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슬
수리 X 유우성 드림

 


 
때로는 태양보다 더 빛나는 의지가 있다.
때로는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찬란하기 그지 없는 꿈이 있다.
 


 
 
밤을 살아가고 그늘 속에서 숨쉬는 자들이 그것을 발견했을 때에 대체적으로 갖는 감정은 두가지로 분류가 되곤 한다. 시기, 혹은 동경. 나의 경우에는 후자였다. 내 손에 쥐여진 칼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 내가 빼앗은 목숨과 수없이 많은 생명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지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내가 밟아온 모든 발자국들이 붉었다.
 
 
 
 
그러니 저 눈부신 재능에 더러운 것이 묻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타고난 재능을 가감없이 발휘하는 자들의 행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들의 움직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단장이 귀에 못이 박히고 피딱지가 얹어 다시 떼어내질 정도로 말했을 때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 두 눈으로 보니 느껴졌다. 타고난 재능이라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게 펼쳐질 수 있는 것인지.
 
 
 

 
그건... 여명이었다.
 
 
 

 
탄탄하게 잘 짜여진 무대 위에 올라와 정해진 역할만을 수행하는 극. 어떻게 보자면 좁은 세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세계가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재능이 있었다.
 
 
 
 

그의 발이 무대에 올라가는 순간, 조그마한 틀처럼 보였던 사각형 안에서 온 세상이 펼쳐졌다. 내딛는 걸음과 시원스러운 목소리, 떨림없이 내뱉어지는 대사들이 단순히 종이 위에 쓰여진 활자가 아님을 증명하듯 생생하게 살아 숨쉬었다. 호쾌하게 내뱉어지는 문장들에 실려있는 감정에 홀려 매료되었다. 그의 극을 조금 더 오래 보고 싶어졌다. 그가 펼쳐내는 수많은 이야기가 기대되었다. 그가 결국 올라가 펼칠 스크린 속의 풍경이, 그가 연기할 하나의 이야기가 몹시도 궁금해졌다.
 
 
 
 
 
 
 
 
"예? ...후원...이요? 그.. 사람한테?"
 
 
 
 
 
 
 
 
아주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냥 흔적처럼 남겨놓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그냥 정말 숨만 붙여놓을 정도의 금액. 이따끔 그가 절실해질 때에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남겨놓은 금액이었다. 티끌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그가 찾을만큼 절박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아, <흑주> 후원자님? 그가 돈을 받아갔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다. 소식을 들었으니까. 배신을 당했다고.





그래도 그는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맡겨두었던 금액을 찾아가서 그 돈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듣지 않았다. 구태여 찾지 않았고, 소식이 흘러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내 쪽에서 외면을 택했다. 내가 보았던 순수하고도 찬란했던 그 세계로 기억하고 싶었다. 그렇게 끝을 맺고 싶었다.










운명은 늘 그렇듯
나를 외면했다.

 
 



 
 
 
 
 
 
 
"롱터우! 롱터우!!"
 
 
 
 
 
 
 
 
목청껏 외치는 이름에 환하게 웃는 얼굴이다. 내가 보았던 그 얼굴이었다. 연기를 위해 없던 진심을 만들어내는 그 미소였다. 찬란하고도 빛나는 거짓을 위한 미소였다. 결국 이쪽으로 왔구나. 종내에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하겠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끝은 파멸일 것임을 알면서도 네 끝은 극처럼 찬란하게 끝나기를 바랐다. 눈이 아프도록, 시리도록 비추어지는 태양같은 조명에서 두 손을 들어올려 관람객들을 향해 기꺼운 인삿말을 내던지는 결말을 바랐다. 해피엔딩은 환영받는 서사가 되지 못함을 알면서도 네 극은 해피엔딩이기를 바랐다.
 




 
 
 
 
커튼콜이 내려가고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나면 보이는 새카만 화면 너머에서, 네가 웃기를 바랐다. 큐 사인이 끝나고 고생했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을 꿈꾸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번 꿈꾸어봤다. 타인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은 상관없으리라고 여겼으니까.
 
 





 
 
 
나같은 사람이 빌어서 안되었던걸까. 이미 한가득 손에 피가 묻은 사람이 맞잡은 손이라서 기도가 잘 되지 않았던걸까. 사람을 너무 많이 죽인 사람의 목소리이기에 닿지 않았던걸까. 더럽혀진 기도였기에 빌어준 행복이 저주가 되었던걸까.
 
 






 
 

무참하게 끝이 난 사진을 보며, 거의 다 망가졌음에도 겨우 얻어온 CCTV의 메모리 카드를 보며, 그 안에서 맞이한 장대하고도 화려했던 네 서사의 마침표를 바라보며.









너의 오연했던 거짓이 결국은 여명이 아니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네 해는 없었다. 우리의 새날은 결국 얼룩진 채로 오지 않았다. 우리의 밤은, 끝나지 않았고 네 낮은 결국 오지 않았다. 너는 백열등에 눈멀어 달려든 벌레가 되었고 나는 네 비극을 두 눈으로 똑똑히 담으면서도 늘 그렇듯ㅡ 방관자만이 될 수 있었다.










내도록 죽인 살인의 대가가 이러할까.







탄생의 순간부터 죽어나가는 순간까지 결국 타인의 생을 먹어치워 삶을 이은 결과가 이러할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며, 친애하는 자들의 자멸극을 두 눈을 뜬 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 어느쪽도 잃고 싶지 않아 그러했다.
눈물이 두려워 피눈물을 택했고 차악이 두려워 최악을 택한 최고의 머저리가 바로 나였다.









너만큼은 다른 결말을 맞이하길 바랐다.
너만큼은 다른 결과를 이어나가길 바랐다.








