찍하게 여길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보여지는 눈동자는 선명하고도 따스한 불꽃을 닮은 눈동자라, 쿠잔은 저도 모르게 그 안에서 자신의 위안을 찾아냈다. 얼핏 벌어진 입술 밖으로 차분하게 풀어나오는 말들은, 단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는 다정한 말이었다.


 
'살릴 수 있다는 이유로, 전부 다 살려야하는 건 아니에요. 잡초도 모조리 뽑아두면 도리어 안 좋은 게 있는 것처럼요. 전, 쿠잔 씨가 그런 판단은 명확하게 내릴 수 있다고 확신해요. 제가 지금껏 보아온 당신은 분명 그럴 겁니다.'
 
 
 
속살거리는 봄처럼 불어온 바람은 지금껏 홀로 견뎌왔던 겨울을 몰아내듯 따듯했다. 두서없이 무작정 곧게 뻗어오는 신뢰가 부담스럽도록 사랑스러웠다. 순식간에 달아오르려던 얼굴을 냉큼 가리고 그렇냐고 조그맣게 중얼거렸을 때 쿠잔의 머리를 가득 메운 생각은 포커페이스 훈련을 해서 참 다행이란 생각 뿐이었다. 노스블루에서 사우스블루로 넘어가고자 모였던 자리에서, 쿠잔은 새삼 또다른 연구원들의 존재를 인지하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비틀어 어느새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제 곁에 서있는 자근별을 내려다보았다. 제 곁에 바짝 붙은 자근별의 기척에 저도 모르게 벌어지려는 거리를 가깝도록 힘주어 버티면서도 생각은 복잡하게 흔들렸다.
 
 
뭘 믿고 이래. 도대체 자신의 어떤 부분을 믿어서 이리 가까이 붙는건지 도무지, 쿠잔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저기 다른 연구원들처럼 이질적인 기운에 놀라 경계를 하지도 않고선. 그런 무력한 부분마저도 자신이 먼저 조바심을 내는 이유를 아직은 몰랐다.
 
 
 
'이 해역 근처는 광맥이 있어서 보석이 많이 나온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해적들도 탐을 낸다던데... 저, 지켜주실거죠, 쿠잔 씨?'



방긋 웃으며 올려다본 얼굴에 다시 한번 달아오른 뺨을 느낀 그는 뒤늦게 그날의 감정에 무어라 이름을 붙이는지 깨달아 성급하게 얼굴을 가렸다. 다행히 작은 키의 그녀는 그저 해맑게 웃는 낯으로 올려다볼 뿐이었지만. 세계를 사랑하는 것은 이미 글렀다고 생각했다. 따듯한 가정에서 태어나 다정한 부모의 아래에서 올곧게 자라온 그녀와 달리 자신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그에겐 다정한 부모 따위는 없었다. 온갖 색채로 뒤덮여있었던 찬란한 세계는 쿠잔에게만 삭막한 폐허에 가까웠고 내딛는 걸음마다 생명이 넘쳤던 그녀와 다르게 걷는 걸음은 죄다 피묻은 발자국과 누군가의 절규로만 뒤덮여있었다.
 
 
그러니,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해야했던 이유였다. 살아갈 날이 창창했다. 환한 미소가 자신에게 물들여 어두워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너는 반드시 절망하며 죽을 것이라는 저주를 수도없이 들어왔으니까. 후회할 것이라고 악에 바쳐 내질렀던 토혈 섞인 유언이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는 것 같았으니까. 핏발선 눈동자로 쉰 목소리로 내뱉었던 가혹한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으니까. 그 소리를 듣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도망치듯 돌아간 본부에서 미친듯이 일에 몰두했을 때, 서류에 파묻혔던 순간에도 떠오르는 목소리들이 가혹하게 그를 채찍질했다. 가끔씩 들어올린 고개 너머로 얼핏 꽃 하나에 세상의 보물을 찾은 것처럼 환호를 질렀던 모습이 얼핏 보이는 것도, 그는 '미련'이라고 이름붙이곤 고개를 돌렸다.
 
 

'아오키지... 요새.. 할일이 없니..? 아니면 뭐 잊고싶은 거라도 있는건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만.. 쉬엄쉬엄 하려무나... 그, 아이들이 겁을 먹잖니.'
 
