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MOMO
*커미션 글입니다.
*TYPE B
사랑.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며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감정. 또는 그러한 관계나 사람을 의미하는 말. 라피트는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물끄러미 시선을 들어올렸다.
타칭ㅡ 예를 들자면, 바제스처럼 천박한 동료의 말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뱀처럼 새카만 눈동자 위로 희고 고운 머리카락을 흔들거리는 존재가 자신의 시선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용케 가면 너머의 그 조그마한 틈으로 눈동자를 굴려 자신만큼이나 복잡할 활자들을 읽어내려가던 시선이 자신에게 닿았을 때의 그 선뜩한 감각이란.
라피트는 혀를 짧게 차며 슬그머니 소름이 돋은 팔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부드러운 천의 재질이 라피트의 소름을 어느 정도 가라앉혀주었다. 짙게 풍겨오는 바닷바람과 짠향에 고개를 들어올려 저도 모르게 수평선을 찾아 눈을 돌리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본능에 새겨진 항해사의 감각 때문일지도 몰랐다.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미지를 찾아 헤메는 지식인의 사명 같은 것. 라피트는 자신의 무지에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저 기특한 존재를 향한 마음은? 라피트는 스스로에게 내던진 의문에 미간을 좁히며 부지런히 자신의 지식 안에서 적당한 단어를 찾아 머리를 굴려보았다. 자신이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은 없었으니 이번에도 시간이 걸리겠지만 확실한 정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과 오만에 뒤덮인 생각이었다.
친애? 그런 말랑하고 허접한 단어로는 표현하지 못했다.
다정? 정이라는 옅고 흐릿하기 짝이 없는 마음은 애초에 허무하며 실존치 않는 것이다.
라피트는 적당한 단어를 그 외에도 몇개를 떠올려냈지만, 위타드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을만한 단어를 찾기에는 모조리 적당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한번 미간을 구겨버렸다. 내가 정의하지 못하는 것은 없어야하는데, 불만과 함께 얼굴을 구기고 있던 그를 깨운 것은 어느새 기척없이 다가온 위타드의 가벼운 손끝이었다.
[고민. 의문.]
간단하게 표현하는 손짓에 라피트는 잠시 멈칫하였으나 이내 보랏빛 호선을 입가에 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금방이라도 독을 물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목덜미에 박아넣어도 모자라지 않을만큼 잔인한 미소였으나 그마저도 기쁜 듯 위타드는 기분 좋게 어깨를 살짝 흔들며 웃음을 터뜨렸다. 미세한 동작이었다. 그러한 동작에 제법 아끼는 마음이 드는 건. 아, 마침내 라피트는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 종류인지를 깨닫고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귀애貴愛.
그것인 귀애였다.
기특하여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제 말 한마디에 가슴 설레하고 색이 옅은 머리카락을 흔들거리며 웃음을 터뜨리는 그를 어여삐 여기는 마음. 그럼 그렇지, 역시 사랑이나 친애 같은 웃기지도 않은 말랑한 마음은 아니로군. 라피트는 자신의 확고한 선에 스스로 만족하며 위타드에 대한 감정을 정리했다.
자신은 다른 오만하고, 멍청한 해적들과 다르다고 여겼다. 그야 물론 선장은 그린듯이 완벽하게 천박하고 강한 해적이었지만, 자신은 달랐으니까. 라피트는, 스스로가 생각해두고 정교하게 짜놓은 프레임 속의 자신은 씻지도 않고 오랫동안 전투에 굶주린 것처럼 적만 보면 눈을 뒤집어까고 달려드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그래, 어여쁜 마음. 딱 그 정도면 적당했다. 부족하지도 않았고 차고 넘치지도 않는다.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고 시키는 일에는 충직할 정도로 그의 심리까지 섬세하게 고려하여 움직여주는 것이 좋았다. 자신이 허락한 말랑함은, 자신이 결정하고 선명하게 그어놓은 선은 그 정도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그 이상을 나아가서도 안될 일이었고, 그 아래로 모자라면 불만스러워질 것 같은 적당함이 라피트의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틀에 들어맞았다.