그것이 이토록 아픈 일인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그 찬연한 세계에 눈을 빼앗기지 말았어야 했는데.
네가 펼친 그 조그마한 틀에 온 세계를 넣지 말았어야 했는데.
펼쳐낸 손끝에 묻어나온 찰나를 친애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기어코 나는 너를 결국 친애하였구나.
이리 아프게 깨닫는 것이다.

트레틀 사용(나나곰 님)

 

 

CM

 


이름: 수리(Voron)
성별: 여
나이: 20대 초반 추정
별명: 갈까마귀(Voron)

외모: 짙은 녹발. 흑안. 주근깨. 왼쪽 허리에 문신있음.
체격: 182.7cm / (몸무게는 비밀)
소속: 前 토레소아 > 現 무소속(자유 해결사)
기술: 쌍검.  총검술.
출신: 러시아 혼혈
주특기: 괴력. 약물
가족: 오하영(父) / 옥사나 스베틀라나(母) / 전원사망.
체향: 월계수. 나무향. 겨울바람.
 꿈: 바텐더. 자신만의 가게를 가지는 것이 꿈이다. 그 가게에서 피아노맨을 들여 노래를 틀고 가끔 친구들을 불러 노는 것을 꿈꾼다.

성격: 이해득실을 몹시 따지는 성격. 소소한 손해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지만 단위가 클수록 깐깐하게 따지고 들어간다. 은원을 확실하게 구분짓고 갚는 타입이며 표면적으로는 소소한 손해를 넘어가주는 덕분에 너그러워보이는 성격이다. 한가지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저돌적인 성격으로 직진밖에 안하며 무서운 집중력을 보여준다. 흥미를 끌지 않는 것들에게는 거의 관심이 없다. 최대한 불필요한 싸움은 하지 않지만 굳이 싸워야한다면 한번에 끝내는 것을 선호한다.
 
좋아하는 것: 정장 쇼핑, 겜블링, 단 음식, 검 구경. 한국사람.
싫어하는 것: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 물건파손. 신 음식.
 
특이사항: 검은 정장을 즐겨 입으며 왼쪽 허리 쪽에 톱니바퀴를 물고 있는 갈까마귀 문신이 있다. 검은 코트와 정장 사이에서 꺼내는 검이 죄다 검은색인 덕분에 언뜻 칼의 궤적과 갯수를 놓치기 쉽다.
 
호적수: 반드시 정당하게 부딪혀서 이기려는 타입. 본인이 이기더라도 최대한 정중하게 보내주지만 한번 호적수라고 느껴지는 이상 반드시 싹을 없애버리려고 한다.
 
민간인: 최대한 부딪히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필요한만큼 온화하게 대한다. 어지간하면 수리 쪽에서도 거의 건드리지 않으려는 타입.
 
대사: "나는 내가 제공할 수 있는 최대의 선의를 베풀고 있는거야."
"돈이 되는 복수를 해." 


설정:

 
토레소아_
러시아의 살수 전문 살수 집단. 마피아나 살수들만 전문적으로 죽여주는 집단이다. 우두머리는 '단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렸으며 실명은 아무도 모른채로 사망했다. 후계자는 본래 수리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수리가 거부하고 스스로 조직을 와해시켜 다시 역사에서 등장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수리가 물려받은 것으로 되어 있기에 토레소아에게 의뢰를 하기 위해서는 수리를 찾아야한다. 받아줄지는 의문이지만.
 
 


관계:

 
오도화 _ 어렸을 때 일본에서 만나 수리가 장기체류하면서 아득바득 한국어를 배운 스승. 오도화에게 수리가 매달리는 수준으로 한국을 알려달라고 떼를 썼다. 초창기 오도화와 함께 싸워주며 기어코 얻어낸 수업으로 지금의 회화 수준에 도달했지만 가끔 일본식 욕설을 쓰게 가르친 장본인. 한국어 이름도 뜯어냈다. '수리'라는 이름을 오도화 본인이 지어줌. 이름이었는데 성씨 개념을 몰라서 성이 '수', 이름이 '리'로 외자가 된 것을 후에 듣고 어처구니 없어했다.

+) 수리가 순수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임무열 _ 어렸을 때 일본에서 토레소아와 협력하여 회사를 차린 장본인. 토레소아의 단장과 거래하여 수리에게 경험을 쌓고, 보호해주는 대신 대가로 수리의 노동력을 받아가기로 했었다. 그러나 뜻밖에 아이가 너무 순종적으로 굴고 억압되어 있음을 알아차리고 오도화를 통해 어느정도 해방감을 알려준 인물. 수리에게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수리가 순수하게 대할 수 있는 인물.

"보로나, 나는 신이 아니야. 아니, 하물며 훌륭한 신도라고 하여도 무작정 따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 거부할수도 있어. 네 논리에 그릇된다면 말 정도는 해볼 수 있는거다."



단장 _ ???


서진태(사로카) _ 러시아에서 한번 마주쳤던 인물. 노예시장에서 서로 만난 적이 있다. 돈을 많이 모아서 언젠가는 아빠의 고향인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었다. 수리가 유일하게 자신의 꿈을 얘기해준 인물이다.


 
김신(티그로) _ 토레소아 소속일 때 마주쳤던 인물. 원래 김신이 타깃이었기에 수리가 암살하기 위해 찾아왔으나 한국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의뢰를 파기했다. 단지 한국사람이라는 이유로 수리가 호의를 보였고, 김신은 그런 수리를 어느 정도 받아주며 친분을 쌓았다. 단장을 죽이고 토레소아가 와해된 이후 찾아온 수리를 김신이 한국으로 보내줬다. 이후 김신이 한국에 귀국하자 찾아갔으나 귀국 목적을 듣고 난 후에는 합류하지 않기를 선택했다.

"토레소아는 네가 세운 것이나 다름없지. 네가 토레소아이지 않은가."
"리야, 부탁 한번만 하자."

