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MOMO(@MOMO_jabduk)

🐊
따지자면 그것을 소유욕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자신을 향해 달아오른 눈빛을 숨기지도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천박함과, 수도 없이 마주할 때마다 번들거리는 그 감정을 그는 기꺼이 소유욕이라고 부르곤 했다.

아니라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괜히 수고스럽게 정보를 캐살 이유가 없었으니까. 친애와 호의라는 낯간지러운 말로 포장하여 들이밀고 먹잇감을 노리듯 부드럽게 제 주위를 빙빙 돌지 않았을테다.

누군가와 이야기라도 나누고 있다면 반드시 찾아와 훼방을 놓는 그의 감정은 누가 보아도 그것은 집착이었다. 그러니 네가 안되는거다. 단호하게 내리그은 선에 삐뚤어진 웃음을 보이는 그다.

서운하다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고 늘씬한 손가락을 까닥여 제 품에 가두려는 실을 차갑게 쳐내며, 그는 감히 제 자유를 속박치말라 경고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 곁에 머무를 일은 없을거다. 그 정신나간 새장 안에 갇혀 살 바에야 차라리 말라비틀어져 죽어버릴테니. 사납게 찢어진 검은 동공이 붉디 붉은 선글라스에 고스란히 반짝였다.


🦩
따지자면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겠다.

곁에 없으면 보고싶고, 한시라도 무얼하는지 궁금하다면 그것을 사랑이라 칭하지 않는가? 그의 불행은 사랑의 방식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 뿐이었다. 멀리 있으면 걱정되어 곁에 두고자 함이 집착인가? 아니, 그건 친애였다.

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을 몰라 제 식대로 해석했을 뿐이었다. 사랑하는 이가 원하는 방식이 따로 있다면 분명 바꾸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녀석은 그게 집착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눈치였지만 어쩌겠나? 먼저 사랑하고 친애하는 녀석이 지는 게 사랑이라고 하지않는가.

하여 그는 이번에도 이기지 못할 터였다. 저 멀리 다가오는 폭풍을 바라보며 자존심 강한 그가 감히 자신을 도우러 오지 못하도록 눈을 부라릴 것이었다.

훗, 앙칼진 것도 정도가 있지.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신문 한복판에 새겨진 얼굴을 바라보고, 그 곁에 나열된 활자들을 쏘아보며 그는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밋밋한 사진을 쓸어보았다. 언뜻 위스키와 독한 시가의 향이 나는 듯한 사진.

그 노오란 눈동자를 붉은 선글라스의 창 너머로 바라보며, 그는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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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MOMO

*커미션 글입니다.
*드림글입니다.




하필이면 그날, 날씨는 끔찍할 정도로 완벽했다.




깨끗하고도 청명한 소라빛의 하늘. 마치 신이 실수로 뿌려서는 안되는 물감을 온 사방천지에 다 흘려버린 것처럼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린 하늘이었다. 바람은 또 어땠는가? 이제 막 봄이 오고 있음을 드러내듯 서늘한 한기를 몰아내는 남동풍이 불었다. 슬며시 뺨을 어루마지고 달아나는 바람의 숨결에 은근하게 붙어있는 꽃향기까지. 어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피크닉을 가기에 가장 걸맞다 못해서 이런 날씨에 책상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라고 말할 정도로 근사한 날씨였다.





친구들은 곁에서 몇번이나 대화 주제를 바꾸어가며 조잘조잘 떠들었고 남자들은 시끄럽게 투닥거리며 먼지를 날렸다. 그래, 정말이지 훌륭하고도 괜찮은 분위기라고 말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이 수학여행을 떠나는 길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것도 장소가 매우, 아주, 심하게, 문제였다.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고 배낭의 끈을 만지작거리는 미나에게 불쑥, 새카만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온다. 의아한 낯으로 도대체 왜 그녀가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순진무구한 표정. 어쩌면 그녀가 제법 좋아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를만큼 익숙한 표정이었다.






"미나, 자네 삐졌는감?"

"아니."

"거짓말, 지금 볼이 얼마나 부었는지 아는감?"





거울 좀 보게나. 얼마나 부풀어올랐는지 다람쥐가 생각이 날 지경일세, 아니면 토끼도 괜찮고. 토끼는 화가 나면 귀가 이렇게 벌어진다는데. 최선을 다해 농담을 던지고 근처를 기웃거리는 카쿠의 반응에 줄곧 툭 튀어나와 있던 볼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린 미나가 심통이 난 표정의 원인을 드디어 조그맣게나마, 입을 열어 털어냈다.





"어인시는, 너랑 같이 가기로 했었던 곳이잖아."





까만 눈동자에 들이치는 잔잔한 기쁨의 파도다. 선명하게 어른거리는 순진무구하고 완벽무결한 환희. 그녀의 말처럼 그들은 약속을 했었다. 도무지 나올수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던 진창 속에서 그녀를 끌어당기며 조그맣게 속살거렸던 수많은 약속들 중 하나였다.


아이스크림을 먹자, 우리랑 같이 놀러가는거야, 피크닉을 가자, 가서 샌드위치를 먹고 예쁜 돗자리 위에 앉아서 해가 뉘엿하게 지도록 얘기를 하는거야. 어떤 얘기든 상관없겠지. 앞이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어둠속에서 별빛처럼 눈앞의 아득함을 날려주었던 수많은 약속들. 그녀가 그것들을 잊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기억해주는겐가? 지금 기뻐서 심장이 막 널을 뛰는 것 같구만."

"...뛰든가. 몰라."






다시 툭 튀어나온 볼이 원래의 크기만큼 부풀어올랐지만, 카쿠의 볼은 옅은 분홍빛으로 물들어진 채 그저 헤죽, 입꼬리가 광대에 걸리도록 웃느라 여념이 없었다. 유독 살뜰한 표현에는 재능이 없어 알아서 신호를 잡아채야 했던 이전에 비하면 얼마나 솔직하고도 확연하게 드러내는 감정인가.




베싯 새어나오는 웃음을 내건채로 그녀의 주변을 맴돌던 그의 걸음이 멈춘 것은 집합소리 때문이었다. 곁에서 아주 지긋해 죽겠다는 듯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버린 루치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오고 곁에서 토하는 시늉을 멈추지 않았던 재브라가 멈추었다. 이제 막 익어가는 싱그러운 복숭아의 색으로 뺨을 물들였던 미나가 서있던 자리에서 다급하게 벗어나며 나중에 보자, 짧은 인사를 남기고 버스 속으로 몸을 던져넣었다. 아쉬운 시선으로 버스가 떠날 때까지 줄곧 시선을 떼지도 않고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카쿠가 마침내 시선을 돌린 곳은 기가 차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스팬담이었다.





"할말이라도 있습니까, 스팬담 선생님?"

"아니.. 참 열성이다 싶어서... 이제 아련 다 떨었으면 버스 타면 안될까? 우리가 가장 늦어..."

"학생회는 교칙을 수호하는 것도 있지만 외부 행사에 다녀오는 학생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 또한 학생회의 일~! 아, 마땅히! 학생회의 일이로다!"

"시끄러워, 쿠마도리."






투덜거리는 음성과 익숙한 목소리들 사이로 자신 역시 끼어들어가며, 카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먼저 앞서 걸으며 운전 기사에게 가장 안전한 길로 가라며 윽박지르는 스팬담 선생과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앞에 앉는 루치, 마찬가지로 역시 스팬담의 걱정이 과민반응이라며 대놓고 비웃는 재브라와 쪽팔린다며 성희롱이라고 다짜고짜 외치는 칼리파, 묵묵하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으며 가장 정상적인 반응으로 자리에 앉는 블루노와 챠파파, 신나게 웃으며 가장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후쿠로까지. 카쿠는 그 모든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흑발의 그녀를 그 풍경 속에 추가해보았다.





역시,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었다. 저 멀리 앞서 사라지고 있는 몹시도 시끌벅적하고 산만한 1학년의 버스가 아니라. 카쿠의 표정이 굳어지자 재브라는 말을 걸려던 입을 다문채 한숨을 푹 내쉬었고 칼리파는 카쿠의 심정에 공감하는 듯 손끝으로 안경을 밀어올리며 고개를 단호하게 끄덕였다.