 
 
츠루 씨에게마저 경고를 들었을 때, 그는 더이상 자신의 감정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결정을 내리곤 고개를 비틀어 <사우스블루의 생태계 보고_최종>을 바라보았다. 기어이 사우스블루마저도 그 여자의 손아귀에 놓인 모양이었다.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 여자가 자신이 받은 사랑을 배로 불려서는 마침내 사우스블루마저도 사랑하고 있나보다. 나는 돌아봐주지 않고. 그동안 찾아올 수 있었을텐데 야속하게 단 한번도 찾아오지 않은 그녀를 떠올리며 쿠잔은 떠오른 생각에 먼저 펜을 내려놓았다. 자신이 놓을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무력하게 그녀가 먼저 자신을 버려주기를 조심스럽게 희망했다. 그럼에도 역시ㅡ, 쿠잔은 미약하게 피어오르는 질투에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비죽이며 회식에 참석하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약간의 추한 질투심 속 숨어있는 소심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음. 그리고.. 그때 고백을 했었지. 믿어져? 그녀가 내게 먼저 고백을 했다니까. 나는 이미 마음 곱게 접어서 도무지 내 분수에는 맞지 않을만큼 과분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고백을 하더라고."

 
 

그 상냥한 얼굴로 거절조차 못하게 웃으면서 말이야. 날 찾아오려고 했는데 혹시 부담스러울까봐 엄청 걱정하면서 못 찾아갔다네. 어쩜 생각하는 것도 이리 다정하고 배려가 넘치는지 괜히 그 고백에 웃음이 터졌다니까. 세상에, 우리는 이미 서로를 그리워했던거야. 차이점은 난 마주할 수 없다고 이리저리 피하는 동안 그녀는 온당하게 제 감정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는 것이겠지. 언제봐도 참 당찬 여자야. 그렇지? 담담하게 고백하는 것치고는 소소한 미소가 얼굴 가득 피어오른다. 다시 생각해도 황홀한 순간이었지. 나도 그녀를 좋아한다 부끄럽게 답한 순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던 얼굴도 사랑스러웠고. 희미한 미소를 피워올린 쿠잔이 입가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숨을 수습하며 선글라스 너머 절규하는 얼굴 그대로 얼어붙은 해병의 시체를 발로 툭, 건드리며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뭐. 그래도 꽤 달달한 사랑얘기였지?"



가는 길 조금이라도 따듯했기를 바라. 유언처럼 속삭인 말이 얼어붙은 해군의 뺨에 스러지고 쿠잔은 그대로 고개를 돌려 사납게 싸우는 소리를 고스란히 전송하고 있는 전보벌레를 내려다봤다. 죽여, 이쪽으로 도망갔다. 저쪽으로 몰아붙여! 좋아, 죽였다! 환호와 비명이 날카롭게 뒤섞여 서로의 목숨을 앗아가는 소리나 공허한 세계에 울린다.


생이 끊기고 또다른 가능성이 멸절하는 소리가 끔찍하게 고막을 뚫고 생생하게 너 또한 이 끔찍한 참상에 지분이 있노라고 외친다. 응, 그렇지, 내게도 지분이 있다. 그걸 잊어서는 안되지. 멋대로 죽음의 무게와 생의 무게에서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걸 그녀도 알게 할 생각은 없을 뿐. 자신이 걷는 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것, 그것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았건만 자세한 내막까지 알게 되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미약한 초조함이 불씨처럼 고개를 삐쭉 내밀고 사악한 말을 속살거린다. 그녀는 네게 실망할거야. 완전히 어둠의 길로 들어서서는 티치의 민간인들의 학살도 눈감아주고 있다는 것을 알면 아예 헤어지자고 말해버릴지도 모를걸? 그리고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너는 아주 외톨이가 되겠구나. 더는 그녀의 따듯한 웃음도 만물을 사랑스럽게 보던 시선에서 빗겨나가 유일한 예외가 되겠구나. 속삭이는 음성들을 무시한 채 들어올린 수화기 너머로 낮은 목소리가 유쾌한 듯 울린다.



[처분한건가, 아오키지?]
 
 
 
코드네임으로 불리는 건 싫다고 말했건만. 쿠잔은 짜증스러운 마음으로 얼굴을 구기며 사납게 응답했다.
 
 
 
"...그래."


[제하하하, 만족스러운걸.. 좋아, 이제 다음 할일이 생길 때까지 마음껏 할일 하라구! 난 빡빡한 사람이 아니ㅡ]