 
 
유우성(롱터우) _ 토레소아 소속일 때 만났던 인물. 홍콩에서 액션스쿨의 오디션을 보고 리천에게 추천한 인물이다. 유우성은 수리를 모르지만 수리는 알고 있으며, 개인적으로 그를 응원한다. 그러나 서로 엮이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이따금 그의 행보에 미소짓기도 하는 등 비밀스러운 후원자로써 활동하고 있었다.
 
"...네가 후원자, 였나. ....'흑주'가 너였어."
"내 극이 마음에 들었나?"


주변평가:

 
오도화 _ 광휘를 누려라, 검귀야.
단장 _ 넌 내 최고의 걸작이야.
서진태 _ 다시 후회할 일만 만들지 않으면 돼.
유우성 _ 나의 유일무이한 관람객.
 

(이후 수정할수도 있음)

W.MOMO


*드림글입니다.
*커미션 글입니다.
*TYPE D





사랑의 첫 시작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일반적으로는 호기심이지 않을까. 효타, 루치의 쌍둥이 형인 소년은 틀림없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던 무리에 불쑥 끼어들어 사고와 소란을 몰고 다니는 소녀를 향해 악의적인 호기심이 똘똘 뭉친 시선을 던진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분명 틀림없이 그것으로 시작했을 터인데. 궁금해졌다. 단순히 저 녀석이 뭐하는 녀석인지부터 어떤 힘을 가지고 있고, 어떤 생각을 품고 있으며 어떤 행동을 좋아하는지, 어떤 꽃을 선호하는지부터 시작하여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까지 꼼꼼하게 알아내고 싶었다.




이 감정은 정보원으로써의 버릇 때문일까? 효타는 능숙하게 입꼬리를 올려 미소지었다. 지나치게 빤한 시선에 불쾌감을 표현하는 미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밀조밀하게 구깃한 미간이 더더욱 일그러지기 직전 당연하다는 듯 쑥 시야의 반절을 가려버리는 손. 굳은살이 군데군데 자리를 잡아 누가보아도 검을 쥐고 훈련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흔적이 다분한 그 손바닥을 바라보며, 효타는 눈꼬리를 휘어접었다.




표정을 숨기는 것은 그에게 숨쉬는 것보다 더 간단한 일이었으니 능숙하게 불쾌함을 잠재우는 것은 가능했지만ㅡ 효타 본인조차도 영문을 모르겠는 감각이 불쑥 고개를 치켜드는 것은 숨기기가 어려웠다. 간지럽고, 따가운 감각, 아마도 다양한 단어와 문장들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직관적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을 '불편함' 혹은 '불쾌감'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의문이 드는 것이다.





왜?
본인은 대체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가?



상황을 파악하자면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을 막는 게 못마땅하니 불편함, 은 납득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불쾌감, 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비슷한 감정이라 동시에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이 헷갈리고 있는 것인지. 아직 정확하게 파악이 불가능한 감정을 막연하게 가시덤불처럼 움켜잡고, 효타는 익숙하게 웃는 낯으로 독설을 혀에 휘감았다.






"너무하네, 혹시 본다고 닳는 종류?"

"자네가 보면 닳을 것 같구만. 싫다는데 빤히 쳐다보는 게 실례라고 안 배웠는감? 아,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던겐가?"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잔뜩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은 듯 그저 웃는 낯으로 태연하게 그를 마주보고 있는 재수없는 금발. 봄날 어지럽게 핀 개나리를 그대로 빼닮은 듯한 금발. 효타는 일그러지려던 얼굴을 애써 다시 가다듬으며 웃는 낯으로 비난에 가까운 말을 받아냈다.



어쨌거나 결국 그녀의 곁에는 익숙하게 곁을 차지하고 앉아있는 카쿠였으니. 그녀의 곁에 슬그머니 다가서려면 카쿠와의 마찰은 사실상 확정된 수준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굴 필요는 없지 않나? 싶어 고개를 빼꼼 내미는 순간 이제는 한톨의 시선조차도 허락하지 못하겠다는 듯 쑥 시야에 따라 손바닥이 따라 올라온다.





"알았어, 안 보면 되잖아. 까칠하네~."

"도서관에서 정숙이라는 말도 모르는 놈팽이의 말은 믿을수가 있어야지~."






거울을 보듯 서로를 향해 반들거리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을 흘끔 바라보며, 미나의 눈동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책상 위에 올려놓아진 교과서로 고정된다. 저런 유치찬란한 싸움에 본인이 끼어들 이유는 없었다. 어려운 과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을 한참이나 붙들고 눈싸움을 걸고 있을 무렵 푸른 머리카락이 불쑥, 미나의 손목을 간지럽힌다.





"내가 도와줄까?"





무슨 일이든 도움을 청한다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온화하게 받아줄법한 비비, 그녀였다. 순순히 도움을 받아들 작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미나가 교과서를 넘겨주려던 찰나 카쿠의 손이 비비보다 빠르게, 그러나 미나의 눈보다는 느리게 그것을 가로챈다.





"내가 알려줄수도 있네, 미나."






어머. 감탄인지 경탄인지 모르는 것을 가볍게 흘린 비비는 카쿠의 굳건한 손바닥에 낚아챈 책을 한번, 미나와 카쿠를 한번 돌아보더니 그럼 됐다며 사르르 눈웃음을 짓고선 제 공부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도서관임을 잊지 않은 듯 소근거리는 음성에 미나는 잠시 한쪽 눈썹을 쑥 밀어올린다. 뻔한 개수작이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예쁘게 보인다면 역시 효타에게는 승산이 없는 거겠지. 아니나다를까 카쿠의 수작질에 어이가 없다는 듯 표정관리를 실패한 효타가 카쿠를 노려본다. 물론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선 펜끝을 휘둘러 공식들을 적어내려가는 카쿠에게 신경쓰이지 않는 일이었지만.





