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MOMO
 
*커미션 글입니다.
*TYPE B


사랑.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며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감정. 또는 그러한 관계나 사람을 의미하는 말. 라피트는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물끄러미 시선을 들어올렸다.
 
 
타칭ㅡ 예를 들자면, 바제스처럼 천박한 동료의 말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뱀처럼 새카만 눈동자 위로 희고 고운 머리카락을 흔들거리는 존재가 자신의 시선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용케 가면 너머의 그 조그마한 틈으로 눈동자를 굴려 자신만큼이나 복잡할 활자들을 읽어내려가던 시선이 자신에게 닿았을 때의 그 선뜩한 감각이란.
 
 
라피트는 혀를 짧게 차며 슬그머니 소름이 돋은 팔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부드러운 천의 재질이 라피트의 소름을 어느 정도 가라앉혀주었다. 짙게 풍겨오는 바닷바람과 짠향에 고개를 들어올려 저도 모르게 수평선을 찾아 눈을 돌리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본능에 새겨진 항해사의 감각 때문일지도 몰랐다.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미지를 찾아 헤메는 지식인의 사명 같은 것. 라피트는 자신의 무지에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저 기특한 존재를 향한 마음은? 라피트는 스스로에게 내던진 의문에 미간을 좁히며 부지런히 자신의 지식 안에서 적당한 단어를 찾아 머리를 굴려보았다. 자신이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은 없었으니 이번에도 시간이 걸리겠지만 확실한 정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과 오만에 뒤덮인 생각이었다.
 
 
 
 
친애? 그런 말랑하고 허접한 단어로는 표현하지 못했다.
다정? 정이라는 옅고 흐릿하기 짝이 없는 마음은 애초에 허무하며 실존치 않는 것이다.
 
 
 
라피트는 적당한 단어를 그 외에도 몇개를 떠올려냈지만, 위타드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을만한 단어를 찾기에는 모조리 적당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한번 미간을 구겨버렸다. 내가 정의하지 못하는 것은 없어야하는데, 불만과 함께 얼굴을 구기고 있던 그를 깨운 것은 어느새 기척없이 다가온 위타드의 가벼운 손끝이었다.
 
 
 
 
[고민. 의문.]
 
 
 
 
간단하게 표현하는 손짓에 라피트는 잠시 멈칫하였으나 이내 보랏빛 호선을 입가에 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금방이라도 독을 물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목덜미에 박아넣어도 모자라지 않을만큼 잔인한 미소였으나 그마저도 기쁜 듯 위타드는 기분 좋게 어깨를 살짝 흔들며 웃음을 터뜨렸다. 미세한 동작이었다. 그러한 동작에 제법 아끼는 마음이 드는 건. 아, 마침내 라피트는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 종류인지를 깨닫고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귀애貴愛.
그것인 귀애였다.
 
 
 
 
기특하여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제 말 한마디에 가슴 설레하고 색이 옅은 머리카락을 흔들거리며 웃음을 터뜨리는 그를 어여삐 여기는 마음. 그럼 그렇지, 역시 사랑이나 친애 같은 웃기지도 않은 말랑한 마음은 아니로군. 라피트는 자신의 확고한 선에 스스로 만족하며 위타드에 대한 감정을 정리했다.
 
 
 
 
자신은 다른 오만하고, 멍청한 해적들과 다르다고 여겼다. 그야 물론 선장은 그린듯이 완벽하게 천박하고 강한 해적이었지만, 자신은 달랐으니까. 라피트는, 스스로가 생각해두고 정교하게 짜놓은 프레임 속의 자신은 씻지도 않고 오랫동안 전투에 굶주린 것처럼 적만 보면 눈을 뒤집어까고 달려드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그래, 어여쁜 마음. 딱 그 정도면 적당했다. 부족하지도 않았고 차고 넘치지도 않는다.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고 시키는 일에는 충직할 정도로 그의 심리까지 섬세하게 고려하여 움직여주는 것이 좋았다. 자신이 허락한 말랑함은, 자신이 결정하고 선명하게 그어놓은 선은 그 정도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그 이상을 나아가서도 안될 일이었고, 그 아래로 모자라면 불만스러워질 것 같은 적당함이 라피트의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틀에 들어맞았다.
 
 
 
 
보라, 천박하고 멍청한 해적들과 달리 자신들은 자유시간이 주어지자마자 스스로를 정돈하기 위해 제각각의 노력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여타 다른 해적들과 달리 술과 쾌락을 향해 손을 뻗고 그 뒤룩뒤룩 살이 찐 배에 기름을 채워넣는 것. 만일 동료라고 할지라도 그런 천박한 종류의 사람이 제 동료로 들어온다면, 라피트는 결단코 그를 좋게 보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적어도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등을 맞댈 동료는, 그처럼 완벽하지는 않아도 최소한 위타드 정도는 되어야했다. 자신의 무지를 수치스러워하고 무능을 모욕으로 받아들여야하는 사람이어야했다. 격이 어느정도는 있어야 했고 품위라는 단어에 대해서 어느정도는 걸맞아야했다. 그런 의미에서 위타드는 라피트의 귀애하는 동료가 되기에 몹시도 충분했다.
 
 
 
 
 
[불만. 의문. 라피트씨.]
 
 
 
 
 
라피트가 가볍게 손끝으로 건드려 보내는 신호에 고개를 돌려 위타드를 바라보았다. 불만? 아, 그제서야 라피트는 자신의 미간이 아주 조금, 일그러져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조차도 몰랐던 조그마한 불쾌감이었거늘 그 사실을 잽싸게 알아차리고 물어오는 저 사람을 어찌 귀애하지 않겠나? 라피트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경쾌한 리듬으로 바닥을 두드리던 지팡이 딱, 멎는다.
 
 
 
 
 
"별거 아닙니다. 그냥... 저 해군의 감시자들이 좀 지긋지긋해졌을 뿐이에요."
 