"스팬담 선생, 차라리 그냥 미나를 아예 학생회로 데리고 오면 안됩니까? 저 꼬라지 좀 작작 보고 싶은데."

"재브라, 가는 길은 1학년 버스 타고 오는 길은 학생회 버스 타고 오기로 이미 결정했잖아. 누가 들으면 1학년 버스로만 움직이는 줄 알겠다."

"가는 길도 오는 길도 학생회로 같이 움직였으면 좋겠는데."

"카쿠, 버스 정한 건 미나거든? 미나의 의사를 무시할 셈이냐고, 어이."





그렇지만. 시무룩하게 몇번 중얼거리던 말은 스팬담의 '미나의 뜻이다'라는 말에 결국 힘없이 추락해버리고 말았다. 미나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지, 응, 어쩔 수 없어. 도란하게 미나의 의견이라면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인 학생회들과 달리 차라리 오는 길에 아주 끝내주게 잘 놀아서 1학년 버스의 추억은 날려버리자는 제안을 하는 칼리파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의견이 마음에 드는 듯 눈을 반짝거린 카쿠가 가세하고 쿠마도리와 후쿠로가 참여하는 대토론의 장에 루치는 말없이 눈을 감으며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결국 그의 투표권은 카쿠가 가져가서 대신 찬성해 버렸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미나는 오는 길 버스에서 노래방부터 시작하여 단체로 춤추기, 오락게임과 보드게임까지 살뜰하게 구성된 시간표를 맞이할 운명에 처해질 지경이었다. 흥이 오른 듯 점점 추가되는 사항에 스팬담은 잠시 말리고자 입을 열었으나, 관두기로 했다. 학생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얼마만인데, 무엇보다 미나라면 이런 정신없는 시간표라도 봐야 즐길 테니까. 걔는 노는 법을 모르니까.




학생회의 버스가 가장 늦게 출발했음에도 가장 먼저 도착하는 건 신호 위반으로 봐야하려나, 스팬담의 표정이 점점 난감해지기 직전 드디어 1학년의 버스가 슬그머니 어인시에 들어왔다. 버스가 정차하자마자 손살같이 달려가 입구에서 차분하게 기다리고 있는 카쿠의 움직임에 어이가 없다는 감상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학생회였다.





"미나, 오는 길 불편하지는 않았는감?"

"음. 너무 시끄러웠어."

"저런, 우리 버스는 무척이나 조용했네."





오는 길에 짰던 계획을 모조리 파기해버리며 상냥하게 웃는 카쿠였다. 아니었잖아, 시끄러웠잖아. 황당하다는 감정을 얼굴 그대로 띄워내는 스팬담의 얼굴을 슬그머니 등짝으로 가려버리며 카쿠의 미소는 생글생글 아까와 달리 산뜻했다.




그러니 오는 길에 같이 오면 참 좋겠구만. 오는 길 내내 지쳤을테니 말이네. 카쿠의 말에 미나는 잠시 고민하듯 적안을 도륵 굴려 1학년 버스에서 뒤늦게 내리며 엄살을 피우는 비비, 나미와 로빈 쪽을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시선을 돌려 자신을 기다리듯 일렬로 선 채 시선을 떼지 않는 학생회 쪽을 바라보았다. 카쿠가 여겼던 '그녀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듯 쏙 비워져있는 한자리. 미나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씰룩, 올라간다.





"그래야겠네."

"...! 응, 꼭 그래주게나."





다정하게 어깨를 그러잡고 푸근하게 웃어보인 카쿠와 함께, 신세계 중학교의 수학여행이 시작되었다. 시끌벅적하게 독특한 거품과 방울을 타고 다니는 어인섬들의 주민들을 향해 신기하다는 시선을 숨기지 않는 1학년 학생들이 우르르 뛰어나가고, 한번 와본적이 있는 2학년들은 비교적 체계적으로 움직이며 원하는 코스를 짜온대로 무리지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서있던 학생회들은, 스팬담의 선언을 시작으로 움직일 준비를 마쳤다.





"아까 애기했던대로ㅡ 재브라, 블루노는 3학년을 맡는거다. 2학년은 후쿠로랑 쿠마도리. 1학년은 카쿠랑 칼리파, 그리고 루치다. 1학년들이 어인시의 주민들에게 민폐 끼치지 않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한 거다!"





애들 다치게 하지 말고. 비교적 뒤늦게 붙여진 경고에 코웃음을 가볍게 치는 것으로 대꾸한 루치가 가장 먼저 날뛰듯 사라진 루피의 뒤를 따라 사라졌고 이어 급하게 사라지는 인원들에 혀를 가볍게 차고는 손끝으로 안경을 밀어올린 칼리파가 고개를 돌려 카쿠를 바라보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지극히 당연해보이는 반응이었다.





"자, 그럼 망아지들처럼 날뛰는 1학년들은 루치가 관리해줄테니 이때를 틈타 미나를 데리고 가시죠."

"음? 그래도 되겠는감? 자네들도 미나랑 놀고 싶어하지 않았는감."

"저희는 마지막 날에 움직여도 괜찮습니다. 원래 기억은 마지막 날이 더 임펙트가 있지 않습니까."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어보인 칼리파를 향해 벙찐 표정을 지어보이는 카쿠였다. 그럼 이만, 이라는 말을 장난스럽게 남기고 훌쩍 뛰어 바람처럼 사라지는 칼리파의 금발을 멍청하게 바라보는 검은 시선이었다. 엉겁결에 둘이 남아버렸다는 듯 서서히 볼을 붉히는 카쿠를 향해 미나 역시 구태여 둘만 남았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었고 카쿠의 부끄러움이 설렘으로 완전히 뒤바뀌고서야 그는 쭈볏쭈볏 망설이며 투박한 손을 들어올렸다.




곱고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손이 그 위에 툭, 성의없이 올려진다. 희고 투명하다고 말할 정도로 창백한 손이었다. 그 속에 썩어있는 수많은 피와 고름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다정한 온기가 머금어져있는 단단한 손이 그것을 붙잡았을 때 미나는 비로소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순수한 미소였다.





"어디부터 갈까."

"아쿠아리움."





이전에는 엉성하게 고개를 비틀고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을 것이다. 어디든 자신은 좋다며 입을 다문 채 창백한 낯 그대로 무표정을 유지했을 터였다. 그녀와 함께 했던 훈련 내내 그 태도를 고수하기는 했다. 루치마저도 질렸다는 표정을 짓곤 했으니까. 덕분에 많이 싸웠지. 그날의 추억을 떠올리는 듯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로 둘의 손이 서로 굳건하게 엉킨다.





"그럼 거기부터 가세."





흔쾌히 걸음을 옮기는 카쿠의 발자국에 맞춰 동일한 걸음을 걷는다. 카쿠의 여덟 발자국이 미나의 열 발자국이 되도록, 그의 열번째 발자국이 미나의 열두번째 발자국이 되도록 둘은 그렇게 어렴풋 발을 맞추었다.



새파란 물결의 그림이 그대로 인쇄된 표를 두장 구입한 그들이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아침에 보았던 청명한 하늘보다 더 푸르른 바다였다. 아예 내부 공간을 바다로 채워넣은 듯 두껍고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생소한 물고기들이 꼬리를 치며 스쳤다. 오른쪽의 벽도, 왼쪽의 벽도, 하다못해 고개를 들어올리면 천장까지도 투명한 유리로 막힌 모습은 마치 바다 한가운데에 던져진 듯해 도리어 답답함마저도 느껴질 지경이었다.





다채로운 원색만 골라넣은 것처럼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열대어가 미나의 왼쪽 유리관을 스치고 손살같이 사라진다. 멍하게 충격으로 휩싸인 얼굴이 괜스럽게 뿌듯해, 카쿠는 몰래 손가락을 까닥여 직원을 불렀다. 약간의 돈과 보너스를 후하게 지불하고선 가자미의 귀여운 머리띠를 구입한 카쿠가 그녀의 머리 위에 살포시 머리띠를 꽂아넣을 때까지 미나는 적안 한가득 푸르름을 담아냈다.





