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MOMO

*해당 글은 커미션 글입니다.
복수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고아라며 비웃음이 박혔을 때에도 딱히 신경쓰이지 않았다. 멋모르고 내뱉는 문장들이 상처가 될리가. 부모가 날 버리고 갔다고 조롱하는 그들의 가련하고도 멍청한 두뇌에는 비웃음조차도 사치였다. 내 부모는, 그들은 전부 세계의 평화에 기여해서 목숨을 내던진 또 하나의 영웅이었다. 그러니 원망따위도 사치에 가까운 것. 스테리는 천천히 무릎을 당겨 제게 매섭게 날아드는 '고아'라는 단어를 애써 흘려들었다.
원망하지 않는다.
습관처럼 중얼거렸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그 말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마도 사무치게 느껴지고 있는 외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아원이라고 하여 모두가 부모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후원자와 살뜰하게 웃음을 흩뿌리며 자랑처럼 주말과 휴일에 사온 사치품들을 들이밀고 웃음소리를 드높이는 아이들도 있었고, 잠시 그저 맡겨둘 뿐이라고 절절한 눈물을 흘리며 재회를 약속하는 가여운 부녀 또한 있었다. 분명 몇밤만 지나면 반드시 데리러 올 것이라며 이를 악물고 지난 숫자를 되새기고 있던 소년 또한 있었다. 적어도 그들은 목표라는 것이 있었다.
찬란하고 순진무구한 웃음을 마땅히 부러워해줘야 할 것을. 착한 아이가 될 필요는 없단다. 쓸모있는 아이가 되렴. 부모의 가르침은 굳건하게 가슴속에 남아 추악한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스테리는 사납게 눈을 뜨고 스치듯 지나간 시간들 속에서 덧없이 져버린 부모의 죽음이 허무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세계정부는 그들의 치부를 들키고 싶어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치부를 치워내고 닦아냈던 이들의 죽음마저도 부정해버렸다. 평생을 바친 헌신이, 핏덩이보다 어렸던 소년을 남겨두고 피눈물을 삼키며 '원대한 뜻'에 어울려 제 목숨을 갈아바친 대가가 바로 방치였다.
착한 아이가 될 필요는 없다. 그 말은 스테리의 가슴 속 깊게 박혀 조그마한 원망을 만들어내기에는 충분한 틈이었다. 자신의 원망을 인정하고 나서야, 스테리는 비로소 똑바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싫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꺄르륵 웃고 제 부모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평화를 누리는 저들의 무지함이 지독하게 싫었다. 제 자신 하나 지킬 힘 없이 무한한 듯 피묻은 평화를 깨끗하게 바라보는 눈동자가 역겨웠다.
"...원장님. 돈. 벌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내뱉은 문장이었다. 부모는 허망하게 가버렸으나 그들이 남긴 지식들은 결코 헛짓거리가 아니었으므로. 사냥하고 자상했던 원장은 화들짝 놀라 결코 그럴 순 없다 손사레를 쳤지만 글쎄, 사람의 욕망은 무한하고 또 때로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구석에서 얼굴을 들이밀고 잔혹한 미소를 짓곤 했다.
사람은 변한다. 그렇기에 무서운 존재라는 사실을 이미 예전부터 알고있었기에 스테리는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슬그머니 나와 얘기 좀 하자며 저를 부르는 원장을 비열한 인간이라고 욕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그래도 애들을 팔아치울 수 없다고 중얼거린 원장의 손이 떨린 것을, 그 뒤에 빼곡하게 쓰여있는 장부와 새빨간 색연필로 그어져있던 적자의 숫자들을 떠올린 스테리는 뻔뻔스럽게 결코 팔아치우는 것이 아닌, 명예로운 자리에 추천하는 것 뿐이라며 누가들어도 빤한 거짓말로 그의 기만을 속였다. 제 부모와 같이 갈아넣어질 희생은 간단하게 무시해버렸다.
그렇게 하나둘씩 거슬렸던 아이들을 CP로 추천해 팔아넘겼다. 처음엔 눈물을 뽑아내며 반드시 되돌아올 수 있으니 잊지말라고 했던 원장도 이제는 그저 가는 거냐며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제 손에 여유로워진 장부를 넘길 뿐이었으니까. 고아원에 빼곡하게 있었던 아이들 수십명이 팔아치워지고 다시 새로운 아이들이 버려져 돌아와도 원장은 스테리만큼은 팔아넘기지 않았다. 새로 들어온 아이들은 눈치껏 가장 잘 보여야 할 사람을 찾아 머리를 조아렸고 원장은 자신의 주머니를 두툼하게 만들어준 일등공신을 잊지않고 언제나처럼, '뒷탈이 없을' 아이를 골라 제게 추천하기를 탐욕스럽게 기다렸다.
착한 아이가 될 필요는 없단다. 쓸모있는 아이가 되렴.