이 공식을 쓰면 된다고 소근거리는 와중 다시 거리를 좁히고 바짝 붙어서는 것. 그것마저도 수작질에 가까운 행동이었으나 1반 학생들은 그저 익숙한 듯 고개를 돌리며 제각기 할일에 집중했다. 별로 신경쓰이는 일도 아니었고, 낯선 광경도 아니었다. 그동안 미나 근처를 빙빙 돌며 영역표시라도 하듯 으르렁거렸던 나날들을 떠올리면 오히려 순하게 구는 카쿠가 이상하게 보일 지경이었으니.




그리고 그 곁에, 누가봐도 대놓고 못마땅함을 드러내는 효타가 있다. 보면 닳는 종류라더니 이제 아예 접근도 못하게 해버리네. 쳐다도 보지 말고 근처에도 오지말고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간신히 참아준다는 듯한 반응.






"너무하네~."

"실례지만ㅡ 자네는 너무 루치랑 닮아서, 영 거북함까지 느껴질 지경이거든."

"쌍둥이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 아닐까, 이해해줘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싫다네."





이해해줘야할 이유라도 있다면 생각은 해보겠지만. 얄밉게 눈꼬리를 휘어접어올린 카쿠를 향해 다시 한번 무섭게 인상을 쓰는 효타였으나, 아쉽게도 루치의 상시 무표정에 대해서 내성이 생겨버린 학생들은 그렇게 큰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소소하게 인상을 쓰니 루치랑 굉장히 닮았다고 감상평이나 남길 정도로 무감했다.




도리어 울상으로 되돌아온 효타의 표정에 괴리감을 느낄 지경이었다. 효타의 갖은 노력은 별로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뜻이 되기도 했다. 결국 포기한 채 미나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을 만족한 효타의 시선이 같이 교과서로 향하고 도서관은 다시 정적을 되찾는다.




팔락거리며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 사각거리며 잉크가 종이에 묻어나오는 소리, 흑연이 거친 공책의 종이에 닳아가는 소리와 저 멀리 찌륵거리는 풀벌레 소리까지 공부하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문제라면 정말 이대로는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떠나야하는 효타의 처지였다. 효타는, 고작 단순히 같은 공간에 있는 것으로 만족할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등교를 하며 아침햇살을 같이 쬐고, 하교를 하며 다음에는 어디에서 놀지 얘기하는 건 솔직히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럴수만 있다면 물론 두 손 두 발을 들고 냅다 달려들어서 했겠지만 효타는 이상을 꿈꾼다고 말하면서도 현실적인 사람이었기에 그럴수는 없었다.




그는 단지 자신의 호기심만 채우면 되었다. 자신의 의문만 해결되었다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그의 의문은 꽤 자잘한 것에서부터 시작했으니 그럴듯하게 포장하자면 우정, 이라는 이름으로도 포장이 가능하겠다.





그러나 효타, 그가 바라고 있는 정도를 말해보라고 한다면 태연하게 내뱉기에는 제법 망설여지는 부분도 있었다. 등하교는 포기한다고 치더라도 그녀의 곁에서 관찰을 하고 싶은 것은 솔직하게 긍정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정보원으로써 비밀을 두르고 다니는 미나가 궁금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원한다면 학생회의 기록일지에서 그녀에 대한 모든 내용을 볼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카쿠의 방해 때문이 아니라 직접 그녀에게서 듣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예의가 아니잖아? 자신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면에서는 냉혹한 루치와 제법 닮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자신이 처음으로 가진 '호의'를 풀어보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다.




호의라니, 루치와는 아주 다른 점이지 않은가? 그 녀석이 미나에게 호의를 품을리가 없으니 아무렴 그 녀석보다는 자신이 몇배, 구체적으로 수치를 따지자면 한 1.8배 정도는 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자신의 호기심이 누구를 죽이는 천연덕스럽고 잔혹한 아이와 같은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날을 세워서 으르렁거리는지.




다가오는 모든 남자들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경계하는 카쿠의 행동은 단순히 소년의 질투라고 치기에는 과한면이 있었다. 효타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어느새 공부에 집중했는지 조금의 소란도 없이 일정하게 책이 넘어가는 소리를 나른하게 풀린 얼굴로 경청했다. 때마침 임무도 없었던지라 한가한 덕분이었다.




해가 뉘엿하게 움직여 하늘을 주황빛으로 물들여가는 때, 비로소 원하는만큼 시간을 보낸 것인지 1반의 학생들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책들을 가방에 집어넣고 그럼 자신은 가보겠다며 속삭이는 음성을 남긴 채 점점 줄어가는 인원은, 어느새 셋밖에 남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킬 것처럼 굴었던 트라팔가 녀석조차 오니기리의 밥을 챙겨줘야한다는 얼토당토 없는 소리를 하고선 쏠랑 나가버렸으니 이로써 효타에게 기회는 굴러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하, 꿈도 꾸지 말게."






굴러들어온 기회가 방금 데굴데굴 굴러 카쿠 앞에서 무참하게 밟혔다. 효타의 토라진 듯한 표정변화에 징그럽다는 감상평을 가감없이 내던진 카쿠가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에는, 어느새 규칙적인 숨소리와 함께 엎드린 채 잠들어버린 미나가 있었다. 공부를 하겠다는 높다란 의지로 펜은 꼬옥 쥐었으나 몰려오는 수마를 이겨낼 수 없었는지 곱게 잠들어버린 미나의 턱에는 언제 가져다 바쳤는지도 모를 정도로 신속하게 얹혀있는 노란색 쿠션이 있었다.