"선물일세, 이런 건 원래 놀러왔을 때 하나씩 써야한다던데."

"넌 안써?"

"쓸 걸세. 씌워주겠는감?"





슬그머니 허리를 숙이며 발끝을 세우는 카쿠를 향해 미나는 픽 입꼬리를 올려보였다. 속이 훤하게 보이다 못해서 아주 투명한 유리창 수준이었으나 그마저도 결국 좋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마도 그녀가 그만큼 그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거짓말을 하는 그 입술이 퍽 귀엽게 느껴지는 것도,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리며 씩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도 전부 다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니까, 라는 이유로 납득이 되곤 했다.




형형색색의 빛깔을 자랑하듯 꼬리를 펼치고 지느러미를 기지개를 피듯 쫘악 펼친 채 우아하게 구애를 하는 열대어들이 빼곡하게도 많았다. 고개를 돌리며 저쪽은 온통 에메랄드, 이쪽은 온통 루피와 사파이어를 가득 담아놓은 통 속에 있는 듯했다.





"그러고보니 미나, 혹시 어떤 물고기를 좋아하는지 물어봐도 되겠는감?"

"물고기는 생각해본적이 없는데. 좋아하는 동물은 따로 있거든."

"이런, 난관이구만. 물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어인섬이라니, 패착이로군."

"한번은 와보고 싶었으니 괜찮아."






지금 이 시간이 나는 흡족하거든. 탐욕스럽게 배불리 먹은 토끼처럼 입을 오물거리며 웃은 미나를 향해 카쿠는 화악, 볼을 붉혔다. 때마침 그린 듯 푸르스름한 조명이 사방천지에 있었으니 자신의 붉은색은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안일하고도 깜찍한 착각을 품은 채 말이다. 온통 새파란 이곳에 어울리지 않은 붉은색을 바라보며 적안을 둥글게 휜 미나는 그대로 가볍게 몸을 돌려 다음 회랑으로 향했다. 열대어들을 지나 이제는 묵직하고도 살벌한 인상을 가진 상어계열 쪽의 생물들이 있는 곳이었다. 마친가지로 튼튼한 유리관 너머를 부드럽게 헤엄치는 지느러미들을 바라보며 카쿠는 안절부절, 미나의 주변을 맴돌았다.





"무섭지는 않은감? 답답하지는? 혹여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내게 말해줘야하네."

"조금도 무섭지 않아."





네가 지켜줄거잖아? 천연덕스럽게 흘러나온 발언에 다시금 카쿠의 볼에 여름이 선뜻 들이차고 어쩔 줄 몰라하는 그를 향해 낮게 키득거린 미나의 걸음이 심해를 지났다. 톱날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물고기들이 우아하고도 근엄하게 그들의 천장에 있는 유리관을 스치면 한순간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는 것이 제법 별의 반짝임을 닮아있기도 하는 것이다. 밤하늘 길잃은 것처럼 위태롭게, 때로는 우아하게 반짝이고 흔들리던 빛을 떠올린 미나의 눈이 아련함을 품는다.





긴 시간에 걸쳐 한걸음, 또 한걸음을 내딛으며 오랜 시간 동안 깊고도 다양한 푸르름 속에 갇혀있었던 둘은 어느새 환하게 밝아져오는 조명에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에 들이닥친 또다른 색채의 향연에 입을 다물었다. 보송한 털과 인공모피로 만들어진 가오리 모습의 인형, 아까 보았던 푸르름을 닮은 깨끗한 액체가 담긴 키링과 모래시계 등 온갖 물품들에 그제서야 도달한 끝이 굿즈샵임을 알아차린 카쿠가 헛웃음을 짓는다.





"기막힌 상술이구만."

"난 좋은데. 지금까지 봤던 걸 정리해주는 기분도 들어서 난 좋아."

"내 말의 의미는 근사하다는 뜻이었네. 자네 원하는 것이 있는감? 뭐든 내가 사줌세."





루치의 지갑을 훔쳐왔거든. 장난기가 다분한 얼굴로 싱글거리는 미소를 향해 미나 역시 함박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루치가 엄청 화내겠네, 나중에 알아차리면. 미나의 놀리는 듯한 말에 그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일 뿐이었다. 아무렴 미나를 위해 쓴 돈인데 제깟 게 화를 내면 어쩌겠느냐는 듯한 모습이었다.



실로 미나를 위해서 사주었다고 하면 편이 되어줄 사람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이번에도 다수와 싸워야하는 억울한 루치에게 미리 애도를 표하며, 미나는 욕심껏 분홍색 가오리 인형을 집어올렸다. 마치 쿠마도리의 머리색을 똑 닮은 듯 전체적으로 옅은 분홍빛 털로 만들어진 인형이었다. 단번에 그녀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골랐는지 알아차린 카쿠의 검은 눈동자가 잠시 질투로 일렁거렸으나 미나의 적안이 짧게 스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하고도 둥글게 웃고 있었다.





이어 칼리파의 금발을 닮은 노란색 가오리 인형, 재브라를 닮은 빨간색 눈매가 사나운 고래상어 인형, 후쿠로를 닮아 둥글둥글한 복어 인형과 블루노를 닮아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벨루가 인형, 하다 못해 루치에게 줄 생각인지 작은 펭귄용 넥타이까지 바구니에 골라넣은 것을 보고 카쿠의 눈매가 힘없이 내려갔다.





"미, 미나.. 혹시 빼먹은 게 있지 않은감?"

"까먹었네. 이것도 챙겨야지."





마지막으로 연보라색의 키링까지 바구니에 던져넣는 것을 보고 더더욱 울상이 되어가는 카쿠의 얼굴이었다. 내 것은? 그리 얼굴로 물어오는 등뒤에 꼬리와 귀가 달렸다면 분명 축 늘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미나는 애써 웃음을 참기 위해 무표정을 지어보였다. 필사적으로 힘을 주어 내리는 입꼬리에도 어쩔 수 없이 자꾸만 올라가는 광대는 냅다 고개를 돌려버림으로써 감춰버렸다.




"미나...."





끙끙거리다 못해 결국 아예 시무룩하게 고개까지 푹 숙여버리는 카쿠 몰래 커플 키링 두개를 쌍으로 담아버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노란색의 돌고래와 자신을 닮은 검은색의 돌고래. 눈이 반대인 것도 재미있는 구성이었다. 노란색 돌고래의 빨간 눈동자, 검은색 돌고래의 검은 눈동자. 마치 이 녀석의 일부는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돌고래 장식에 굿즈샵에 왔을 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던 물건들이었다. 나중에 서프라이즈로 줘야지.




그녀의 깜찍한 각오는 아쉽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계산대의 직원이 물건의 바코드를 하나하나 찍을 때 들통이 난 두개의 키링에 언제 시무룩해졌느냐는 듯 금방 반짝거리며 생기를 되찾는 카쿠였다.




쳇. 속으로 혀를 차는 미나였으나 용케 반짝거리는 눈망울은 들켰어도 섣불리 자신의 것이냐고 묻지 않는 카쿠를 보고 패배를 먼저 선언한 것은 미나였다. 차라리 자신의 것이냐고 묻는 게 더 나을 정도로 흐뭇하고, 뿌듯하며 기뻐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카쿠에게 그게 그의 것이 아니라고 차마 말할수는 없었다. 장난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상처를 받을테니 더욱 곤란했다.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 투덜거리듯 입술을 삐쭉 내밀었던 그녀는 순순히 카쿠의 것이라며 노란색의 빨간 눈을 가진 돌고래 키링을 카쿠의 손에 쥐여주었고 검은 눈과 검은 돌고래의 키링을 자신의 가방에 거는 것까지 집중해서 보고 행복하게 웃음을 짓는 카쿠를 바라보고선 결국 픽 웃어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뭐든 상관없나 싶을 정도로 그의 미소는 천진난만했다.