부모의 조언은 현명했다. 동시에 아이에게 냉혹한 가르침이 되기도 했다. 쓸모있는 아이, 스테리는 자신이 버릴 수 없는 패가 되기를 원했다.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고 마침내 높디 높은 곳에 앉아 턱끝으로 사람을 부리고 손끝으로 사람의 생을 손쉽게 빼앗을 수 있는 인물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권좌에 앉아 사람의 생을 개미목숨처럼 쉬이 여기게 되면 허무하게 스러진 제 부모의 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연하다는 듯 사람을 체스말로 버리고 써버린 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와 세계, 상냥한 마음을 가질 권리조차도 빼앗겨버린 스테리에게 남은 목표는 단 하나였다. 더 높은 곳, 아무도 넘보지 못할만큼 압도적으로 높은 곳에 올라 내 위에 사람을 두지 않겠다. 그러기 위해 우선적으로, 귀족이 되어야했다. 평민은 감히 쳐다도 보지 못하고 더러운 얼굴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무례하다 일갈해버릴 수 있는 귀족이 되어야했다. 스테리는 그날 고아원에조차 들지 못하고 빙빙 도는 시궁쥐들을 불러모아 빈약한 빵을 쥐여주고 손쉽게 입양할 아이를 찾는 귀족 부부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그들을 유인해내는 것은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간단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만난 귀족부부와 만난 첫날, 스테리는 비죽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아내기 위해 애썼다.
"호오, 이 아이... 제법.. 귀족같이 생기지 않았나. 디디트, 이 아이는 어떻소? 시궁쥐들 사이에 제법 그럴싸한 생쥐가 하나 있군."
저를 칭하는 호칭은 모욕적이지 않았다. 도리어 생쥐라고 부르며 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한 아웃룩 3세의 손에 꼼꼼하게 끼어있는 순백의 장갑이, 그 위로 버겁게 줄줄이 매달려있는 보석 반지들이 더 눈에 띄는걸. 마침내 기회가 왔다. 아이가 없어 가난하지만 따스하게 맞이해줄 쓸모없는 부모들보다 더 유용하고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감투가 필요한 부모가 왔다. 스테리는 차분하게 읽고있더너 책에 책갈피를 꽂아넣고 천천히 일어섰다. 행동 하나하나, 전부 공을 들여 움직이는 모든 동작들에는 그들이 그토록 기대하는 기품이 서리도록 느긋하게 움직였다.
"어머.. 저 아이.. 정말.. <귀족적>이군요!! 저 아이, 당장 데려가야겠어요."
"네? 아, 아아, 스, 스테리 말씀이시군요. 하지만, 하지만 저 아이는.."
귀족적. 기껏해야 행동을 느리게 하고 우아한 척 다 낡아빠지고 색이 바랜 책갈피를 끼워넣는 것 하나뿐이었는데. 보라, 어미의 말처럼 느릿하게 행동하니 고풍스럽다고 칭찬을 내뱉지 않나. 아비의 말처럼 무엇이든 하나하나 행동에 예의를 따지며 깐깐하게 구니 귀족적이라고 제 울타리 안에 기꺼이 집어넣지를 않나. 이제 와서 허겁지겁 소유욕을 드러내는 원장을 향해 스테리는 고운 미소를 지으며 깍듯한 작별인사를 건넸다.
이 판은 이제 이미 너무 작아졌다. 자신이 앉고 싶은 자리는 왕좌였지, 기껏해야 고아원의 원장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 닳아빠지고 낡아 벗겨진 가죽의자 따위가 탐이 날리가. 그 정도의 자리에서는 사람을 부리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당황스러워하는 원장을 뒤로 하고 새로운 부모가 손을 내밀었을 때, 스테리는 나긋한 미소로 감히 더러운 손으로 잡을 수 없다 말하며 너스레를 떨어 다시 한번 그들에게 아양을 부려주었다.
기가막히지 않나. 진짜 아들은 귀족의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는다며 인상을 찌푸리고 시궁쥐라 비웃었던 이는 제 입맛대로 군다는 이유로 사랑을 나누어 준다는 것이. 스테리는 고개를 비틀어 어쩔 줄 모르고 다급하게 시선을 바깥으로 옮기는 금발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비록 행동은 자신과 다름이 없음에도 실크와 크라바트로 잘 꾸며진 모습들은 이미 부정한다고 해도 어엿한 귀족의 모습이었다. 귀한 이를 귀히 대접하고 소중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진짜 귀족의 모습이었다.
물론 그게 부모의 눈에는 아닌 모양이었지만. 구태여 못 보고 있는 것을 짚어줄 의리는 없었다. 그저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려 저멀리 사라지는 사보의 등을 시선으로 쫓으며 꼼꼼하게 창문을 닫아 걸쇠를 부수는 것이 그가 다른 길로 뛰어던 형제를 위해 줄 수 있는 선물이었다. 다시 돌아오지마라, 그래, 차라리 자신처럼 버티고 견딜 수 없다면 답답한 가면 따위는 집어던지고 도망치는 것 또한 괜찮은 선택지가 될 수도 있었을테니까.
[혁명군의 참모총장, 전장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ㅡ]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게 당신 선택이라면. 그리 불꽃처럼 살아가는 것이 형님의 선택이라면 존중은 해줄 수 있소, 이해는 못하겠지만. 아니ㅡ, 이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 목숨이 목숨처럼 느껴지지 않는 자리를 원했다. 하여 그리던 왕좌에 앉고 왕관을 써도 영 어색한 것처럼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느껴진 이유는 무얼까, 아직 스테리는 그 질문에 대답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조금 더 위로, 벌레들과 개미들은 보이지도 않는 곳에 앉고 나서야 사람이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늦은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로소 생이 우스워질 것 같았다.
우스워지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