앙증맞게 기린그림까지 그려져있는 그 쿠션의 주인을 모를리가. 효타는 다시 한번 눈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간신히 내리며, 입술을 비죽여 웃어보였다. 영역표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빙빙 주변만 돌면 미나가 불편해하지도 않나봐. 나긋한 어조의 시비에도 역시 카쿠는 환하게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암, 미나는 불편하면 바로 불편하다고 말하는 강단있는 사람이라서 말이네. 누구처럼 음침하게 돌려말하는 버릇도 없네."

"나같으면 무슨 소유권이라도 주장하는 것처럼 구는 태도가 살짝 성가실 것 같은데 말이지~."

"소유권이라니?"





어불성설이지. 그녀가 날 가진걸세.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내뱉는 문장에, 효타는 잠시나마 패배감을 느껴야했다. 강적이다. 그걸 넘어서서 소유권에 대한 생각마저도 뒤바뀐 말에 말을 잃은 효타를 바라보며, 카쿠는 다시 한번 둥그렇게 눈을 휘어접으며 웃어보였다.





"자네는 그렇게 생각 안하나보군."






좋아하는 사람을 가져야 속이 풀리는 타입인겐가? 놀리듯 신경을 살살 긁는 질문이었다. 눈썹을 한번 꿈틀거린 효타가 입을 다문채 무섭게 카쿠를 노려보는 것을 끝으로 그들의 신경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승자는 카쿠, 패자는 효타인 상태로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대화를 잠든 척 들어야 했던 미나는,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야했던 자신의 노고를 회상하곤 했다. 웃겨 죽는 줄 알았다. 입술끝에 경련이 일어난 것 같아서 얼른 뒤척이는 척 얼굴 전체를 기린쿠션에 파묻어버렸다는 것을 둘은 알련지 모르련지.





지나치게 소란스러웠던 덕분일까. 여느때와 다름없이 가방을 챙겨들고 들어가려던 그들을 막아선 것은 도서관의 문 앞에 선명하게 경고가 쓰여있는 종이였다. 결국 도서관 출입금지를 당해버린 내용에 미나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눈을 홉뜨고 루피를 쏘아봤다. 덕분에 공부할 곳이 없어졌잖아. 따지려던 찰나ㅡ, 효타가 능글맞게 웃는 낯으로 불쑥 등장한다.





"뭐야, 1반 도서관 출입금지 당했어~? 세상에, 엄청나게 소란피웠나봐. 미나, 불편하겠는걸. 도서관이 공부하기에는 최적의 공간이잖아?"

"....그렇지."






표정으로 대놓고 이게 무슨 수작이지, 하는 얼굴이었으나 포커페이스의 달인이자 연기의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효타는 능글맞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다시 한번 살금, 미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 재주 하나로 학생회에 들어와 루치의 그림자노릇을 했는데,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는 미나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에, 자신이 있었다. 실로 오만하고도 거만한 마음가짐이었다.





"내가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때?"

"대가는?"






아, 차가워라. 보통 이렇게 나오면 상냥하거나 고만고만한 녀석들은 고맙다는 인사부터 나오는데 말이야. 만만치 않다는 생각을 입속으로 쓰게 삼키며, 효타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보통 이런 경우의 사람들에게는 '없다'라고 말한다면 오히려 의심만 키울 뿐이다.



역효과라는 뜻이지. 입을 벌리려는 순간 저 멀리 카쿠의 구두소리가 울린다. 그렇지, 카쿠에게도 엿먹이고 미나의 거리도 좁힐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긴 것 같았다.





"단둘이 카페 가는 거, 혹시 어려울까~?"





멈칫한다. 청력이 뛰어난 카쿠의 얼굴은 이미 일그러진 채 살기를 숨기지 않았고 그런 야차같은 얼굴을 느긋하게 감상하며 웃는 낯으로 미나의 대답을 기다린다.



카쿠의 걸음이 미나의 대답을 끊어내기 전, 미나의 눈동자가 빠르게 효타의 위아래를 훑는다. 마치 감정이라도 하듯 완벽하게 평가하는 듯한 시선으로 훑은 그녀가 내린 대답은 긍정이었다. 아슬아슬하게 합격점까지는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 정도쯤이라면야, 시간과 장소는 네가 정해서 얘기해."





귀찮은 건 질색이니까. 알아서 정해서 통보해주면 되겠다는 말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려 카쿠와 팔짱을 끼고 걸어 사라지는 미나의 뒷모습이다. 허리끝에서 넘실거리는 흑단같은 머리카락을 마찬가지로 까만 밤하늘 같은 눈동자에 담아놓은 효타는 마스크를 올리며 심드렁하게 중얼거린다. 그러니까... 여왕님 타입이신건가ㅡ.




정보원으로써 거의 평생을 살아왔으니 맛집 같은 소소한 것들이야 일도 아니긴 하지만. 학생회실에 드러누운 채 곰곰히 미나와의 데이트 코스를 짜던 효타의 휴식을 방해한 것은, 당연하게도 학생회실의 문을 부술듯이 들어온 카쿠였다.






"효타, 자네 미쳤는감? 드디어 머리가 돌아버린겐가? 대체 어쩌자고 그런 개수작을 내 앞에서 부린겐가? 아, 나랑 싸우고 싶은 속셈이었는감? 그런거라면 말을 하지. 굳이 그런 짓거리 안해도 싸워줄 수 있다네."

"....아이, 왜 싸우려고 그래. 난 그냥 단순히 친해지려는 거라고. 친.구.사.이. 도 못하는거야?

너무 빡빡하다~. 내가 누구처럼 교제를 원하는 것도 아닌데 단순히 우정도 허락 안 해주려는 거면 너무한 거 아닐까~? 이성친구는 아예 안되는건가봐? 그거 미나가 허락한 거 맞아~?"





사르르 눈읏음을 치며 내뱉는 말들에 속이 뒤집힌 것처럼 숨을 몰아쉬던 그의 주먹이 파르르, 떨린다. 잔뜩 힘이 들어갔는지 하얗게 핏기마저도 사라지는 카쿠의 주먹을 흘끔 바라보며 효타는 생글 웃어보이는 것이다.