한가득 들어있는 쇼핑백을 때마침 아쿠아리움에 들어온 루피 일행을 감시하러 온 루치에게 떠넘겼을 때 그의 표정을 보는 것도 웃겼다. 각자 알아서 들어있으니 가져가라는 말에 학생회비를 쓴 것이냐고 차갑게 물어오는 루치도, 그 말에 태연하게 미나가 구입한 건데 어쩔 거냐는 식으로 반응한 카쿠를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아쿠아리움에서 나오자 시간이 꽤 지난 것인지 어느새 해는 슬그머니 기울고 있는 때였다. 예약한 숙소 앞에서 모이는 시간은 오후 6시, 시간이 그렇게까지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다음 장소로 어디를 갈 거냐고 묻는 듯 고요히 시선을 돌리는 미나에게 카쿠는 당당하게 앞장서서 머메이드 카페로 그녀를 안내했다. 어쩐지 연신 그녀를 흘끔흘끔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씰룩거리고, 다시 애써 웃지 않으려다가 또 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까지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환영합니다~. 머메이드 카페입니다! 몇분이신가요?"

"두, 둘이오. 그리고 음.. C코스로 부탁드리는구만."

"오! 이전에도 방문해주셨던 고객님이신가요?"





아까 보았던 물고기들의 지느러미보다 더욱 우아하게 움직이는 물갈퀴에 잠시 넋을 놓았던 미나의 눈이 금방 홉뜨여진다. 감히? 그리 묻는 듯한 표정에 카쿠에게 퐁퐁 식은땀이 솟아나기 시작한다. 무슨 그런 말을 하냐며 힘차게 두 손을 흔드는 카쿠에게 눈웃음을 친 인어가 부드럽게 꼬리를 움직여 화가 난 미나의 등뒤로 스르륵 멈춘다.





"호호, 농담이랍니다. 자, 그럼 C코스로 안내해드릴게요. 예쁜 아가씨, 이쪽으로ㅡ."

"해명은 나중에 할테니 따라가 주면 안되겠는감... 큼, 절대 아니네. 오려고 했으니까 당연히 이것저것 알아봤지. 재브라에게 부탁해서 들었던 안내야."

"재브라 고객님? 아, 자주 오시죠! 호호, 매번 올 때마다 차이는 걸 구경하는 것도 재밌는 일이랍니다."





1년에 두번씩 오셔서 똑같은 여성분에게 고백했다가 차이는 건 흔치 않은 구경이잖아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인어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이라고 해명하는 눈동자에 의심의 빛을 거두지 못하며 미나는 떨떠름하게, 인어의 손에 붙잡혀 그녀가 이끄는대로 자박자박 발걸음을 옮겼다.



STAFF ONLY라고 쓰여있는 직원용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능숙하게 C코스라고 외치는 인어의 말에 벤치와 한켠에 마련되어 있는 수영장에서 꼬리치던 인어들의 눈이 반짝이는 것은 순간이었다. 여기 직원용 아니었어? 속으로 비명처럼 외치는 의문에 상관없이, 미나는 덥썩 인어들의 손에 붙잡혀 순식간에 의자에 앉혀졌다.





"자, 잠깐, 뭐하는ㅡ."

"어머어머, 지금 입 벌리면 화장 다 번진다? 예쁜 손님, 조금만 기다려줘."

"화장? 아니, 뭘 하길래 화장을."

"말하지 말라니까?"





우르륵 자신의 얼굴 위로 무언가 지나는 듯한 느낌에 잠깐 인상을 쓰자마자 인어들의 호들갑스러운 지적이 빗발친다. 아마도 화장품을 두드리는 듯 토독, 분주하게 쿠션을 내리치는 소리와 립을 바르는 듯 시원스럽도 찐득한 소리 역시 들리는 것을 보며 미나의 감정은 점점 해탈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뭘 하든, 이게 전부 C코스라는 말 덕분인 것 같으니 나가자마자 카쿠에게 해명을 요구할 것이라고 다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 됐다ㅡ! 이제 눈 떠도 좋아, 예쁜 손님!"






한껏 멍청해진 기분에 미간을 좁히며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머메이드 카페의 직원들에게 입혀져있던 늘씬한 의상과 요염한 화장으로 인상이 확 변한 자신의 모습이었다. 붉은색의 섀도우와 검은색으로 더 살짝 올라간 눈꼬리, 이어 눈아래에 조개가루처럼 하얀색과 파란색, 그리고 연보라색으로 반짝이는 글리터까지 이전의 서늘하고 얼핏 단조로웠던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검은색의 머리카락은 더욱 돋보이도록 살짝 묶어올려 인어처럼 물고기의 비늘을 비녀로 꽂아넣었고 입고 있는 옷은 사막의 무희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늘하고, 언뜻 안에 입은 옷이 비쳐보이는 얇은 옷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물들어져가는 그녀를 뿌듯하게 바라본 인어들이 미나를 향해 화장시킬 보람이 있다, 본판이 역시 아름다워야 한다, 매혹적인 분위기라 더 좋아진 것 같다, 칭찬을 늘어놓고선 꺄르륵 웃음을 터뜨리며 일제히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대체 C코스가 뭐길래? 영 당혹감을 씻어내지 못하는 미나를 위해 안내라도 해주려는 듯 그녀의 손목을 잡아끈 인어가 부드럽게 바닥을 쓸며 얼굴을 내밀었다.





"손님, 여기 처음이지? C코스도 완전 처음 듣는 거고."

"...그러네요."

"푸핫, 진짜 막무가내로 데리고 온 모양이네! 섬세해보이더니 은근 이런 면에서는 저돌적인건가? 어머, 자기, 그렇게 사납게 눈 뜨지마. 난 자기 남친은 관심없어. 오히려 자기의 여자친구 자리라면 좀 탐나는데."





당최 이해할 수 없는! 확 달아오르는 미나의 반응에 더 재밌다는 듯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 인어는 다시금 늘씬한 손가락을 살짝 흔들며 비로소 머메이드 카페의 C코스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Couple 코스.


본인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데리고 와 인어처럼 꾸미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주는 코스였다. 전문 사진사까지 있을 정도라며 나름대로 머메이크 카페의 숨겨진 코스라고 어깨를 으쓱인 인어는 경악하는 미나를 향해 손끝으로 오호호, 물거품이 터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자아냈다.



아마 밖에서 카쿠는 몹시 기대하며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인어의 말에 왜 카쿠가 여기까지 오는 내내 안절부절 눈치를 보았는지 깨달은 미나가 분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자 인어는 어머, 감탄사를 내뱉으며 미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남자친구 쪽도 우리처럼 하고 있을걸? C코스ㅡ Couple 코스란 말이지. 한쪽만 하는 건 억울하잖아?"





그 말에 순식간에 기대하는 표정으로 바뀌는 미나에게 다시 한번 경쾌하게 웃음을 터뜨린 인어가 마지막으로 미나의 머리 위로 물갈퀴 모양의 머리띠를 씌워주며, 입꼬리를 당겼다. 대망의 하이라이트라며 룸으로 안내받은 곳에는ㅡ 정말 인어의 말대로, 잔뜩 긴장해서 경직하고 있는 인어 모습의 카쿠가 있었다. 엉성하게 자신과 같은 물갈퀴 모양의 머리띠를 하고선 자신처럼 눈 아래 반짝이는 글리터와 펄까지 바르고, 결국 미나는 화내려던 것도 잊고 그 이질적이고도 신선한 모습에 입을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미, 미나..!"

"이런 거면 먼저 말을 해주지 그랬어."

"말해주면 안 해줄까봐..."





어쨌건 당혹스러울 것은 예상했다는거네? 짐짓 눈꼬리를 올려 사납게 그를 쳐다봤으나 홀린 듯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카쿠의 표정에 화내려던 마음이 팍 식어버린 미나는 한숨을 내쉬고 자신 역시 카쿠의 얼굴을 뜯어보듯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검은 눈동자 아래 반짝이는 펄은 본인이 고른 것인지 노란색을 띄고 있었고 물갈퀴 머리띠 역시 노란빛을 머금은 푸른색이었다.