듣기싫다. 무심하게 끊어버린 전화에 전보벌레가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리며 눈치를 보았다. 흘끔거리는 시선에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의자삼아 앉아있던 얼어붙은 해병의 망토를 흘겨보았다. 선명하게 쓰여있는 '정의'라는 글자가 마치 넌 이제 이곳의 사람이 아니라는 듯 매섭게 선을 그어두는 것 같아 괜히 이를 악문 쿠잔이었다. 나도 그쪽으로 다시 들어갈 생각 따위는 없어. 저 글자 아래 선 채 얼마나 많은 생을 명분으로 뒤집어버렸던가. 서로 다른 이념에 편가르고, 과격파니 온건파니 선을 가르고 편을 갈라 내세워 자신을 대표로 등을 떠밀었을 때의 더러웠던 감각이 떠오르는 듯했다. 이곳이나 저곳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제 안위를 옮긴 티치의 그늘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늑했고 자유로웠다. 동시에 더 역겹기도 했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그의 손끝 한번에 모조리 죽어나갈 때 눈을 찌푸릴 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을 알면 그녀가 화낼까. 아니, 아마도 그녀는 저번처럼 두루뭉술한 질문에도 명백한 답을 내리곤 활짝 웃어보이겠지. 내 죄책감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받아들여주곤 무한한 믿음을 내어줄 그녀를 떠올리며 이번에도 쿠잔은 다시 한번 버텨보기로 결정했다.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방식은 피가 튀기지 않았으니까, 혈향은 묻지 않을 것이었다. 순식간에 얼어붙어 미처 원망할 틈도 없었으니 괜찮을지도 몰랐다.



"....근별."



조그맣게 속삭인 이름조차 애달파 조심스럽게 입꼬리를 올린 쿠잔은 시선을 돌려 아마 근별이 있을, 언덕을 흘겨보며 다급하게 긴 다리를 쭉쭉 뻗어 허겁지겁 언덕을 넘었다. 조금 길게 언덕을 넘어 마침내 바라본 그곳엔, 새하얀 달빛을 온전히 받으며 돌아보는 그녀가 있었다. 언제나처럼 말갛게 웃음을 터뜨리며 쿠잔, 다정스러운 어조로 제 이름을 불렀다. 날아가듯 달려 행여 날아갈까 조심스럽게 끌어안았을 때, 그는 자신의 사랑의 방식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갖고 싶다.


저 여자의 세상이 자신으로 한정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에 허겁지겁 표정을 관리했지만 한번 떠오른 생각은 멈추지 않고 퐁퐁 솟아나 슬쩍 그의 욕망을 부추겼다. 이제 해군도 아닌데 뭐어때? 그녀는 그를 믿음직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달리 말해서는ㅡ 착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 쿠잔은 미묘하게 올라오려는 입꼬리를 힘주어 내리며 다시 한번 들꽃과 따듯한 하늘의 향이 뒤섞인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버리곤 숨을 들이쉬었다. 찬란하게 피어나는 온갖 향들 속에서, 쿠잔은 메마른 눈동자를 들어올려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눈치를 보는 연구소의 직원들을 향해 사납게 이곳으로 오지 마라 살기를 흩뿌렸다.



자신의 것이 되어달라고 하면, 그리 해줄까. 수없이 옥죄어 줄줄이 딸려오는 의문을 목구멍 깊은 곳으로 밀어넣고는 쿠잔은 무슨 일이냐 해맑게 웃는 근별의 어깨를 살뜰하게 잡았다.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었다. 자신이 혐오스러워 견딜수가 없다고, 흘려온 피가 웅덩이가 되고 바다가 되어 자신을 삼키고 가라앉은 심해에선 자신이 얼려 바스러뜨려 죽였던 것들이 험악하게 손아귀를 뻗어 잡는다고, 그 탓에 발목이 베일 것 같다 한탄을 늘어놓고 싶음에도 능숙하게 뒷말을 꾸역꾸역 삼킨 쿠잔은, 근별의 염려가 섞인 적안을 향해 애써 입꼬리를 당기곤 그저 그 모든 감정을 숨겨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괜찮아요, 쿠잔 씨. 아무리 강한 사람이어도 분명 쉴 곳이 필요한걸요. 쿠잔 씨를 믿어요. 쿠잔 씨의 노력을, 믿어요."


 

환히 웃는 낯으로 제 차가운 뺨을 쓰다듬어 온기를 전하였을 때 쿠잔은 울듯 일그러지는 얼굴에 간신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가, 자신이 그녀의 순수를 보듯, 그녀 또한 자신의 노력을 보아와준 모양이었다.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가혹하게 몰아붙였던 그 노력을 믿어준 모양이었다.

 
 
 
"응. 근별이.. 믿어주니까, 그럼 된거지.."
 
 
 
그것만이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안심이었고, 가여운 스스로에게 내리는 위로였으며 잔인하기 짝이 없는 스스로에게 내리는 형벌이었다. 그녀를 온전히 가질 수 없다 스스로 그어둔 선으로 애써 날카롭게 빚어낸 벌이었다. 그렇기에 근별은 이번에도 찬란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어내곤, 변함없이 영원토록 빛날 순수를 내보이는 것이었다. 그래, 별에게 가치를 어떻게 매기겠어? 그녀는 달보다 더 고아한 빛을 내는 존재였고, 길잃고 어둠 속에서 허덕이는 자신을 인도하는 별빛이었다. 숨막히도록 눈이 찢이지도록 빛나는 순수에 저도 모르게 밀려드는 절망을 인정하고야 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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