 
 
 
기특하지 않은가. 흐뭇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들어 살기어린 눈동자로 해군의 감시자들을 향해 사나운 시선을 던지는 저 모습이 마치 충직하게 제 마음에 들기 위해 꼬리를 치고 이를 드러내는 개 같아서. 라피트는 환하게 웃었다.
 
 
 
 
 
"해군을 건드리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다. 적당히 하지 그래."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이대로 해군의 감시자들을 모조리 썰어버리고 그 목으로 공놀이라도 했을 터였다. 저 불쾌한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라피트는 얼굴을 찡그리며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류, 답답할 정도로 꽉 막힌 인간. 라피트는 느른하게 팔짱을 끼며 헛웃음을 지었다. 언제부터 우리가 <규율>을 잘 지켰다고? 선장의 명령이면 모를까, 라피트는 이미 지긋지긋할 정도로 규칙과 규율이라는 것에 학을 떼었다. 그 모든 것에 질리고 질려 결국 선택한 일탈이 이 해적질이지 않은가? 똑같은 신세이면서 자신을 슬그머니 압박하려고 드는 것이 같잖았다. 물론 이 수많은 불만을 입속으로 쓰게 삼키며, 라피트는 이번에도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강자의 말이 곧 절대적인 것 역시 해적의 룰, 라피트는 본인이 아무리 규율에서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정해놓은 틀 안에서 벗어나기는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예, 그러죠 뭐."
 
 
 
 
해적이 되었다면 해적이 룰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녀석. 시류는 반대로 그런 라피트가 꼴사나웠다. 이미 다 망해버린 마당에 고집처럼 지키는 그 허접한 규율같은 거, 시류는 짧게 혀를 찼다. 우리는 어차피 목줄이 묶인 사람들이란 말이다.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 목줄을 누구에게 쥐여줄 수 있을지에 대한 빈약한 것 하나뿐. 그게 규칙일지, 선장이라는 이름을 하고 있는 압도적인 공포와 유혹에게 쥐여줄 것인지. 시류는 혀를 짧게 차고 금방이라도 라피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달려들고자 하는 위타드의 뒷덜미를 잡아 얌전히 라피트의 곁에 내려놓았다. 잠깐 닿은 것만으로도 싫다고 온몸을 몸부림치며 꼼꼼하게 손수건으로 닿았던 부분까지 닦는 것을 보면 괜히 더 괴롭히고 싶지만. 시류는 라피트처럼 익숙하게 표정과 감정을 지저 아래로 깔아버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쓸데없는 감정놀음은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다만 불만인 것은 양의 상태가 지속되는 위타드에게 향했다. 라피트에게 마음을 빼앗겨 기술을 움직이는 꼴은, 썩 보기에 좋은 광경은 아니었으니까. 그건 꼴사나운 것을 넘어서 보기 힘들 정도로 눈꼴시러웠다. 명확하게 갑과 을이 명시되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상하관계는 좋다. 해적질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상하관계가 명확하다는 것이었으니까.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것 역시 흡족한 점 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 줄에 잰 듯한 또렷한 관계가 마음에 들었던 건데, 시류는 얼굴을 구기고 위타드를 못마땅하게 내려다봤다.
 
 
 
흰 가면, 양의 상태를 드러내고 있는 그 가면 위로 당장 피를 쏟아부어서라도 검게 물들이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평소'의 그 냉정하고 차분한 상태로 돌아올까 싶은 미약한 기대감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각자 생각하고 있는 '평소'의 모습은 다를지라도, 시류는 무심코 음의 위타드를 제멋대로 정상의 기준에 밀어넣고선 생각을 이어붙여나갔다. 그런 의미에서 라피트를 향한 시류의 시선은 도무지 고울수가 없는 것이다.
 
 
 
 
명확한 관계성을 서로 좋아하던 것 아니었나? 왜 이제와서 감정놀음이 하고 싶어진건지. 충직하게 그의 마음을 위해 움직여주는 위타드나, 그런 그를 향해 아끼는 마음을 조심성없이 드러내며 귀애하는 라피트나. 둘 다 당장 해저에 가라앉히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를 치켜든 게 한두번이 아니다. 아, 물론 위타드는 음의 상태로 되돌아온다면 해저에서 꺼내줄 마음은 있었다. 다만 라피트는 아니었다. 아슬아슬하게 감정의 줄 위에서 놀음을 하며 경박스러운 뜀박질을 하는 라피트를, 시류는 백번 양보해서라도 좋게 봐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선만 안 넘으면 되지 않냐며 태연하게 코웃음을 치는 라피트였지만, 글쎄, 시류는 그 선을 끝까지 지키는 놈을 본적이 없었다. ...하물며 자신조차도 확신이 들지 않았으니. 자신이 못했으니 타인도 못하리라는 거만이 뚝뚝 떨어지는 생각이었다. 결국 그들 역시 욕심과 오만으로 가득찬 천부적인 악인이었기에. 다만 그들이 분노하는 것은 천부적인 악인 자신들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와 세계에 못 받아들여졌다는 데에 대한 불만과 시기였다.
 
 
 
 
 
"아, 여기들 모여있었군. 선장이 부른다. 출항 준비를 하라던데."
 
 
 
 
 
어느새 사뿐하게 기척없이 다가온 반 오거의 말에 라피트는 쾌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하다는 듯 양의 위타드를 챙겨 걸음을 옮기는 라피트의 등뒤로 두어걸음 떨어진 채 거리를 유지하며, 시류는 팔짱을 낀 채 문득 물방울처럼 터져올라온 의문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위타드를 볼 때마다, 검은색으로 뒤덮어 자신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꼴을 꼭 보고 싶다는 생각에 대한 의문이었다. 양의 상태일 때에는 부탁조차 하지 않고 고개짓으로만 부리고 있는 라피트를 향한 질투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종류의 마음인 것인지. 시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 마음을 덮어두기로 했다. 만약 후자라면, 심장을 뜯어내서라도 시류는 본인을 납득하지 못할 것 같았다. 감히, 자신이 먼저 규율을 깨고 타인을 사랑하게 될 일은 없을테니까. 그의 자존심과 그의 명예에 그릇된 행동이었기에 시류는 이를 악문 채 그날 밤도 출항 준비로 분주한 도크 Q를 반쯤 협박하여 심리 상담을 빙자한 이야기를 나누어야했다. 그리고 그날 도크 Q는 자신이 왜 연애 상담을 하고 있는 것인지 새벽녘에 다 지나도록 한숨과 함께 답답한 마음에 탄산수만 들이켜야했다. 차라리 바다에 빠지는 게 나을 정도로 답답한 인간들이었다.
 