보라, 천박하고 멍청한 해적들과 달리 자신들은 자유시간이 주어지자마자 스스로를 정돈하기 위해 제각각의 노력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여타 다른 해적들과 달리 술과 쾌락을 향해 손을 뻗고 그 뒤룩뒤룩 살이 찐 배에 기름을 채워넣는 것. 만일 동료라고 할지라도 그런 천박한 종류의 사람이 제 동료로 들어온다면, 라피트는 결단코 그를 좋게 보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적어도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등을 맞댈 동료는, 그처럼 완벽하지는 않아도 최소한 위타드 정도는 되어야했다. 자신의 무지를 수치스러워하고 무능을 모욕으로 받아들여야하는 사람이어야했다. 격이 어느정도는 있어야 했고 품위라는 단어에 대해서 어느정도는 걸맞아야했다. 그런 의미에서 위타드는 라피트의 귀애하는 동료가 되기에 몹시도 충분했다.
[불만. 의문. 라피트씨.]
라피트가 가볍게 손끝으로 건드려 보내는 신호에 고개를 돌려 위타드를 바라보았다. 불만? 아, 그제서야 라피트는 자신의 미간이 아주 조금, 일그러져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조차도 몰랐던 조그마한 불쾌감이었거늘 그 사실을 잽싸게 알아차리고 물어오는 저 사람을 어찌 귀애하지 않겠나? 라피트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경쾌한 리듬으로 바닥을 두드리던 지팡이 딱, 멎는다.
"별거 아닙니다. 그냥... 저 해군의 감시자들이 좀 지긋지긋해졌을 뿐이에요."
기특하지 않은가. 흐뭇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들어 살기어린 눈동자로 해군의 감시자들을 향해 사나운 시선을 던지는 저 모습이 마치 충직하게 제 마음에 들기 위해 꼬리를 치고 이를 드러내는 개 같아서. 라피트는 환하게 웃었다.
"해군을 건드리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다. 적당히 하지 그래."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이대로 해군의 감시자들을 모조리 썰어버리고 그 목으로 공놀이라도 했을 터였다. 저 불쾌한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라피트는 얼굴을 찡그리며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류, 답답할 정도로 꽉 막힌 인간. 라피트는 느른하게 팔짱을 끼며 헛웃음을 지었다. 언제부터 우리가 <규율>을 잘 지켰다고? 선장의 명령이면 모를까, 라피트는 이미 지긋지긋할 정도로 규칙과 규율이라는 것에 학을 떼었다. 그 모든 것에 질리고 질려 결국 선택한 일탈이 이 해적질이지 않은가? 똑같은 신세이면서 자신을 슬그머니 압박하려고 드는 것이 같잖았다. 물론 이 수많은 불만을 입속으로 쓰게 삼키며, 라피트는 이번에도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강자의 말이 곧 절대적인 것 역시 해적의 룰, 라피트는 본인이 아무리 규율에서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정해놓은 틀 안에서 벗어나기는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예, 그러죠 뭐."
해적이 되었다면 해적이 룰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녀석. 시류는 반대로 그런 라피트가 꼴사나웠다. 이미 다 망해버린 마당에 고집처럼 지키는 그 허접한 규율같은 거, 시류는 짧게 혀를 찼다. 우리는 어차피 목줄이 묶인 사람들이란 말이다.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 목줄을 누구에게 쥐여줄 수 있을지에 대한 빈약한 것 하나뿐. 그게 규칙일지, 선장이라는 이름을 하고 있는 압도적인 공포와 유혹에게 쥐여줄 것인지. 시류는 혀를 짧게 차고 금방이라도 라피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달려들고자 하는 위타드의 뒷덜미를 잡아 얌전히 라피트의 곁에 내려놓았다. 잠깐 닿은 것만으로도 싫다고 온몸을 몸부림치며 꼼꼼하게 손수건으로 닿았던 부분까지 닦는 것을 보면 괜히 더 괴롭히고 싶지만. 시류는 라피트처럼 익숙하게 표정과 감정을 지저 아래로 깔아버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쓸데없는 감정놀음은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다만 불만인 것은 양의 상태가 지속되는 위타드에게 향했다. 라피트에게 마음을 빼앗겨 기술을 움직이는 꼴은, 썩 보기에 좋은 광경은 아니었으니까. 그건 꼴사나운 것을 넘어서 보기 힘들 정도로 눈꼴시러웠다. 명확하게 갑과 을이 명시되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상하관계는 좋다. 해적질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상하관계가 명확하다는 것이었으니까.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것 역시 흡족한 점 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 줄에 잰 듯한 또렷한 관계가 마음에 들었던 건데, 시류는 얼굴을 구기고 위타드를 못마땅하게 내려다봤다.