그렇게 서로의 얼굴을 관찰하느라 여념이 없는 두 사람은 어느새 거리가 가까워진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빤히 바라보았고, 눈 아래의 펄을 구경하겠다며 서로의 얼굴이 과하게 가까워진 순간 한쌍의 입술이 가볍게 톡, 마찰했다. 소스라치게 놀라 펄쩍 뛰어올랐다가 자신의 허리에 묶인 인어 지느러미를 밟고 그대로 뒤로 나자빠지는 카쿠와 마찬가지로 깜짝 놀라 굳어버린 미나였다.





"...바, 방금 건 무효네. 우리 아직 미성년자이기도 하니까.."

"당연히 무효지."







그럼 뭐 첫키스라도 바랬냐며 싸늘하게 반응하는 미나의 말에 그렇지, 라며 어쩐지 시무룩하게 일어선 카쿠는 어색해진 분위기에 조심스럽게 몇분동안 이어지던 침묵을 깨뜨렸다.





"오늘, 어땠는감..?"

"오늘?"

"어인시에 와서 하고 싶었던 건 아직 많이 남아있고, 내일도 있지만... 어땠는감? 아쿠아리움, 머메이드 카페 말이네. 그.. 나쁘지 않았는감?"





절절매며 눈치를 보는 카쿠의 흑안을 짧게 스쳐본 미나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순간들을 떠올렸다. 학교에서 어인시까지 오는 1학년 버스의 시끌벅적함과 창 너머로 숨막히도록 눈동자 가득 들이찼던 넘치는 푸르름, 내리자마자 자신을 반겨주었던 흑안과 함께 손을 맞잡고 들어간 아쿠아리움까지. 오면서 보았던 푸르름이 자신의 눈앞에 있었던 찰나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될 것이었다.




바다 한가운데에 던져진 듯 온 세상의 아름다움만 가득했던 그곳의 풍경과 동화속의 장면처럼 오묘한 색채들을 뽐냈던 열대어들. 그리고 그 곁을 굳건하게 지킬 것이라며 맞잡은 손을 놓지 않고자 귀여운 수작을 부렸던 그의 사소한 행동까지 전부 다 그녀의 기억 속으로 차곡차곡 쌓였다.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겠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죽던 이 순간만큼은 아마도 평생 결코 빛바래지 않을 추억이겠지. 미나의 표정이 천천히 기억에서 추억으로 물들어가는 찰나를 즐기듯 편안하게 풀어졌다.




"... 좋았어."





이 모든 순간이 너와 함께였기에. 내내 불안해하던 표정을 숨기지 못했던 카쿠의 표정이 미나의 한마디에 거품처럼 푸스스 웃음이 번진다.



다행이다, 그리 말하는 순간 정말로 그와 함께 온 것이 다행인 것처럼 느껴진 미나였다. 그래, 약속대로 그들 둘이서만 온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말랑말랑한 물거품이 그들 사이로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다. 띄엄띄엄, 끊어진 대화를 이어내듯 미나가 어색하게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좀 당황스러웠지만 이런 기회가 아니면 화장은 안 해봤을테니까.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시 오고 싶어."

"그런가? 그럼 약속이네, 나중에 또 오는걸로. 어른되면."





다시 오세. 그 말과 동시에 들어올려진 새끼 손가락이다. 거칠고 짧게 깎인 손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미나의 손이 부드럽게 그 위에 겹쳐진다. 두개의 손가락이 서로 엮여 단단하게 이어지는 순간 카쿠와 미나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천천히, 공들여 미소지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결국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그려낼 붓을 서로에게 쥐여준 셈이었으니.




서로의 인생을 그려내기 위하여, 가장 멋진 그림을 완성하기 위하여 그들은 제 인생보다 더 신중하게 물감을 고르고 좋은 것들을 골라내 그 위에 덧칠할 것이다. 때로는 섬세하고 때로는 거칠게, 어떤 때에는 까먹어버릴지도 모르지만 결국 한손에 쥐여져있는 붓으로 제 인생에 누가 있었는지 알아차리게 되겠지.





하여 카쿠와 미나는 마음을 놓고 미소를 지었다. 그들에게는 내일이 있었다. 약속처럼 다음이 존재했다. 한번 스치는 인연보다 더 깊게 그들의 추억은 쌓일 것이다.





"음.. 이제 어디로 가지?"

"우리 집합시간이네. 곧 나가야하는구만."





아쉬운데 사진 찍은 거 다 내가 가지면 안되겠는감? 마지막 말에 참지 못하고 폭소한 미나는 흔쾌히 카쿠의 사진과 자신의 사진을 교환하는 것을 조건으로 인어 모습이 된 자신의 사진을 넘겨주었다. 이런 건 애프터 서비스가 완벽해야 더 칭찬받는 거라며 얼굴에 잔뜩 묻은 펄과 화장들을 깔끔하게 지워준 인어들의 품속에서 비로소 빠져나온 그들은 익숙한 모습이 된 서로의 얼굴을 아쉽게 바라보았다.




"어른되면 꼭 다시 오기네, 약속 잊지 말게나."

"안 잊어. 그때 되면... 못했던 것도 마저 하자."

"...! 미, 미나! 갑자기 너무 적극적이면!"




환하게 밝아지는 카쿠의 낯에 장난스럽게 인어쇼 말이야, 라며 어영부영 넘어가는 미나였다. 한순간에 파렴치한이 되어버린 카쿠가 졌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등뒤를 힘없이 쫓다가 헐레벌떡 곁을 차지하고선, 이전처럼 발을 맞추었다. 코피가 날 것 같다며 콧대를 꾹꾹 누른 카쿠가 그럼 인어쇼도 다음에 보자며 손가락을 내밀었고, 새끼 손가락이 두어번 꽉 이어지고서야 카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거두었다.




"인어 모습, 미나 정말 예뻤네."

"너도 되게.. 음, 신선했어."

"예뻤다고는 안 해주는구만, 서운하게도."

"멋있다고는 말 못하겠던데. 그래도 매혹적으로 보이기는 했어."

"당장 가서 화장법을 전수받고 오도록 하지!"




과장된 몸짓을 하며 당장이라도 머메이드 카페로 되돌아갈 듯한 반응에 포말처럼 웃음소리가 새어나온다. 진심으로 갈 생각이었는지 냅다 몸을 돌려버리는 카쿠의 손목을 잡으며, 그녀는 노을의 붉은빛에 물들어진 뺨을 반짝이며 환히 웃었다. 다음이 있잖아. 이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니까, 언약으로 맺어진 목소리에 카쿠 역시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들의 손에는 한아름 각자의 사진이 담겨있었기에. 지워지지 않을 추억들이 선명하게 필름에 남아있는 것을 손에 쥔 채 그들은 다시금 손을 맞잡고 선뜻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등뒤로 노을의 주황빛이 가라앉아가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며, 보랏빛 장막으로 어두워져가는 방향으로 힘차게 걸음을 내딛었다.



그들이 매고 있는 가방의 끝에는 서로 나눠가진 돌고래 키링이 달랑거렸으며 한손에는 붉은색 인어 모습의 미나가, 한손에는 노란색 인어 모습의 카쿠가 있는 채로 말이다.




이 찰나마저도 빛바래지지 않을 추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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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MOMO
 
*커미션 글입니다
*드림글입니다


 
파도를 거스르고 나아가는 자들은 결코 자비롭지 않았다.
 
 
악마의 열매를 먹은 것도 아닌데 유독 기이한 존재들이나 용납할 수 없을만큼 원대한 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으레 당연하다는 듯 거추장스러운 시선과 추잡한 욕망이 덕지덕지 붙기 마련이었으니. 뉴게이트는 오늘도 자신을 향해 없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엉덩이를 흔드는 하찮은 녀석들과 세치 혀를 휘두르며 온갖 추문들을 퍼나르는 해적들을 천박하다는 듯 혀를 차며 내려다보았다.
 
 
 
압도적인 무력과 그에 반비례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괴이한 면에서 자비로운 뉴게이트. 막장에 가까운 해적단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얻어낸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상식적인 인간'이라는 호칭은 이런 날파리들이 과하게 꼬이기 마련이었다. 차라리 자신도 무관심으로 일관할 것을 그랬나. 뉴게이트의 짧은 후회가 뒷갑판에서 여유롭게 있을 누군가를 향해 아스러히 퍼졌다.
 