 
 
 
 
 
"....위타드. 오늘 상태는?"
 
 
 
 
 
빤히 까만색 가면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물어보는 저의는 과연 언제쯤에나 알아차릴건지. 저 답답한 곰탱이 새끼들. 도크 Q는 저주같은 한숨을 한번 푹 내쉰 뒤 입가에서 옅은 미소를 지우지 못하고 웃고 있는 시류를 한심하다는 듯 한번 쳐다보고 문을 닫아버렸다. 꼴보기 싫은 건 서로 마찬가지였다. 음의 위타드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려 시류를 바라보고선 한쪽 눈썹을 쑥 밀어올렸다.
 
 
 
 
[음.]
 
 
 
 
음의 상태임을 드러내는 짧은 수화에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는 시류다. 한 사람 가지고 뭐하는 짓거리인건지, 반 오거는 자연스럽게 구겨지려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관리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라피트를 보고 그 노력은 무참하게 깨져버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썩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잔뜩 신경질적인 얼굴로 까만색 가면을 올린 위타드를 불만스럽게 쳐다본 그는 보는 사람이 다 초조해질 정도로 짙은 보랍빛의 지팡이를 타다닥, 갑판 바닥에 두드리며 날카롭게 그들의 주의를 끌었다. 뭐냐고 미처 시류가 입을 열기도 전 빠르게 낚아채듯 입을 열은 것도 명백하게 시비를 거는 어조였다.
 
 
 
 
 
"세상에, 이렇게나 게으른 분들이 제 동료라니 믿을수가 없군요.
 
곧 출항이 머지않았는데 이렇게 태연하게 갑판에서 서로 노을이나 정답게 구경하는 꼴을 보니 오늘의 할일은 출항이 아니라 해적단 내부의 교류회나 친목회라도 되나보죠? 몰랐던 일정인데, 혼자 정하신 일정인가봐요? 선장 명령보다 우선되는가 보죠?"
 
 
 
 
누가보아도 시비를 거는 듯한 말투에 시류가 매끄럽게 뻗은 눈썹을 구기며 시가를 문 입술을 비트는 사이 다시 한번 라피트가 말을 가로챈다. 따지는 듯 시원스러우면서도 날카롭게 쭉쭉 뻗어나오는 신경질적인 말이었다. 작정하기라도 한 듯 독설과 비난에 가까운 비판이 주르륵 쏟아져 흘러내린다.
 
 
 
 
"둘이서만 나누는 친목회라니 아주 정답네요. 할일이 그렇게 없으신가요, 시류 씨? 방해하는 꼴이 되어 조금도 미안하지 않지만, 슬슬 출항을 준비해야하니 제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서 할일이라는 것을 할 지능을 갖추는 건 어떨까요?
 
없으시다면 유감이지만, 그럼 최소한 짐승 새끼가 아니라 사람 거죽을 뒤집어썼으면 예의라는 건 좀 갖추어달라고요. 제가 대단한 것을 요구한 모양인가 봅니다?
 
출항 준비를 대체 어떤 배에서 항해서 혼자 한답니까? 어디 이틀이나 사흘이 지난 후에야 멋대로 출발해서 어디로든 가도 좋다면 어디 그렇게 해볼까요? 다같이 심해에서 캡틴 존의 보물이라 찾아보자고요. 시류 씨는 몸이 무거우니 덕분에 보물을 잘 찾겠네요! 호호!!"
 
 
 
 
입을 열 틈도 없었다. 무작정 말에 얻어맞기만 한 시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반박하려던 찰나 라피트는 상쾌하다는 듯 빙긋 호선을 그린 입가로 순식간에 다시 전망대와 항해실로 올라가버리는 꼴이 꼭 잔뜩 쪼기만 하고 쏙 올라가버리는 저 불썽사나운 새를 언젠가 날을 잡아 반드시 족쳐버리겠다고 다짐을 되새기는 사이, 시류는 라피트가 교묘하게 위타드를 피해간 비난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러나 저러나, 결국 이런 면으로는 눈치가 죽었다 못해서 이미 해저에 가라앉다 못해 풍랑에 아예 해져버린 수준이었다. 반오거는 그날 술을 깠다. 도크 Q와 나란히 저들의 연애 사정에는 참여하고 싶지 않다며 한숨을 푹 내쉬었고, 바제스는 그런 그들의 대작對酌에 고개를 기울이며 근데 누가 해적단 내에서 연애를 하는 거냐 천진난만하게 물었고 그날 둘은 바제스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정중하게 티치를 찾아가야했다. 당연하게도, 티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둘을 바라보며 바제스 살해는 당분간은 좀 미루어두라 달래주었다.
 
 
 
 
 
[5번선 대장. 책임. 회피. 나. 이유. 의문.]
 
 
 
 
 
와중에 자신은 왜 그런 책임을 묻지 않는건지 정말로 궁금하다며 찾아온 위타드에 오거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러한 상담을 맞이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곘거니, 체념했다. 라피트는 한바탕 시류에게 화풀이를 끝내고 상쾌해진 듯 더이상 도크 Q를 괴롭히지 않았고 대신 그는 잔뜩 성이 난 시류를 맞이해야 했다.
 
 
 
 
 
"라피트만 보면 속에서 뜨거운 게 치밀어오르는 것 같다."
 
"홧병입니다."
 
"라피트만 보면 심장이 빠르게 뛰고 머리에 피가 몰린다."
 
"홧병입니다."
 
"라피트만 보면 손끝이 떨릴 정도로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는다."
 
"지독한 홧병이네요."