흰 가면, 양의 상태를 드러내고 있는 그 가면 위로 당장 피를 쏟아부어서라도 검게 물들이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평소'의 그 냉정하고 차분한 상태로 돌아올까 싶은 미약한 기대감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각자 생각하고 있는 '평소'의 모습은 다를지라도, 시류는 무심코 음의 위타드를 제멋대로 정상의 기준에 밀어넣고선 생각을 이어붙여나갔다. 그런 의미에서 라피트를 향한 시류의 시선은 도무지 고울수가 없는 것이다.
명확한 관계성을 서로 좋아하던 것 아니었나? 왜 이제와서 감정놀음이 하고 싶어진건지. 충직하게 그의 마음을 위해 움직여주는 위타드나, 그런 그를 향해 아끼는 마음을 조심성없이 드러내며 귀애하는 라피트나. 둘 다 당장 해저에 가라앉히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를 치켜든 게 한두번이 아니다. 아, 물론 위타드는 음의 상태로 되돌아온다면 해저에서 꺼내줄 마음은 있었다. 다만 라피트는 아니었다. 아슬아슬하게 감정의 줄 위에서 놀음을 하며 경박스러운 뜀박질을 하는 라피트를, 시류는 백번 양보해서라도 좋게 봐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선만 안 넘으면 되지 않냐며 태연하게 코웃음을 치는 라피트였지만, 글쎄, 시류는 그 선을 끝까지 지키는 놈을 본적이 없었다. ...하물며 자신조차도 확신이 들지 않았으니. 자신이 못했으니 타인도 못하리라는 거만이 뚝뚝 떨어지는 생각이었다. 결국 그들 역시 욕심과 오만으로 가득찬 천부적인 악인이었기에. 다만 그들이 분노하는 것은 천부적인 악인 자신들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와 세계에 못 받아들여졌다는 데에 대한 불만과 시기였다.
"아, 여기들 모여있었군. 선장이 부른다. 출항 준비를 하라던데."
어느새 사뿐하게 기척없이 다가온 반 오거의 말에 라피트는 쾌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하다는 듯 양의 위타드를 챙겨 걸음을 옮기는 라피트의 등뒤로 두어걸음 떨어진 채 거리를 유지하며, 시류는 팔짱을 낀 채 문득 물방울처럼 터져올라온 의문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위타드를 볼 때마다, 검은색으로 뒤덮어 자신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꼴을 꼭 보고 싶다는 생각에 대한 의문이었다. 양의 상태일 때에는 부탁조차 하지 않고 고개짓으로만 부리고 있는 라피트를 향한 질투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종류의 마음인 것인지. 시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 마음을 덮어두기로 했다. 만약 후자라면, 심장을 뜯어내서라도 시류는 본인을 납득하지 못할 것 같았다. 감히, 자신이 먼저 규율을 깨고 타인을 사랑하게 될 일은 없을테니까. 그의 자존심과 그의 명예에 그릇된 행동이었기에 시류는 이를 악문 채 그날 밤도 출항 준비로 분주한 도크 Q를 반쯤 협박하여 심리 상담을 빙자한 이야기를 나누어야했다. 그리고 그날 도크 Q는 자신이 왜 연애 상담을 하고 있는 것인지 새벽녘에 다 지나도록 한숨과 함께 답답한 마음에 탄산수만 들이켜야했다. 차라리 바다에 빠지는 게 나을 정도로 답답한 인간들이었다.
"....위타드. 오늘 상태는?"