 
 
그리고 그 뒷갑판에는 예의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한 사람ㅡ에스프레소, 일명 커피가 앉아있었다. 피와 시체, 해골이 나뒹구는 것이 더 당연해보이는 풍경을 사방에 두고선 홀로 고고하게 앉아 티테이블까지 챙긴 귀족같은 괴짜.
 
 
 
하얀색의 테이블보는 복잡하게 얽혀 눈꽃결정과 같은 모습을 만들어냈으며 그 위에 올려진 흰 도자기 잔에도 섬세하고도 깨끗한 장식이 새겨져있었다. 안에 담겨있는 지독한 내용물을 풍미깊은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머금었다가 부드럽게 목구멍으로 넘긴 커피의 손짓이 달그락, 기분좋은 다기 소리를 내며 떨어졌을 때 소소한 비극은 퍼레이드의 시작을 알리듯 화려하게 울렸다. 다소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러니까 따지자면, 해적답게 선장의 우렁찬 소집 명령으로 시작되었다는 뜻이었다.
 
 
 
"커피, 뉴게이트!! 당장 선장실로 와!"
 
 
 
아무리 이곳이 막장이며 동료살해조차도 크게 혼내지 않고 도리어 부추기는 곳이라 하여도 가장 기본적인 룰은 있었다. 선장의 명령에는 무조건 복종한다. 이는 단순히 그가 자신의 우두머리여서 아닌, 그저 지키지 않으면 즉시 죽음으로 되돌아오는 가혹한 대가 때문이었다.
 
 
미간을 좁히며 성가시다, 여실하게 드러내는 뉴게이트와 달리 표정까지도 평온하게 갈무리한 커피의 우아한 걸음거리가 괴기스러울 정도로 기묘한 하모니를 이루어내며 선실의 복도를 또각또각, 울리었다. 마치 여명의 종소리처럼 울리는 발소리에 선장의 호출을 알아차린 선원들은 고개를 숙이고 필사적으로 시선을 땅에 박아넣어 그들이 가는 길을 감히 방해하지 않았다. 비단이 깔려진 길을 걷는 것처럼 부드럽고 곧은 걸음과 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둔탁한 발소리가 멈춘 곳은 선장의 방이었다.
 
 
 
"들어와."
 
 
 
선장의 명령은 절대적. 뉴게이트의 손이 벌컥 선장실의 문을 열어젖히자 그곳에는 언제나처럼 지긋하게 앉아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선장ㅡ지벡이 있었다. 커피가 곱게 선장실의 문을 닫자마자 지벡이 펼친 지도가 툭, 굴러와 뉴게이트와 커피의 신발 앞에 부딪혀 멈춘다. 펼쳐진 지도 위에 올려져있는 빼곡한 저택과 농장, 그리고 광산 등의 위치를 표시한 마크들이 성의없이 그어져있었다. 둘의 눈이 면밀하게 그것을 살핀 후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지벡의 입꼬리가 이전과 달리 사납게 굳어있는 상태였다.
 
 
 
기분이 더러운 상태로군. 빠르게 눈치챈 커피가 손을 나비떼로 변형시켜 지도를 곱게 들어올리자, 날카로운 핀이 가볍게 지도의 정중앙을 뚫는다. 그곳에는 선명하게 그어진 붉은색의 X 표시에 붕대 속에서 눈썹을 쑥 밀어올리자, 선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곳에서 '바람을 조종하는 보물'을 가져와라. 명령이다. 시간은 3개월을 주지. 이상."
 
 
 
그저 그것이 목적이었다는 듯 그대로 고개를 돌려 들고있던 서류에 시선을 옮기는 선장을 황당하다는 듯 바라본 뉴게이트가 반박하려던 찰나 커피의 손이 뉴게이트의 옷자락을 붙잡고 느릿하게 뒤로 물러선다. 기분이 오락가락할 때의 선장은 그 무엇보다 변칙적이다. 이럴 때에는 알아서 사리는 것이 답임을 왜 모르는 것처럼 굴지? 커피의 말이 느릿하게 뉴게이트의 견문색을 타고 흘러들어가고서, 그는 입술을 깨물고 순순히 커피의 손끝에 자신의 방향을 맡겼다.
 
 
 
"바로 출발할건가?"
 
"그러지. 3개월은 생각보다 짧으니."
 
 
 
고아하게 수족들에게 아무 배나 가지고 오라 손짓한 커피의 모습을 비추던 금안이 느릿하게 침잠한다. 그의 전투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해놓고선 감히 약하다고 평할 수 없었으나ㅡ 해적들의 방식이라고 하기에는 몹시도 고상한 모습이었으므로. 뉴게이트의 염려가 가을의 단풍처럼 서서히 커피의 발목을 붙든다.
 
 
 
"방식은 어떻게 할거지?"
 
"따로 하도록 하지. 뉴게이트, 자네는 힘으로 밀어붙이게나, 나는 정보를 찾아보도록 하지."
 
"좋군, 그리하지."
 
 
 
곧장 그대로 몸을 돌려 배에 오른 뉴게이트의 배가 신속하게 먼저 앞서가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커피는 온 몸을 나비로 화해 허공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수십마리의 나비가 차르르, 보석과 큐빅끼리 부딪히는 듯 영롱한 소리를 자아내며 해수를 거닐고 사방으로 퍼졌던 오랜 비행이 멎은 것은 그들이 목적지로 삼았던 '바람을 조종하는 보물', 그것이 있는 곳이었다.
 
 
 
선장이 겨우 그 정도의 헛바람에 속아넘어갈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면 분명 이곳에 있겠지. 커피는 한숨을 내쉬며 선장의 머저리 같은 명령에 다시 한번 짙은 회의감을 느껴야만 했다. 물론 뱃사람인 이상 해풍을 조종할 수 있다는 보물에 눈이 돌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진리였으나, 커피는 아쉽게도 자신이 뱃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기에 이 또한 그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래서 아마 숱한 인원들 중에서도 가장 믿음직한 둘을 뽑아 보낸 것이겠지. 적어도 커피의 생각으로는, 뉴게이트와 자신은 객관적으로 선장을 속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뉴게이트는 속이느니 차라리 정면에서 직접 달려들어서 싸우고 쟁취해내는 스타일이었고 커피 본인은 선장의 의견에 반하는 것이 제게 꽤 깊은 손해임을 알았고 썩 나쁘지 않은 상황에 빠져나가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그저 원하는만큼 머무르겠지. 꽃의 단물이 다 빠질 때까지 나비가 자리를 뜨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투명한 유리와 석영들이 부딪히는 것과 같은 소리를 내며 모여든 커피보다 훨씬 더 늦는 뉴게이트의 배였다. 대략 6시간 후쯤에 도착할 것이라고 예상한 후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그 주변으로 경쾌하고도 말간 아이의 웃음소리가 흩어진다. 아마도ㅡ 자신 역시 마땅히 그러한 웃음들을 들을 수 있었던 과거의 편린 같은 것이 살짝 떠오르다가 안개처럼 흩어진다. 의미없는 가정이었다.
 
 
귀족들이 다니는 마을이라고 광고를 하듯 흙바닥이었던 길이 금방 잘 조각된 돌과 판판하게 깎인 보도블럭으로 바뀐다. 집집마다 흙먼지가 누렇게 낀 담이 사라지고 장미들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을 자랑하듯 서늘한 철창을 담으로 대신한 집들이 보기좋은 모양을 자아낸다.
 
 
미적 감각이 뛰어난 미장이들이 만들어놓은 조그마한 스노우볼과 같은 마을에서, 커피는 약간의 이질감도 느끼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합류할 수 있었다. 타인에게 지독하게 무관심하며 오직 제 밥그릇과 보석 꾸러미에만 눈에 돌아간 귀족들은 새롭게 들어온 커피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냈으나 조금 특이하게 온 몸을 붕대로 가렸을 뿐 걷는 모양새도, 느릿하게 지팡이를 흔드는 모습에서도 품위가 떨어지지 않음을 확인하자 동족으로 의식하고는 질척한 시선을 떼어내 제 무료함을 달랠 신문기사를 찾았다.
 