 
 
 
 
결국 같은 질문을 서너개 반복하고서야, 시류는 그날 홧병을 가라앉히는 약을 얻어갈 수 있었다. 그날 밤, 출항 준비에 열중한 라피트가 보조를 해달라며 위타드를 멋대로 불렀고, 시류는 항해실로 향하는 위타드를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 가벼운 노크 소리가 울린 뒤 들어오라며 경쾌하게 노래하듯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그 문이 열리자 위타드를 발견한 라피트가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어머, 2번선 대장은 초대한 적이 없는데요."
 
"....보조라면 오히려 내 쪽이 더 좋을텐데."

 
"제가 부른 목적은 보조도 있지만 다른 목적도 있었거든요."
 
 
 
 
 
예를 들면 오늘 새벽이 지난 뒤에 위타드가 음의 상태일지, 양의 상태일지 결정짓는 것 같은? 라피트의 태연하고도 매끄러운 말에 시류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위타드를 편리한 도구 취급하지 말도록, 짧은 경고가 으르렁거리며 낮게 흘러나오자 라피트는 코웃음을 친다.
 
 
 
 
 
"누가 할말을? 서로 각자 원하는 게 뚜렷한데 혼자만 위선을 떠시는군요. 가증스럽게도."
 
"난 위타드를 편리하게 생각한 적 없다. 녀석은 동료이지."
 
"예에, 뭐, 그런 걸로 하자고요. 편리한 <동료>."
 
 
 
 
어깨를 으쓱이고선 키를 잡는 라피트를 노려보며, 시류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팔짱을 꼈다. 음과 양의 상태가 결정되는데에 둘의 의지는 단 하나도 상관이 없었음에도, 이따금 그들은 되지도 않는 아집을 부리곤 했다.
 
 
 
익숙하게 심드렁한 얼굴로 라피트를 도와 키를 고정시키고 지도의 방향을 돌려주며 위타드는 그들을 응시했다. 양이라, 음의 위타드는 양의 상태를 썩 좋아하지 않았기에, 얼굴을 찡그린 채 둘을 바라보았다. 사실상, 그들의 속셈은 딱히 숨겨질 의도도 없었기에 빤하게 드러나곤 했다. 라피트는 위타드를 귀애하며 자신의 총애에 따라 움직여주기를 바랐고 시류는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러나 반대로 음의 상태로 그들의 앞에 등장하면 시류는 미묘하게 만족해하는 태도를 보이며 라피트와 달리 자신을 제법 아끼는 모습을 보이니. 위타드는 가볍게 고개를 돌리며 샛별이 떠오른 고즈넉한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그에게는 썩 나쁘지 않은 관계였다. 쌍방으로 귀애하며 적당히 벌어진 이 거리감각이, 관계의 미묘함과 교묘하게 다른 감정으로 변질될 듯한 이 오싹한 귀애가 마음에 들었다.
 
 
 
 
아슬아슬하게 깨질 듯한 빙판 위에 선 것처럼, 끊어질 듯한 줄 위에 뛰어오른 것처럼.
관계란 이 정도면 각자 적당한 거리감이었다.
 
 
 
위타드는 그 거리를 늘릴 마음도, 줄일 마음도 없었다. 그리고 그건 항해실에 본의 아니게 모이게 되어버린 두명 역시 같은 생각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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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_RI1
 
*캐슬 팬픽
*ver. 신태진


글을 써보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칼끝에서 죽어간 자들의 이름을 써보자, 다음에는 사연을, 그 다음에는 그들의 이야기를, 그 다음에는 내가 그들을 죽인 이유를. 내가 죽인 생명의 무게에 짓눌려 그날도 이루지 못한 긴 밤의 끝에서, 문득 그는 그러한 생각을 했다.
 
 
 
 
그리하면 비로소 그들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괴로운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수로써 삶을 살아가기로 택한 자신의 선택이 옳았노라고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은 자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대감 속에서 적어내려간 활자들은, 영 달랐다. 그가 가끔씩 지나가면서 보았던 활자들 안의 이야기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자신이 죽인 자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죽은 자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일까. 작가의 활자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숨쉬던 누군가의 이야기와 달리 그의 글은 고해성사처럼 담백하고,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활자 안에서, 마치 박제된 것처럼 지독할 정도로 숨막히는 고요를 자랑했다.
 
 
 
 
이대로 차라리 죽여달라고 부르짖는 듯한 자신의 글 안에서, 신태진은 잠시 입을 다문 채 자신이 끊어낸 삶에 묵념했다. 누구를 위한 애도일까, 남겨진 자들을 위한 애도일까, 아니면 떠난 이들을 위한 애도일까. 적어도 자신의 애도는 그들처럼 숭고한 뜻을 지니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문득 그의 가슴 속에서 서늘하게 들어찼다. 첫 글자를 적어내려가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대부분 그렇듯, 처음이라는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꽤 깊은 뇌리에 남겨져버리지 않은가. 신태진은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이, 자신이 죽인 첫 사람의 이름을 적어내려갔다. 그의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자신이 명령을 받고, 지시에 따라 망설임없이 끊어냈던 첫 숨을 힘주어 써내려갔다.
 
 
 
 
첫번째 페이지가 완성되었을 때에는 썩 괜찮았다. 두번째, 세번째, 점점 늘어나는 사연과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 그의 노트에 천천히, 바닷물이 차오르듯 채워지기 시작했다. 까아만 잉크가, 조금씩 하얀 노트 위로 찰랑거린다. 그 넘치는 듯한 파도가 막힌 것은 그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을 죽였던 때로 돌아가야 했다. 더이상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의 사연이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이 죽인 사람의 이야기가, 흐릿하게 빗바래진 기억 사이로 흘려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마침내 비로소 세상이 무너지듯 절망했다.
 
 
 
 
 
아.
나는 이제 그들의 죽음을
이해할수도 없게 되었구나.
 