빤히 까만색 가면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물어보는 저의는 과연 언제쯤에나 알아차릴건지. 저 답답한 곰탱이 새끼들. 도크 Q는 저주같은 한숨을 한번 푹 내쉰 뒤 입가에서 옅은 미소를 지우지 못하고 웃고 있는 시류를 한심하다는 듯 한번 쳐다보고 문을 닫아버렸다. 꼴보기 싫은 건 서로 마찬가지였다. 음의 위타드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려 시류를 바라보고선 한쪽 눈썹을 쑥 밀어올렸다.
[음.]
음의 상태임을 드러내는 짧은 수화에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는 시류다. 한 사람 가지고 뭐하는 짓거리인건지, 반 오거는 자연스럽게 구겨지려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관리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라피트를 보고 그 노력은 무참하게 깨져버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썩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잔뜩 신경질적인 얼굴로 까만색 가면을 올린 위타드를 불만스럽게 쳐다본 그는 보는 사람이 다 초조해질 정도로 짙은 보랍빛의 지팡이를 타다닥, 갑판 바닥에 두드리며 날카롭게 그들의 주의를 끌었다. 뭐냐고 미처 시류가 입을 열기도 전 빠르게 낚아채듯 입을 열은 것도 명백하게 시비를 거는 어조였다.
"세상에, 이렇게나 게으른 분들이 제 동료라니 믿을수가 없군요.
곧 출항이 머지않았는데 이렇게 태연하게 갑판에서 서로 노을이나 정답게 구경하는 꼴을 보니 오늘의 할일은 출항이 아니라 해적단 내부의 교류회나 친목회라도 되나보죠? 몰랐던 일정인데, 혼자 정하신 일정인가봐요? 선장 명령보다 우선되는가 보죠?"
누가보아도 시비를 거는 듯한 말투에 시류가 매끄럽게 뻗은 눈썹을 구기며 시가를 문 입술을 비트는 사이 다시 한번 라피트가 말을 가로챈다. 따지는 듯 시원스러우면서도 날카롭게 쭉쭉 뻗어나오는 신경질적인 말이었다. 작정하기라도 한 듯 독설과 비난에 가까운 비판이 주르륵 쏟아져 흘러내린다.
"둘이서만 나누는 친목회라니 아주 정답네요. 할일이 그렇게 없으신가요, 시류 씨? 방해하는 꼴이 되어 조금도 미안하지 않지만, 슬슬 출항을 준비해야하니 제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서 할일이라는 것을 할 지능을 갖추는 건 어떨까요?
없으시다면 유감이지만, 그럼 최소한 짐승 새끼가 아니라 사람 거죽을 뒤집어썼으면 예의라는 건 좀 갖추어달라고요. 제가 대단한 것을 요구한 모양인가 봅니다?
출항 준비를 대체 어떤 배에서 항해서 혼자 한답니까? 어디 이틀이나 사흘이 지난 후에야 멋대로 출발해서 어디로든 가도 좋다면 어디 그렇게 해볼까요? 다같이 심해에서 캡틴 존의 보물이라 찾아보자고요. 시류 씨는 몸이 무거우니 덕분에 보물을 잘 찾겠네요! 호호!!"
입을 열 틈도 없었다. 무작정 말에 얻어맞기만 한 시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반박하려던 찰나 라피트는 상쾌하다는 듯 빙긋 호선을 그린 입가로 순식간에 다시 전망대와 항해실로 올라가버리는 꼴이 꼭 잔뜩 쪼기만 하고 쏙 올라가버리는 저 불썽사나운 새를 언젠가 날을 잡아 반드시 족쳐버리겠다고 다짐을 되새기는 사이, 시류는 라피트가 교묘하게 위타드를 피해간 비난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러나 저러나, 결국 이런 면으로는 눈치가 죽었다 못해서 이미 해저에 가라앉다 못해 풍랑에 아예 해져버린 수준이었다. 반오거는 그날 술을 깠다. 도크 Q와 나란히 저들의 연애 사정에는 참여하고 싶지 않다며 한숨을 푹 내쉬었고, 바제스는 그런 그들의 대작對酌에 고개를 기울이며 근데 누가 해적단 내에서 연애를 하는 거냐 천진난만하게 물었고 그날 둘은 바제스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정중하게 티치를 찾아가야했다. 당연하게도, 티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둘을 바라보며 바제스 살해는 당분간은 좀 미루어두라 달래주었다.