 
 
"실례, 혹여 말씀 좀 물어도 되겠나?"
 
"물론이오, 무엇이 궁금하시오?"
 
"바람을 조종하는 괴이한 물건이 있다 하여 소문을 듣고 왔는데ㅡ 그것에 대해 정보를 조금 물어도 되겠는가?"
 
 
 
명령이 익숙한 말투였다. 덕분에 의아함을 품은 귀족은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영문을 모르고 흐르고 있는 식은땀을 조심스럽게 닦아내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고, 커피는 그럼 되었다는 듯 다시 옆 테이블에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귀족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약간의 의아함은 있었으나 온 몸을 가리운 하얗고 깨끗한 붕대 덕분인지 커피의 질문은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성격이 조금 이상한 괴짜 같은 귀족, 그리 여겨진 모양이었다.
 
 
 
"알고있소. 왕성의 창고에 있다지. 왕께서는 무엇이든 괴이한 것들을 죄다 불러모아서는 창고에 박아두는 습성이 있지 않소."
 
 
 
드디어 두번째 블럭으로 나아간 테이블에서 쓸만한 대답을 건진 커피의 입꼬리가 나른하게 올라갔을 때, 뉴게이트의 배는 다소 화려하게 섬에 정박했음을 알렸다. 해적이다! 요란하게 울리는 아랫마을의 목소리와 외침에 귀족들은 긴장감이 어린 표정으로 품속에서 프린트락을 꺼내들었고 혼란스러워진 분위기를 틈타, 커피의 걸음은 똑바르게 왕성으로 향하는 길 위에 올랐다. 이르게 도착한 뉴게이트의 배가 조금은,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란스러움이 아랫동네에서 귀족들의 마을까지 들이닥치는 순간, 커피는 바람이 부는 것처럼 고개를 치켜들고 어느새 제 곁을 스치는 뉴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커피의 발끝이 왕성으로 향함을 알았을까, 뉴게이트의 발이 커피의 곁에 단호하게 멈춘 채 굳건하게 박힌다. 있는 힘껏 휘두르려는 듯 크게 어깨를 들어올린 채로 팔에 힘줄이 돋도록 언월도의 봉을 그러잡는다. 언월도가 단번에 바람을 가르며 왕성을 향해 참격을 그려내는 순간이었다.
 
 
 
탕—!
 
 
 
방아쇠가 당겨지는 소리다. 싸움을 곁에 두고 전쟁을 친구 삼은 포악하고 노련한 뱃사람 둘의 고개가 단번에 총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돌아가고, 금빛과 은빛으로 얼룩덜룩한 프린트락이 끝이 날카롭게 가공된 납덩이를 쏘아낸다. 화약이 터지며 납총알이 뉴게이트의 허벅지를 향해 나아가는 순간 커피의 머리카락에서 피어난 수십쌍의 나비가 총알을 휘감으며 차르륵, 나비들이 옅은 잿가루로 산산조각이 난다.
 
 
흡사 보석이 깨지는 것처럼, 청량하고도 애처로운 소리가 총성 후에 찾아오는 이질적인 침묵 속에 퍼진다. 허무하게 사그라든 잿가루가 총알에 휘감기고 박혀들어 나아가는 것을 막아냈고 무거워진 총탄이 목표에 닿지 못하고 힘없이 떨구어진다. 공처럼 굴러 깨진 대리석의 바닥에 형편없는 모양새로 나뒹구는 총알을 한번, 그리고 짧아진 머리카락과 그 주변을 파르르, 맴돌며 날아다니는 적보라색의 나비들을 한번 내려다본 커피는 언월도의 끝이 멈추지 않고 방아쇠를 당긴 멍청한 귀족의 허리를 반으로 가르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이 죽은줄도 모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던 그것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가고, 종내에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그대로 굳어 죽어버리는 것까지 대수롭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 커피는 호흡 조절을 잊어버린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뉴게이트의 허벅지를 남은 손으로 툭, 쓸어주었다.
 
 
 
"나 안 죽었네, 뉴게이트."
 
"하지만, 하지만.."
 
"그저 단지 머리가 조금 짧아졌을 뿐이네."
 
 
 
머리 자르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비록 생으로 머리채를 잡혀 그대로 쥐어뜯기는 것과 같은 고통이었으나 고저없는 말투와 특유의 평온하고도 고즈넉한 분위기는 과연 그의 말에 신빙성을 더해주기는 했다. 말하는 커피의 걸음이 휘청거리지만 않았어도, 그 말은 퍽 믿음직스러웠을 터였다. 자세는 백조가 수면 위를 헤쳐나가듯 고저없이 규칙적이었으나 방향은 미세하게 다르다. 놀란 뉴게이트가 벼락같이 커피를 번쩍 들어올리자 격한 움직임에 놀란 듯, 짧아진 머리카락과 신체 일부가 파르르, 나비로 화해 반짝인다.
 
 
 
"커피, 너.. 상태가 괜찮은 게 맞는건가?"
 
"뉴게이트. 당장 보물을 가지고 복귀해도 3개월은 빠듯한 시간이네. 내 상태가 아니라, 보물의 행방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나."
 
 
 
점잖게 속도를 재촉하는 커피의 말에 번뜩 고개를 치켜든 뉴게이트가 다시금 언월도를 붙잡고 왕성으로 뛰어나갈 준비를 하려던 찰나, 묵직한 질문이 커피의 느린 걸음을 잡아챈다. 대답하기에 곤란한 질문은 아니었다.
 
 
 
"우리는 알고 있지 않나. 그깟 납탄, 맞아도 그리 아프지도 않았어. ...나를 왜 도와줬나?"
 
"그야 당연히. 그대를 친애하기 때문이네."
 
 
 
친애. 커피의 친애와 뉴게이트의 친애는 아마도 다른 의미였을테지만, 긍정의 의미임은 확실했다. 친애,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이곳저곳 각별하게 거리를 둔 녀석이 내미는 친애라니, 그 사실이 뉴게이트의 심장을 크게 뒤흔들었고, 하여 그는 적나라하게 얼굴 한가득 들이치는 다정하고도 따스한 미소로 표현했다. 실로 눈을 잡아끌만큼 매력적이고도 화사한 여름빛 같은 미소였다. 천진난만한 아이가 사랑이라는 감정에 마땅히 보이는 듯한 웃음. 자신의 친애가 이러한 방식으로 되돌아온다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겠지.
 
 
 
뉴게이트가 손살같이 왕성을 향해 나아가는 사이, 커피는 언제나 그렇듯 나비를 일으켜 사방으로 흩어졌다. 적보라색의 나비가 옅은 자수정과 적색의 꽃가루와 같은 조각들을 흩날리며 파르르, 대학살의 풍경을 스친다.
 
 
 
뉴게이트가 몰고 온 록스의 해적들이 힘없는 시민들과 죄많은 귀족들을 향해 구분없이 공평한 죽음을 쏟아부었고, 조롱섞인 비아냥이 토막이 난 시체와 짓이겨지고 찢겨진 피웅덩이 위로 허무하게 내던져진다. 사람은 죽는다고 바로 시취가 나지 않는다. 그저 지금처럼 지독한 열기와 코를 찌르는 듯한 혈향에 저절로 미간을 좁힐 뿐, 나만 그것이 나비에게는 달콤한 향이었기에 커피의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지독할 정도로 단 향이 코끝을 아리게 만드는 것 같았다.
 
 
 
"콜록."
 
 
 
물론 그 사이 섞여들어있는 새로운 독극물을 마주할 때에는 더욱 두근거렸지만. 아무래도 마을의 약초꾼이 다같이 죽자고 냅다 독초 꾸러미에 불을 지른 모양이었다. 어떤 약초였을까, 박새일까, 마전자 나무일까? 그도 아니라면 낭만적으로 은방울꽃과 철쭉 같은 꽃일까. 과연 그의 죽음은 어떤 식으로  화하였는가? 약초꾼의 서러움이 악에 받친 듯 타오르는 초원을 타고 매캐한 향을 풍긴다.
 