 
 
 
 
기회를 스스로 내던졌다는 죄악감이 자신의 목을 죄이는 순간 그는 불현듯 웃음을 터뜨렸다. 삭막한 방안,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서 그의 웃음소리가 공허하게 울려퍼진다. 만일 정말 귀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의 방안은 아마도 만석이었을테니. 문득 그런 허접한 상상을 하며, 신태진은 허파에 바람이 뚫리고 폐가 아프도록 공기를 채워넣고 다시 터뜨리듯 내뱉으며 웃었다. 겨우겨우, 숨을 쉬는 것보다 더 버겁게 터뜨린 웃음이 갑작스럽게 터진 것처럼 허무하게 사그라든다. 
 
 
 
 
이게 무슨 꼴이지. 허탈하게 내뱉은 한숨이 미친 웃음소리의 끝을 흐리며 내뱉어질 때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의 엉망이 된 손을 시야에 담았다. 잉크가, 흘러내리고 엉망이 된 손이다. 정갈하게 적어 내려갔던 첫 페이지와 달리 이제는 절규에 가깝도록 흐트러진 글씨가 자신의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해 부끄러움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사람이란 이다지도 많은 감정이 찰나에 스쳐지나가는 생물인데, 그들의 마지막 순간에는 어떠한 감정을 품었을까. 그는 문득 그들이 누리지 못했을 또다른 감정들이 아쉬워져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손을 저주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사랑으로 살아가지 않는가?
 
 
 
 
 
타인이 찾아낸 정답을 움켜잡은 채 신태진은 오래되고 낡은 한숨을 내뱉었다. 입에 거미줄이 엉키고 바짝 마른 듯한 음성이 유리조각을 삼킨 것처럼 거칠게 입안을 맴돌았다. 그 날카로운 빗면과 파편에 입과 혀가 모조리 베여 피가 흘러내리는 감각이 이토록 선명하거늘 어째서 입을 열면 변함없는 혀와 고르게 자리 잡힌 치아가 자신의 시야에 담기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하여 그는 노트를 덮기 전 자신의 심정을 적어보기로 결정했다. 앞장에 즐비하게 쓰인 수많은 기록들은 단순한 보고서만의 의미도 못 되었기에, 그는 자신의 심정을 적어내려가기 위해 만년필을 들어올렸고, 고급스러운 무늬가 새겨진 금빛 펜촉을 노트에 내려놓는 순간 새카만 웅덩이가 만들어지도록 첫 음절조차 적지 못했다. 무얼 써야하는가?
 
 
 
 
도대체 이 살인귀의 심정이, 이 악마의 이야기가 누가 궁금하다고.
 
 
 
 
무엇을 써야한단 말인가. 이것이 의미가 있는가? 자신조차 확신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검은 잉크가 노트의 한 페이지를 모조리 새카맣게 채우도록 멍하니 펜끝을 맞대어놓은 채 미동조차 않았다.
 
 
 
 
 
 
비로소
그는 자신이 누구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이 무엇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악마라고 손가락질을 받기에 그가 품은 죄책감이 너무 컸고 살인귀라 가리켜지기에는 자신이 너무 비참하였으니 신태진, 그는 다시 한번 낡고 엉망이 되어 헌것처럼 버려진 제 이명을 주워 올려야했다. 청소부. 자신이 없애는 것은 그저 단순히 더러운 것을 치우는 일이라고 되내이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검게 물들어버린 노트의 페이지를 내려다보며, 신태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끝으로 집어 올린 노트를 망설임없이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며, 그는 마지막 위선으로 남은 십자가에 잠시 입을 맞추었다. 새벽이 밝아오기 전이었다. 어슴푸레한 푸른빛이 감도는 거리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으며, 그는 오늘도 자신의 일과를 위해 조각낸 달의 파편을 쥐었다.
 
 
 
붉은 과실을 따러 가야할 시간이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과실을 따러 가야할 시간이었다.

'𝐂𝐀𝐒𝐓𝐋𝐄 > 𝙎𝙝𝙤𝙧𝙩 𝙀𝙥𝙞𝙨𝙤𝙙𝙚' 카테고리의 다른 글

  (0) 2024.09.12

W.MOMO
 
*커미션 글입니다.
*TYPE B


 
"로제프가 존이랑 싸운다는데."
 
 
 
 
 
심드렁하게 내뱉어진 문장에 한 사내가 고개를 들어올린다. 검은색 페도라 너머로 밝은 햇빛이 부드럽게 온몸을 덮은 흰 붕대 위로 어른거린다. 관심 있어? 딱히 기대조차도 하지 않는다는 듯, 툭 떨어진 제안에 커피 역시 시선을 다시 책으로 옮기며 말없이 제게 말을 건 해적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넘긴다. 싸움은 흔했고, 유달리 재물에 대한 탐욕이 큰 존에게 도전하는 머저리들 역시 이 배에서는 수두룩했다. 그다지 큰 흥미를 끌지 않는 말이었고, 그 말을 내뱉은 해적 역시 커피의 반응을 기다리지는 않았다며 고급스러운 테이블 위로 턱 더러운 팔을 올리며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인다.
 
 
 
 
 
"내기도 안하는건가? 벌써 링링은 존에게 올인했어."
 
 
 
 
 
답은 없다. 험상궂게 생긴 해적은 커피의 무반응을 익숙하게 넘기며, 턱을 괸다. 아침부터 벌어진 동료살해사건과 함께 저녁에 올라올 새로운 매치업까지 주르륵 읊어주던 해적이 입을 딱 다문 것은 뉴게이트의 그림자가 전망 좋은 갑판 위로 드리우고서였다. 큰 덩치와 함께 위압감이 느껴지는 무거운 분위기에 슬그머니 해적의 시선이 올라가며 뉴게이트의 얼굴에 닿는다.
 
 
 
 
 
"...뭐, 아무튼 그렇다고. 다음번에도 잘 이용 부탁해?"
 