웃는 낯이 좋다고 하잖아? 침은 못 뱉어도 웃고 있는 얼굴은 생각보다 여러가지로 도움이 되는 편이다. 때아닌 소란에 놀란 표정으로 들어오는 스팬담 선생님처럼 우연이 겹쳐 꽤나 소소한 행운을 거머쥘수도 있으니 말이다.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로 반쯤 부숴진 문고리와 헐거워진 쇠부분을 바라보던 스팬담은 아주 문을 부수지 그랬냐며 바락바락 카쿠를 혼내기 시작했고 덕분에 뚱한 표정으로 꾸중을 죄다 감당해낸 카쿠만 서러울 뿐이었다.





대충 효타가 웃고 있는 것과 학생회가 수근거리는 이야기를 통해 정황은 알았으나 니들 힘을 좀 생각해보라는 말과 함께 꾸중을 마무리 지은 스팬담이 떠나고, 스팬담의 청력으로는 듣지 못할 정도로 멀어지고서야 카누는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을 수 있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욕설과 육두문자에 짐짓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는 효타다.






"우와, 무서워라. 양아치야~?"

"....하나만 묻자."





누그러지는 말투에 효타의 눈에 의아함이 올라오자, 카쿠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 차가운 어조로 묻는다.







"네놈이 미나에게 품은 감정이 대체 뭔감?"

"감정? 그야 호기심이지. 단순 호기심."





그녀가 궁금해. 정보원 앞에서 비밀을 다 두르고 다니는 건 굶주린 맹수한테 고깃덩이를 휘감고 쇼를 하는 것과 같은걸. 효타의 장난기 다분한 말투에 카쿠는 잠시 말을 잃은 듯 짧은 침묵을 이어나가더니 이내 결정했다는 듯, 고요히 팔짱을 낀다.






"그런 마음가짐이면 안되네.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는 안돼."

"가벼워도 안되고 무거우면 더더욱 안돼. 어쩌라는건지 모르겠네~. 으하핫."






살포시 신경을 긁는 말에도 카쿠의 반응은 없었다. 호오, 무시하기로 한건가? 카쿠의 반응에 효타가 지루하다는 듯 눈썹을 쑥 밀어올린다. 말없이 그대로 나가버리는 카쿠의 뒷모습을 손을 흔들어 배웅하는 시늉을 하고, 효타 역시 자신의 감정이 대체 무엇인지 철저하게 분석해보기로 결정한다. 카쿠는 의미없이 시비를 거는 녀석은 아니었으니. 정말 단순히 순수 100%의 호기심인가?





안타깝게도, 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이 애매했다. 호기심이냐는 질문에는 당당하게 긍정할 수 있지만 완벽하게 호기심이느냐고 묻는다면 조개처럼 입을 다물게 될테니. 따지자면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삐딱한 시선으로 보게 된다. 사랑의 시작은 호기심이지 않는가?





처음에는 그녀가 가진 비밀이 궁금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단순히 취향을 알아내 그것을 객관적인 '정보'로 취급하기에 그녀가 품고 있는 소소한 정보들을 어쩐지 자신이 사용할것만 같았다. 귀하게 얻어냈든 손쉽게 얻어냈든 정보를 얻어오는 것은 본인의 소관이었으나 사용은 허가가 필요한 일이었기에.




무엇보다 윤리적으로 옳지도 않았다. 남의 연인을 냅다 채가는 것은 아무래도 도덕적인 관념에서는 심하게 어긋나 있는 관계였으니 말이다.




물론ㅡ 효타는 그 생각을 냉큼 뒤로 넘겨버렸지만 말이다. 아무리 루치와 달리 유순하고 제법 온화하다고 할지라도 역시 그는 루치의 쌍둥이였다. 윤리적인 관점보다는 본인의 흥미와 개인의 임무가 더 중요한 녀석인지라. 효타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임무를 멋대로 미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내기, 로 정해버렸다.



만나다보면, 자신이 품고 있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내릴 수 있으리라. 애매한 관계보다 낫겠다 생각하며 미나를 불러낸 곳은 분홍빛 파스텔 톤과 커플들이 가득 모여 꽁냥거리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카페였다.




'진짜 카쿠랑 싸울 작정인건가.'





아예 마음을 제대로 먹은 것 같은 카페의 분위기에 뭐 씹은 듯한 표정으로 응수해준 미나였으나, 정보원으로써 수집해온 것들이 허사는 아니었는지 정말로 주문한 음료와 디저트들은 전부 미나의 취향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들이었다.




지나치게 달지 않고, 인공적인 맛이 강하지 않은 과일향으로만 이루어진 디저트. 혀끝에 어른거리며 묵직한 맛을 내는 생크림의 양은 적었으며 오히려 새콤한 딸기잼이 부드럽게 씹히는 덕분에 식감까지 상당히 괜찮았다.





뾰족하게 날세웠던 것이 무색하게, 효타는 그저 미나가 먹는 모습을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미나가 추가로 디저트들을 더 주문한 후 결제까지 대신해준 후에야, 다음에도 만날 수 있냐는 단조롭고 깔끔한 질문을 던졌을 뿐. 이 순간 거절해도 정말 그대로 신경을 끌 것 같은 쿨한 반응이었다. 도리어 그것이 미나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그녀는 짧은 고민 끝에 승낙한다.




"...그래."

"좋네~. 다음에도 맛집 투어 가자구. 여기 바나나 케이크도 맛있어."