[5번선 대장. 책임. 회피. 나. 이유. 의문.]
와중에 자신은 왜 그런 책임을 묻지 않는건지 정말로 궁금하다며 찾아온 위타드에 오거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러한 상담을 맞이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곘거니, 체념했다. 라피트는 한바탕 시류에게 화풀이를 끝내고 상쾌해진 듯 더이상 도크 Q를 괴롭히지 않았고 대신 그는 잔뜩 성이 난 시류를 맞이해야 했다.
"라피트만 보면 속에서 뜨거운 게 치밀어오르는 것 같다."
"홧병입니다."
"라피트만 보면 심장이 빠르게 뛰고 머리에 피가 몰린다."
"홧병입니다."
"라피트만 보면 손끝이 떨릴 정도로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는다."
"지독한 홧병이네요."
결국 같은 질문을 서너개 반복하고서야, 시류는 그날 홧병을 가라앉히는 약을 얻어갈 수 있었다. 그날 밤, 출항 준비에 열중한 라피트가 보조를 해달라며 위타드를 멋대로 불렀고, 시류는 항해실로 향하는 위타드를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 가벼운 노크 소리가 울린 뒤 들어오라며 경쾌하게 노래하듯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그 문이 열리자 위타드를 발견한 라피트가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어머, 2번선 대장은 초대한 적이 없는데요."
"....보조라면 오히려 내 쪽이 더 좋을텐데."
"제가 부른 목적은 보조도 있지만 다른 목적도 있었거든요."
예를 들면 오늘 새벽이 지난 뒤에 위타드가 음의 상태일지, 양의 상태일지 결정짓는 것 같은? 라피트의 태연하고도 매끄러운 말에 시류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위타드를 편리한 도구 취급하지 말도록, 짧은 경고가 으르렁거리며 낮게 흘러나오자 라피트는 코웃음을 친다.
"누가 할말을? 서로 각자 원하는 게 뚜렷한데 혼자만 위선을 떠시는군요. 가증스럽게도."
"난 위타드를 편리하게 생각한 적 없다. 녀석은 동료이지."
"예에, 뭐, 그런 걸로 하자고요. 편리한 <동료>."
어깨를 으쓱이고선 키를 잡는 라피트를 노려보며, 시류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팔짱을 꼈다. 음과 양의 상태가 결정되는데에 둘의 의지는 단 하나도 상관이 없었음에도, 이따금 그들은 되지도 않는 아집을 부리곤 했다.
익숙하게 심드렁한 얼굴로 라피트를 도와 키를 고정시키고 지도의 방향을 돌려주며 위타드는 그들을 응시했다. 양이라, 음의 위타드는 양의 상태를 썩 좋아하지 않았기에, 얼굴을 찡그린 채 둘을 바라보았다. 사실상, 그들의 속셈은 딱히 숨겨질 의도도 없었기에 빤하게 드러나곤 했다. 라피트는 위타드를 귀애하며 자신의 총애에 따라 움직여주기를 바랐고 시류는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러나 반대로 음의 상태로 그들의 앞에 등장하면 시류는 미묘하게 만족해하는 태도를 보이며 라피트와 달리 자신을 제법 아끼는 모습을 보이니. 위타드는 가볍게 고개를 돌리며 샛별이 떠오른 고즈넉한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그에게는 썩 나쁘지 않은 관계였다. 쌍방으로 귀애하며 적당히 벌어진 이 거리감각이, 관계의 미묘함과 교묘하게 다른 감정으로 변질될 듯한 이 오싹한 귀애가 마음에 들었다.
아슬아슬하게 깨질 듯한 빙판 위에 선 것처럼, 끊어질 듯한 줄 위에 뛰어오른 것처럼.
관계란 이 정도면 각자 적당한 거리감이었다.
위타드는 그 거리를 늘릴 마음도, 줄일 마음도 없었다. 그리고 그건 항해실에 본의 아니게 모이게 되어버린 두명 역시 같은 생각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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