 
 
 
 
당연하게 커피의 앞자리로 다가오는 그에게, 자리를 비켜줄 심산인지 냉큼 새하얀 테이블에서 팔을 치운 해적이 허겁지겁 의자에서 일어선다. 기다렸다는 듯 뉴게이트가 싸늘하게 해적을 내려다보고, 커피는 티팟 옆에 놓인 조그마한 돈주머니를 손끝으로 까닥인다. 정보값으로 놓인 소소한 금액을 탐욕스럽게 낚아채며 내일도 이용해달라 외친 해적이 히히덕거리며 동료살해 내기판에 뛰어드는 것을 멸시의 눈초리로 바라본 뉴게이트의 시선이 미끄러지며 커피에게 닿는다.
 
 
 
 
 
 
"내기할건가."
 
 
 
 
 
 
줄곧 답없던 커피의 고개가 드디어 움직임을 보인다. 짧은 그의 첫마디에 커피의 시선이 붕대 안에서 부드럽게 그에게로 닿는다. 평온하게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다물린 입이 벌어지며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울린다. 적당히 낮고, 부드럽지만 고와 얼핏 듣기에는 커다란 새가 우는 듯한 울음소리를 닮은 목소리였다.
 
 
 
 
 
 
"글쎄."
 
 
 
 
 
 
그게 커피의 오늘 하루 첫마디였다는 것을 알까. 그 귀한 목소리를 위하여 줄곧 아껴두고 있었음을 알까. 진한 자홍빛 눈동자에 오롯이 그가 담기는 순간 비로소 붕대 안에서 풀린 얼굴로 한껏 온화해질 수 있음을 그는 알까. 소소한 의문을 묻은 채 커피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지어진다.
 
 
 
 
뉴게이트는 커피의 한마디에 기가차다는 듯 허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린다. 둘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갑판의 난간으로 향한다. 곳곳에 피가 튀어있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 이유는, 아마도 피가 튀는 즉시 커피가 손끝으로 나비를 일으켜 깔끔하게 지워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전망이 가장 좋다는 이유 하나로, 커피는 그 자리를 사수하며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싸움을 금하곤했다.
 
 
 
 
그렇게 사수한 자리는 커피가 권력을 휘두르고 힘을 쓸만큼, 훌륭한 풍경을 선사해주었다. 짙은 고동색의 난간, 자세히 바라보면 은근 고풍스러운 디자인으로 깎인 난간의 구멍들 사이로 보이는 눈이 부시도록 푸르른 바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줄만큼 시린 하늘과 빙산을 닮아 보는 이의 마음에 이는 파문을 잠재울만큼 고요한 수면이 끝내주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좋은 분위기로군."
 
"그러니 내가 사수하는 것이지. 이곳에서 보는 풍경은 몹시도 아름답거든. 노을이 질 때에도, 여명이 올라올 때에도."
 
".....널 닮아 그러한가보군."
 
 
 
 
 
 
머뭇거리며 완성된 문장에 커피의 눈이 커졌다가, 천천히 휘어진다. 이 상식없는 배에서 뉴게이트는, 없는 말을 내뱉지 않는 사람이었다. 빤한 말이라고 하여도 그에게서 나온 말을 듣는 것은 느낌이 다른 이유였다. 자신을 닮았다는 말에 커피의 분위기가 누그러지는 것을 견문색으로 느끼며, 뉴게이트 역시 수줍게 고개를 돌리며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고자 애쓰듯 입을 곧게 다문 채 우물거렸다. 살짝 달아오른 볼은 강한 빛 때문에 그러하지는 않으리라. 다량의 해수가 물살을 가르는 배에 저항하듯, 부드럽게 한번에 몰려오며 뱃전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거의 살아온 생애의 절반을 바다에서 지낸 바닷사람들이 듣기에도, 기분 좋은 소리였다.
 
 
 
 
 
 
"글로리오사가 네게 고백했다던데."
 
 
 
 
 
 
파도가 두어번 쳤을까. 평화롭던 분위기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에 뉴게이트는 헛숨을 들이키며 급하게 기침을 쏟아냈다. 사레가 들려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기침을 내뱉는 그의 반응을 태연하게 무시하며, 커피는 활기찬 제 동료를 떠올렸다. 그녀는 꽤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는 편이었으며 상식없는 와중에도 눈은 높았던 해적들이 침만 꿀꺽 삼키며 눈을 돌리기에 급급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와중 자신의 낭군을 찾겠다며 이리저리 눈돌리고 쓸만해보이는 남자를 찾아 나서는 그녀의 적극적인 태도 역시 일상에 가깝다는 것도, 그 사실을 굳이 지적해주지 않은 채 커피의 시선이 파란 없는 수면 위에 고정된 채 뉴게이트의 반응을 기다린다. 하여 너는 긍정하였던가 부정하였던가. 그 대답에 자신은 어찌 반응할지, 그 반응을 이리 초조하게 기다리는 자신조차도 이해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커피는 자신의 얼굴을 모조리 가린 붕대에 잠시 감사함을 표했다. 약간의 시간을 들여 발휘해준 인내심에 대답한 것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랬지."
 
 
 
 
 
 
 
담담하기 짝이 없는 긍정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담백한 반응에 비로소 커피가 고개를 돌려 뉴게이트를 먼저 바라본다. 그 반응이 기뻐, 뉴게이트의 굳게 다물린 입가가 미묘하게 올라간다. 질투하는가? 그 짧은 질문이 입가에서 얼마나 맴돌았을까, 결국은 끝내 내뱉지 못한 채 쓰게 입안으로 삼킨 뉴게이트의 노오란 눈동자에 커피의 심기 불편한 시선이 닿는다.
 
 
 
 
 
마치 그게 끝이냐고 묻는 것처럼 빤히 고정된 시선에 뉴게이트의 유리를 닮은 눈동자가 능글맞게 휘어진다. 먼저 묻기 전까지는 답하지 않겠다는 듯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가에 결국 커피의 입에서 기어코 질문이 튀어나온다. 여러모로, 제게만 궂은 장난을 걸곤 하는 그가 밉지는 않았다.
 
 
 
 
 
 
 
"받아주었는가?"
 
"글쎄, 아직 고민중일세."
 