카쿠 몫도 사갈거지? 태연하게 그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인상 하나 찌푸려지지 않는 효타다. 그의 속내를 짐작해보려는 듯 가늘게 뜨였던 눈동자는 금방 풀어지고, 미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나나 케이크와 몇가지 디저트들을 추가 주문을 넣었다. 포장을 기다리며 안전바에 몸을 기대어 선 뒷모습을 바라보는 효타의 눈은 이전과 달리 꽤 깊게, 가라앉아있었다.




카쿠와 미나. 둘의 사이를 파고들 틈은 없었다. 서로 가장 힘든 때에 곁을 지켜주었던 사람들인데 쉽게 부스러질리가 없었다. 아마도 서로가 더없이 소중하고, 그 귀한 인연을 함부로 폄하하지 않고 신중하게 접근하겠지.




몇번이나 고비를 넘기며 숨차게, 벅찬 순간들을 채워나갔을 터였다. 이제 막 학교에 돌아와 겉돌고 다시 나가야하는 그의 입장으로써는 너무나도 불리한 조건이었다. 본인도 나돌아다니고 싶어서 나돌아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거부했을 권한은 이미 잃었던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할말은 없었다. 학생회를 떠들석하게 휩쓸었다던 그 사건에서조차 효타는 그렇게까지 깊게 관여하지 못했으니 더더욱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 인내심에는 자신이 있는 그였기에.




효타는 너그러운 웃음을 지어보이며 디저트를 들어주기까지 했다. 손수 카쿠에게 바나나 케이크를 내밀면서도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으며 말이다. 그래, 이번에는 카쿠가 맞았다. 이제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그녀를 갖고 싶었다. 제 곁에 두고 카쿠, 그 녀석이 채워넣었던 순간만큼 자신이 곁에 있고 싶었다.




그리하여 공평해진 조건에서 겨루고 싶었다. 순전히 자신만의 이기심이었지만 어디 그 오만한 핏줄이 사라지겠는가? 효타 역시 슬프게도 제 쌍둥이를 지독하게 닮아버린 모양이었다.





"시험공부, 화이팅~."






앙증맞게 주먹을 쥐어 흔들어주며 효타는 미나와 카쿠가 자리를 완전히 뜨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기어이 중간고사가 다가오고 마지막 시험까지 끝마치고서, 효타는 느릿하게 다가와 두번째 데이트를 청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미나는 떨떠름해하는 낯으로 승낙했다. 물론 곁에서 카쿠는 같이 듣고 있는 상태였지만 효타에게는 알바가 아니었다. 그를 긁는 것 역시 퍽 재미난 일이었으니 일타쌍피지, 단순하게 게임으로 생각해버리는 효타의 사고방식이 상황을 정리해낸다.






"궁금한 게 좀 여러가지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응."

"카쿠의 어떤 점이 좋아서 교제를 허락한거야~?"





허락. 누가 우위에 서있는지 확고하게 드러내주는 단어에 우쭐해진 듯 눈썹을 쑥 밀어올린 미나는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기울이며 답했다. 착하잖아. 이런, 그 부분이라면 효타는 점수를 따지 못한다. 그러나 카쿠 역시 선한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는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효타의 얼굴에 푸스스하게 웃음을 터뜨린 미나. 속을 간지럽히는 웃음소리에 효타의 눈꼬리가 살짝, 떨린다.





"푸흐흐, 알아. 카쿠는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내게는 착하게 구는걸. 그게 기특하기도 하고... 일단 내 앞에서는 세상 다 줄 것처럼 구는데 싫을리가 있나."





고마운 것들도 많은걸. 미나의 웃음소리에 홀린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효타의 얼굴이 의식보다 먼저 습관적으로 나긋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렇구나. 그러나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은 그대로 드러나는 어투였다. 걔가 착하다니, 이해할 수 없다.




세상 다 줄 것처럼 구는 건 자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왜 자신이 아니라 그를 택했을까. 역시 곁에 없었기 때문인걸까. 나른한 표정으로 카쿠의 좋은 점들을 늘어놓는 미나의 말에 경청해주던 효타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역시 이번에도 미나의 말을 모조리 들어준 뒤였다.






"바나나 케이크 하나랑ㅡ."

"미나, 내가 다 주문해놨어. 기다리는 시간 아깝잖아? 아이스박스에 넣어뒀으니 가는 길에 녹을 걱정도 없다구~."

"아, 고마워. 애들 기다리겠네. 그럼 다음에 봐."





다음을 약속하는 문장이 두번째 만남에서 흘러나온다. 뛸듯이 기쁜 마음을 억누르며 손끝을 여상히 흔들어 배웅한 후, 효타의 고개가 살포시 비틀린다. 뒤에 놓인 테이블에 책상을 부술듯이 노려보고 있는 카쿠를 흘겨보는 시선은 흥미와 즐거움으로만 가득 번들거리고 있었다.






"책상 부수면, 그것도 학생회비로 메꿔야하는건가?"






빠직. 이런, 책상에 금이 갔다. 안타깝다는 듯 휘파람을 불어 책상의 명복을 빌어주는 효타를 향해 낮고, 살벌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으르렁거린다. 이전과 달리 장난이 아님을 드러내듯 날이 잔뜩 서있다 못해 그대로 달려들 기세인 목소리였다.





"언제까지 그녀 주변을 맴돌 생각인겐가, 효타."

"으음~.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나올줄은 몰랐는데~. 사실 방금 결정했거든."

"....?"





효타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마음껏 날뛰어도 좋다고 허락을 받았을 때 흡족해하는 루치의 표정을 닮아있는 모습. 카쿠가 본능적으로 경계하며 주먹을 움켜잡는 순간 효타의 입이 벌어지고 그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쏟아낸다.





"미나랑 더 가까워지고 싶네?"

".....너."

"기왕이면 사귀어보고 싶고. 가능하면 계속 곁에 있고 싶고ㅡ"

"너."

"어쩌지, 난 질 자신은 없는데. 너랑 달리 난 한번 매달리면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재주가 있거든!"