 
가지고 있던 것들의 조합이 뭐였을까. 태우면서 독반응을 일으키는 약초들을 머릿속에서 하나둘씩 떠올리며 나비들은 다시금 사람의 몸뚱이로 변해 연기 속을 훑었다. 분명 푸르고 광활해 마을의 식량을 책임지고 시원스럽게 펼쳐져 미관을 담당했을 초원이었건만 지금은 가족을 눈앞에서 잃고 심장에 칼이 꿰뚫린 운 없는 약초꾼의 시체가 바위에 널려있음으로 미관을 해치고 있었다.
 
 
손에는 마지막 발악처럼 온갖 독초들이 죄다 엉켜 하얗게, 까맣게 제각각의 잿가루와 희뿌연 연기를 흩날리며. 그 속에서 홀로 고요하게 서있는 커피의 머리카락이 연기과 불어오는 해풍에 맞춰 흐트러진다. 파르르, 미처 해풍과 거세게 몰려온 물살에 밀려 잠시 방향을 잃고 머뭇거리던 나비 하나가 동족으로 착각함에 연기 속에 뛰어들고 커피의 눈앞에서 잿가루와 함께 추락해 나뒹군다.
 
 
 
아마 수십날을 고치 안에서 기다리고 갈고닦았을 아름답고 화려한 나비 날개의 문양은 형편없이 진흙탕에 얽혀 몇번 의미없는 날갯짓을 시도하다가 그대로 멎었고, 축 늘어진 나비를 무감각하게 내려다본 커피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반으로 갈라진 왕성이 굉음을 내며 부숴지고 산산히 조각나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부디 우리가 뒤져야할 왕성의 창고가 지하에 없기를.
 
 
 
"커피!"
 
"뉴게이트."
 
"거기서 나와라!!"
 
 
 
독과 잿가루로 휘날리는 연기 사이 서있던 커피의 눈썹이 쑥 밀려올라간다. 못마땅함이었다. 조금만 더 분석해보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텐데 왜 의미없이 재촉을 하는가. 덤덤하게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약초꾼의 손에 쥐여져있는 독초들을 갉작거리며 먹고 있는 나비들을 바라보았다. 대충 그가 분석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뉴게이트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 연기 범위의 밖에 꼿꼿하게 선 채 팔짱을 끼고 있을 뿐이었다. 불쾌해 죽겠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말이다.
 
 
 
신경쓰여서 원. 혀를 가볍게 차고 끈질긴 시선과 폴폴 풍기는 불편함을 감당해낸 커피가 마침내 분석을 끝냈다며 나비들을 회수한 순간이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거세게 언월도를 휘둘러 연기를 모조리 날려버린 뉴게이트는 좁혀진 눈썹을 좀처럼 필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인상을 쓰고 있었다.
 
 
 
"난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목적어가 없는 말이었다. 허나 못 알아들을 말도 아니었다. 하여 커피의 눈썹이 오늘로써 세번째로 올라가던 순간, 뉴게이트의 부가 설명이 덧붙여진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팍팍 내는 말투였다. 흡사 어린아이가 투덜거리듯이 기어코 '독을 먹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내뱉은 문장에 커피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붕대에 가려있는 표정을 용케 견문색으로 알아낸건지 아니면 감정을 읽어낸건지 모르겠으나 뉴게이트는 삐쭉 튀어나온 입을 좀처럼 집어넣지 않았고, 덕분에 완전히 박살이 난 왕성에 도달할 때까지, 커피는 뉴게이트가 내비친 감정의 편린을 해석해내기 위해 시간을 들여야했다.
 
 
 
조각난 대리석들의 조각이 갑작스럽게 부서진 것을 억울하다 외치듯 날카롭게 솟아올라와 있었다. 덕분에 손수 날카로운 것들을 부숴주며 커피 가는 길을 곱게 깔아놓은 뉴게이트와 커피가 학살에 눈이 돌아간 부하들을 불러 왕성의 창고를 뒤지는 사이, 그의 눈동자가 놀랍다는 빛을 머금으며 한참 전 뉴게이트의 말에 되물었다.
 
 
 
"뉴게이트. 아까의 말은 내가 걱정이 된다는 뜻인가?"
 
"당연하다. 독을 마실 때마다 네가 얼마나 기침을 자주 하는지 아나? 몇번이나 식은땀을 뚝뚝 흘리면서 내 등뒤를 찾아드는지 아느냔 말이다. ...나는 네가 아픈 것이 싫다."
 
"그 이유는 무엇이지?"
 
 
 
이번에는 뉴게이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커피를 내려다보았다. 뒤에서 늘 침묵을 고수하며 분위기를 지켜내는 녀석이 이런 곳에는 눈치가 없다며 고개를 설핏 저어낸 뉴게이트의 입가에 이전과 다른 미소가 번진다. 엉뚱한 부분에서 무지한 자신의 친우가, 기특하면서도 동시에 우스워서, 무지에 솔직하게 알지 못한다 답하는 용기가 대견스럽웠다.
 
 
 
"그야, 내가 자네를 친애하기 때문이네."
 
 
 
자네가 식은땀을 흘리고 몸상태가 좋지 않을 때마다, 각혈을 하고 코피를 흘려 희고 깨끗하던 붕대가 붉게 물들어져 갈 때마다 마음이 아픈 이유도 전부 내가 자네를 친애하기 때문이지. 나는 자네의 평안을 바라네. 자네의 무사를 바라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전부 다 그대를 친애하기 때문이네.
 
 
절절하기도 한 그 고백에 커피는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과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의 친애는, 무겁고도 진솔했다.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바라보아야 겨우 오는구나, 가는구나를 알 정도로 느린 속도를 자랑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해풍과 풍랑에 섣불리 휩쓸리지 않을 것이며 폭풍을 만나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선 더 단단해진 채 가라앉아있겠지. 분에 넘치는 친애다. 기껍게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분한 마음이었다.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어, 그리고 그 이유는 자네가 '훌륭한 전사'이기 때문이네. 서있는 위치가 다르고 방향이 다르면 어떠한가. 결국 자네는 항상 싸우고 있는 전사이지 않은가?"
 
"...내가? 싸운다고?"
 
"스스로와 싸우고 있지. 그리고 그건 아주 힘든 일임을 알고있네."
 
 
 
스스로 발전하고자 나아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몹시도 아름답지 않은가. 윤슬에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아득하기도 하고. 뉴게이트의 말에 커피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처음이었다. 진실로 처음으로 듣는 평가였다.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위하여, 오늘보다 조금 더 강해진 스스로를 위하여, 누군가는 이기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지극히 자신만을 위하는 방법으로 보일지도 모르는 그 방식을 전사의 방식이라고 부르고 칭송해주는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으니.
 
 
커피의 눈이 뉴게이트에게 똑바로 고정된다. 넓다란 등에 묶여 펄럭거리는 망토가, 그의 무거운 친애처럼 굳건하게 거친 바닷바람을 찢으며 버텨낸다. 그래, 이번에는 커피의 고개가 느릿하게 끄덕여졌다. 그의 뒷모습은 아름다웠다. 친애하는 이의 뒷모습은 그의 말처럼, 윤슬보다 더 아득하게 반짝거렸다.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아득했던 그날의 기억으로 보물의 부재에 대해서 호되게 소리를 지르며 거칠게 반응하는 선장의 반응에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정도로 말이다. 해적단이 와해되고 갈곳을 잃은 사람들이 제각기 방랑을 택하고 줄을 선택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매달리는 와중에도 그가 먼저 생각이 날 정도로, 하여 결국 자신 역시 그의 무사를 바라게 될 정도로 말이다. 



이따금, 길잃은 느낌에 고개를 들고 창백한 별빛을 바라볼 때에는 그와 함께 보았던 윤슬이 떠올랐다. 그럼 자신을 향했던 명예롭고도 훌륭한 전사라는 호칭과 아직도 무겁게 자신의 발목 아래에서 지탱해주고 있는 친애가 떠오르는 것이다. 하여 그것은 결국 연이라고 불러도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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