 
 
 
 
 
커피를 놀리듯 나온 대답에 커피의 미간이 미묘하게 일그러진다. 늘 전전긍긍해하는 입장에서 여유를 갖고 놀리는 입장으로 바뀌니 제법 즐거운 듯, 뉴게이트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걸린다. 즐거워 죽겠다며 대놓고 숨기지도 않는 표정에 커피의 눈꼬리가 못마땅하게 올라간다. 사람 갖고 놀기는, 짧게 혀를 차며 악취미라 중얼거리는 커피의 반응에 뉴게이트가 어이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비죽, 입술을 내민다.
 
 
 
 
 
 
 
"자네가 하던 것과 다를바가 없다만."
 
"지금 그 말은 내가 그대를 갖고 놀았다는 뜻인가?"
 
"그럼 아니었나?"
 
"그대는 갖고 놀기에는 재미가 없어서, 굳이."
 
 
 
 
 
 
충격에 휩싸이는 얼굴을 보며, 커피는 필사적으로 올라가려는 입꼬리에 힘을 주어 내려야만했다. 이러니 놀리는 것을 그만둘수가 없지. 확실히, 뉴게이트와 커피는 유독 서로에게만 반응이 후하곤 했다. 지금도 보라, 어떤 비난을 듣고 어떤 비판과 무자비한 폭설을 들어도 심드렁하기만 하던 뉴게이트가 커피의 한마디 한마디에 세상이 무너진 표정을 지었다가 툴툴거리며 투정도 부린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욕설을 퍼붓던 모욕적인 언사를 쏟아내던 듣고는 있나 싶을 정도로 무관심한 반응을 하는 커피는 현재 붕대 안에서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내고 있다. 적어도 둘은,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품던 그것을 부정할 사람이 아니었다.
 
 
 
 
 
 
 
"너무하는군."
 
"사과하지."
 
"됐어, 뭐 그런 거에 일일이 삐지겠나. 애도 아니고."
 
 
 
 
 
 
 
고개까지 홱 돌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애다만. 그 말은 꼭꼭 접어 입안으로 밀어넣으며, 커피는 다시 한번 눈까지 질끈 감으며 급하게 웃음을 참았다. 너무 삐지게 만들었나, 이제 달래주려고 입을 연다. 옅은 체리빛을 머금어 탐스러운 입술이 벌어지고 노련한 목소리가 나오려는 순간.
 
 
 
 
 
 
찌르르ㅡ
 
 
 
 
 
 
눈이 뜨인다. 기분 좋게 후덥지근했던 공기와 그것을 식혀주듯 서늘하게 불어왔던 바람이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진다. 등뒤에서 들리던 요란한 동료들의 웃음소리와 술잔을 부딪히며 경쾌하게 퍼지던 농담들이 흩어진다. 어디로 눈돌리기만 하면 새파랗던 풍경과 보석보다 더 찬연한 빛을 머금고 있었던 푸르름도 역시 없다. 고개를 돌리면 늘 그렇듯 테이블에 앉아 나직한 미소를 짓고 있는 네가 없다. 찻잔을 들어올리고 해적답지 않게 고상한 취미를 섭렵하고 있던 네가 없다. 널 닮아 창백하지만 언뜻 청량한 색채를 머금은 다기잔을 들어올리고 있는 네가 없다.
 
 
 
 
 
 
하늘에 찬란하던 푸르름은 어느새 어둑해진 밤으로 뒤덮여있었고, 소란스럽던 주변은 어느새 풀벌레 소리와 풀밭을 스치는 바람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린다.
 
 
 
 
 
 
좋은 꿈을 꾸었다. 간만에 네가 나오는 꿈이었다.
 
 
 
 
 
배에서 내렸던 때도 아니고, 포악하던 선장이 죽은 그날의 꿈도 아닌 네 꿈을 꾸었다. 실로 지옥도와 닮았던 그날의 전쟁도 아닌 네 꿈을. 실로 간만에 맞이한 평온하기 짝이 없던 꿈이었음에도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는 이유는 분명 그 꿈이 행복하였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는 방법 중 하나로는 행복한 꿈에서 깨어나도록 하는 방법이라더니. 뉴게이트는 헛웃음을 지으며 떴던 눈을 돌려 창가에 비추어지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꿈결의 자락이 아직 남은 듯, 등뒤로 아직도 네가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차라도 한잔할텐가, 실없는 소리로 나는 입에도 대지 못할 독차를 권유하고는 장난스럽게 웃었던 네 목소리가 아직도 울리는 것 같았다.
 
 
 
 
 
그리움은 늦다. 후회만큼이나 늦었다. 우리가 조금 더 솔직했다면 달랐을까. 대놓고 함께하자 손을 내밀고 가자 말하였다면 달랐을까. 그럼에도 끝내 바라보고 있던 방향이 달라 헤어졌을까. 뉴게이트는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내 숨은 네 호흡보다 더 가치있었을까. 대체 왜 너는 나를 두고 그리 수월하게도 떠났다.
 
 
 
 
 
쏴아아.
 
 
 
 
이 손길마저도 너를 닮았다. 바닷바람을 품어 짠 향을 머금고 나보다 더한 수라를 거쳐온 주제에 홀로 고고하게 핀 꽃처럼 슬쩍 내민 손길을 닮았다. 홍차의 향과 자주 마시던 독차의 코끝 아릴 정도로 단 향이 뒤섞인 그 향이 지독할 정도고 그립게 가슴을 후벼판다. 시린 은빛을 머금고 반들거리는 저 꽃이 너를 닮았다. 보라색과 붉은색 사이 그 위험한 색을 닮아 섣불리 다가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시선도 떼지 못할 정도로 매혹적인 너를 닮았다.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이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웃음짓는 너를 닮았다.
 