"...야."

"너무하네, 선배한테~."







능청스럽게 이어나가던 말이 끊기고 카쿠의 주먹이 효타의 뺨을 스친다. 찰나와 같았던 순간이었으나 그 짧은 순간에도 고개를 비틀어 방향을 바꾼 효타와, 그런 그를 따라 허공에서 궤도를 바꿔낸 카쿠였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실력면에서는 비등했다.



마음먹고 나선다면 오히려 효타 쪽이 조금 더 우세하리라. 언론전과 온갖 정보들을 풀어 본인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도가 튼 녀석이었으니 오히려 나선다면 패배는 불보듯 빤한 일이었다.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대치상태를 유지하는 카쿠와, 그런 그가 가소롭다는 듯 느긋하게 바지주머니에 손까지 넣어놓고선 생글거리는 효타다. 불안하게 떨리는 동공을 바라보며 그와 똑 닮은 빛깔을 띄운 효타의 눈동자가 둥글게 말려올라간다.





"잘해보자?"





같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을 내뱉는 저 입에 주먹을 꽂아넣을수만 있다면. 카쿠의 턱이 힘차게 물리고 힘줄이 드러나도록 쥐어진 주먹이 애꿎은 땅에 박혀 파르르 떨린다.




자신과 똑같은 빛. 카쿠는 이제 효타가 미나에게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눈치였으나 카쿠, 본인은 그 감정을 몇년이나 끌어안고 버둥거렸으니 그 의미를 모를리가 없었다. 그건 분명 연심이 아니었다. 그건 단순한 사랑이 아니었다.




그들의 사랑은 소설책에 나오는 것처럼 풋풋하지 않고 싱그러운 여름의 빛도 없었다. 그들의 사랑은, 질척거리는 붉은빛과 발목을 움켜잡고 수렁으로 끌어당기고자 작정하고 힘주어 당기는 관계였다.



그리고 그걸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칭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소유욕이라 불렀다. 제 품안에 당겨 사랑스러운 것을 담아놓고 남에게는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을 사랑이라 칭하지 않았다. 나락으로 떨어지더라도 같이 떨어지자 발목을 움켜잡고 끌어당기는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감정이 아니었다. 하여 카쿠는 이를 악문 채 효타를 미나로부터 떨어뜨릴 계획을 부지런하게, 머릿속에서 굴릴 따름이었다.




감정에 대해서만큼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무지의 사랑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사랑이 아님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자신이 어디에 위치했는지를 알아차릴 터였으니. 카쿠는 이번에도 그 풍랑과 매서운 바람에 그녀가 깎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제 품을 한번 내려다보는 것이다. 그녀를 품을 정도로 넓은지, 그녀가 마음놓고 자신을 탐낼 수 있을만큼 단단한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다.




계절이 바뀌는 시간 동안, 그 바람에 생채기라도 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몫이 될 것임을 알았다. 그녀의 눈물 한방울이 심장을 그어내리는 핏방울이 될 것임을 알았으니까. 가을은 금방 스친다. 곧 겨울이었다.



괜찮아. 그리 속삭이는 음성은 자신을 위해서다.



다시 한번 괜찮다고 되내이며 일어선 몸이 흔들거릴 때, 카쿠는 굳건하게 힘주어 발을 내딛고 균형을 바로잡는다. 그동안 얼마나 수많은 연적이 그녀를 탐내었던가?




그 추잡한 손들을 치워낸 것도 그의 몫이 맞았다. 효타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성 친구가 곁에 있으면 미칠듯이 불안했고 마음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웃음소리는 행여 남이 들을까 귀들을 모조리 뜯어내버리고 싶었으니까. 하다못해 동성 친구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보내는 것을 멈출수가 없었으니 효타의 눈은 매우 정확한 셈이었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자신이 그녀의 곁에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녀가 힘들었던 때, 그녀의 찰나와 스치는 하루마저도 카쿠는 그녀의 곁을 올곧게 지켰다. 그렇게 하여 얻어낸 자리를 어디 순순히 빼앗기겠는가? 카쿠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남은 책상이 부서지도록, 힘주어 잡으며 카쿠는 입꼬리를 당겨웃었다. 어느새 제법 효타와 닮아보이는 미소였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고. 바보자식의 사랑 같은 건 치우기 아주 간단하니 말이네..."





바보는 영원히 바보로 남아있어야했다. 그가 영원히 자신이 품은 감정을 모르도록, 카쿠는 최선을 다해볼 심산이었다. 실로 아둔하여 추잡하기까지 한 수컷들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멀찍히 바라보며, 미나는 고고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그들의 재롱을 한껏 지켜볼 심산이었다.



원래도 귀여운 수작질을 부리는 카쿠와 새롭게 등장한 만만치 않은 녀석. 살살 눈웃음을 치면서도 정확하게 미나의 취향만을 파악해 마음에 드는 행동만 쏙쏙 골라하는 것이 카쿠가 괜히 위협을 느끼는 게 아니었다.




처음에 먹었던 컵케이크, 생각보다 굉장히 취향에 들어맞아서 혼자 가서 몇번이나 사먹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른한 기지개를 피며 가을의 볕을 만끽하는 미나다. 귀가 있었더라면 까닥이며 기분좋게 햇빛에 녹아내렸을 듯한 포즈를 취하며, 미나의 걸음 또한 편안하게 퍼진다.




결국 자신이 고를 선택지는 하나겠지만 뭐 늘어난 후보군 역시 나쁘지 않으니 재롱이나 구경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미나의 미소가 상쾌하게 가을하늘을 향해 비추어진다. 청명하고 구름 한점 없는 날씨, 바람은 딱 시원하고 서늘한 느낌이었다. 가늘게 뜬 적안이 카쿠를 닮은 미소를 자아낸다.




많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즐거운 계절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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