 
 
 
 
뉴게이트는 천천히, 창가의 책상에 앉는다. 그 위에 올려진 티팟에 담겨있던 차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미리 만들어둔 것인지 아니면 의욕을 잃어버린 자신을 위하여 살려낸 자식들이 두고 간 배려인 것인지. 식은 티팟에서 홍차의 향이 흙냄새에 얽혀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허무하게 웃는다. 결국은 모든 것은 전부 다 흩어지고, 흐릿해지며 색을 잃기 마련이었다. 한때에는 싱그럽게 녹음을 머금고 있던 갈대가 시간이 지나면 옅은 금빛으로 물들어지듯이. 영원한 것은 없다. 그 사실을 뼈져리게 알고 있음에도 어째서 또다시 헛된 희망을 품었던가, 너는 틀리지 않고, 너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기억만큼은 이토록 추억이 되지 못하고 생생하게 살아숨쉬는가. 아직도 눈을 뜨면 이 바다 너머에 네가 있을 것 같고, 해군에서는 지긋지긋하게 네 행적을 샅샅이 파헤쳐 신문 한 구석에 반드시 끼워넣었을 것 같다. 여느날처럼 네 소식을 신문에서 읽고 그런 사고를 치기 전에는 먼저 얘기해달라며 픽 웃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게 답장을 기대하지 않은 편지를 보낼 것 같고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진부한 인삿말이 적힌 전화를 나직하게 몇번이고 중얼거리고 실없이 웃었을 것 같은데.
 
 
 
 
 
하필이면 네가 이 세상을 떠난 날이 겨울이었기 때문일까. 봄이 오지 않았다. 언 땅이 녹고 새순이 돋아 이제는 녹음을 머금어야 하는 땅이 아직도 겨울처럼 창백하기만 한 땅이다. 눈앞에 즐비하게 놓은 녹음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다. 뉴게이트는 고개를 돌려 창틀 너머로 붉고 푸른 빛을 섞어 머금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날과 똑같은 풍경이었다. 네가 죽었던 그날, 나는 울지 않았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몇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전화가 울릴 것 같았으니까. 전화를 들어올리면, 그럼 우리는 다시 과거를 얘기하고, 미래를 가늠했다가 결국 푸스스하게 웃어버리고 끝나는 그런 실없는 이야기를 하겠지. 뉴게이트의 손끝이 천천히 떨린다.
 
 
 
 
 
 
쨍그랑. 데구르륵... 
 
 
 
 
 
창가에 놓인 꽃병이 깨진다. 안에 담겨있던 자홍빛의 꽃이 짓이겨지고 썩어 말라있다. 군데군데 깨져 뭉텅이가 진 고급스러러운 다기가 언뜻 자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는 몹시도 단단해보이고 깨끗하지만 막상 손을 대면 너무나도 쉽게 깨질 수 있는 한없이 연약하기만 한 것. 금이 가는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는 추락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진실이란 이토록 가혹하다. 유독 이 세계는 그에게 환히 긍정했던 적이 없었기에, 가혹하게 들이밀었던 운명들이 수월하게 넘어가주었기 때문일까, 이번 한번만큼은 미친 척 달려들었다면, 그러했다면 너는 살았을까.
 
 
 
 
 
 
네가 없는 세계에서
내가 살아갈 가치가 있을까.
 
 
 
 
 
앞으로 다가올 모든 계절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봄이 오면 자주빛으로 피어날 꽃을 보며 널 떠올릴 테고, 여름이 되어 소낙비가 내린다면 풍랑을 함께 헤치며 나아갔더너 네가 떠오를테고, 가을이 되어 단풍이 지면 붉고 탐스럽던 단풍보다 더 붉고 검은 피를 흘리며 마지막 숨을 쉬었던 네가 떠오를테니까. 영원히 겨울일 터였다. 분명 그러해야할 터인데. 손끝이 아릴 정도로 시리고 추워 눈물이 쉼없이 흐르는 것이 옳아야하는데.
 
 
 
 
 
 
 
너는.
살아있었던 너는.
살아있었을지도 모르는 너는.
 
 
 
 
 
 
분명 내 꼴을 보며 뭐가 그렇게 문제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리고선 손을 펼쳤겠지. 네 품안에 기어가듯 그렇게 머리를 박으면, 그때에는 고양이를 쓰다듬듯 나른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선 너답지 않다는 단조로운 감상평만 남겼을 터였다.
 
 
 
 
 
 
 
"....에스프레소."
 
 
 
 
 
 
그러니 그리움은 여기서 끝내는 게 맞다. 너라면 분명 내가 없는 세계에서도 잘 살아냈을터니까. 네 곁에 서기 위해서는 최소한 모습이라도 같아야하지 않겠나. 너는 울지 않는 사람이다. 너는 내가 없는 세계에서도 담담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내 생을 채워나갈 사람이니 버겁더라도 나 역시 생을 살아가야겠지. 뉴게이트의 눈가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해가 지는 줄 알았는데, 새로운 날이 되고 있었다. 은빛이 사라지고 금빛으로만 찬란하게 펼쳐지는 스핑크스 섬에 아침이 오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부정해도 결국 시간은 흐른다. 언 땅은 아무리 애를 써봐도 결국 녹을 터였고, 아무것도 심지 않은 땅에서 억척같이 잡초가 피고 그 위로 벌레가 꼬여 기어코 꽃이 고개를 치켜들 터였다. 그게 자연이니까, 그게 순리이며 운명이었으니까. 하여 뉴게이트는 고개를 치켜들고 동터오는 순간을 바라보았다. 밤은 지났다. 이제 단 꿈에서 깨어나야할 시간이었다.
 
 
 
 
 
 
 
 
비로소 네가 없는 봄이 왔다.
네가 없는 첫 봄이었다.
 
 
 
 
 
 
겨울보다 더 서럽게 다가올 봄이었다. 그러한 봄을 몇번이고 맞이하며, 이번에는 어떤 계절을 사랑하게 될지, 어떤 계절에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지. 기어코 나는 겨울에서 벗어나지 못할지. 뉴게이트는 몸을 일으켜 문을 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세상으로 나아가야할 시간이었다. 네 곁에 서기 위해 다시 한번 더 살아가야할 순간이었다. 네가 대신 이어놓은 내 호흡이 벅차오르도록 낭비조차 허용하지 못할 순간이었다. 찬연한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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