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카게라 성별: 여 나이: 49세 드림캐: 잇쇼(후지토라) 직업: 만물상점 주인 별명: 만물수집가 성격: 원하는 건 악착같이 손에 넣어야 받아들이는 타입. 어린아이들에게 관대하며 어른에게도 상냥하다. 사적으로 만나면 무척이나 온화하고 호쾌한 사람. 외형: 어두운 피부에 자안. 몸에 흉터가 다수 있으며 화려한 꽃무늬 셔츠를 즐겨 입는다. 이마에 솟은 어두운 색의 뿔이 두개 있음.
"삐이ㅡ!" 음량을 테스트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가볍게 마이크를 두드리며 들리는 소리가 허공에 내지르며 찢는다. 일제히 집중하며 고개를 치켜올리고 열성적으로 집중하는 학생들 사이, 센고쿠의 목소리가 고성능의 주파수를 뿜어내며 진중한 목소리를 자아낸다. 유독 산만하고 쾌활함의 정도가 지나치던 학생들이 유일하게 잔뜩 집중해있는 시간이었다. 오늘 하루부터, 라는 말로 서두를 꺼내 신세계 중의 역사를 길게 이어지는 문장로 요약한 장황한 연설을 듣는 사이 미나의 미간이 곱게 구겨지기 시작한다. 너무 길어. 이제 막 신세계중학교가 주변 상가와 근처 섬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설명하던 센고쿠는 잠시 숨을 고르며 입을 다물었다. 그때를 틈타 학생들의 눈빛이 서늘하게 한기를 품기 시작했다. 서서히 고조되는 학생들의 불만에 동조해 입술을 내밀고 투덜거리려던 찰나, 학생들이 눈빛으로 보내는 살해위협을 느끼기라도 한 걸까, 교장의 입이 한숨을 머금더니 이내 기어코 학생들이 원하는 문장을 내뱉는다. "이로써 지금부터, 체육대회를 시작하겠다." 비로소 환호성이 우뢰처럼 울리며 일제히 주먹을 쥔 손을 치켜올렸다. 허공을 가르는 주먹의 수가 수천개에 달했던 순간, 윤기가 도는 흑발을 좌르륵 밀어 어깨 너머로 흘려보낸 붉은 눈의 학생, 미나는 입술을 삐쭉 밀어올리며 기대가 된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음흉하고도 위험해보이는, 아주 깜찍한 종류의 미소 말이다. 오랫동안 맛을 기대한 먹음직스러운 것을 눈앞에 두어 기뻐보이는 토끼 같기도 했다. 물론 그걸 보고 귀엽다고 여기는 것은 저 멀리 단상에 잘 진열된 물건들마냥 각을 잡아 서있는 학생회의 인원 중 소수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였겠지만 말이다. 이를테면, 코가 사각인 것이 몹시 고민이라 그것을 지적하면 은근히 시무룩한 기질을 흘리며 우울감을 드러내는 소년이라던가, 그저 제 친구의 미소가 기꺼운 콧대 높은 차가운 얼굴의 비서 타입 여자아이라던가, 하는 사람들을 예시로 들 수 있겠다. 그 외에는 사악한 미소라며 중얼거리는 늑대 닮은 호쾌한 미남형의 소년이라던가 아예 그냥 그 여자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품고싶지 않다 발악하는 차가운 얼굴의 소년도 있었다.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니 넘어가도록 하자. "그럼 팀을 나누도록 하지. 고지했던대로 2반, 4반과 같은 짝수반은 백팀, 나머지 홀수반은 청팀으로 나누도록ㅡ." "응? 난 빨간색이 좋은데! 갈색도, 검은색도! 아, 초록색도 좋아!" 우렁찬 목소리로 자신이 선호하는 색깔들을 읊는 루피를 향해, 미나는 잠시 질린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곳의 그 누구도 안 물어봤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짜고짜 큰 소리로 불만을 토로하는 루피의 입을 능숙하게 두들겨 패 막아버리는 나미에게 심드렁한 시선을 한번 준 후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마저 '하겠다'를 붙인 센고쿠의 말에 그저 무표정하게 그럼 난 청팀이로군. 이라고 생각할 뿐인 미나였다. 대망의 체육대회 첫 순서는, 바로 각 팀의 응원단 소개 겸 분위기 끌어올리기였다. 강제로 끌려갔을 것이 틀림없는 듯 난처한 얼굴로 애써 미소 짓고 있는 비비와 응원단 보너스 점수가 있으니 더 당차게 하라며 윽박지르고선 신나게 팔을 붕붕 휘두르는 나미, 그리고 그 외의 관심없는 기타 치어리더들을 바라본 미나는 고개를 돌렸다. 유려한 곡선의 몸매를 뽐내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 그들을 향해 응원의 손짓을 해주는 로빈을 바라본 후 눈을 반짝인 그녀는, 같은 팀으로써 약간의 배려를 발휘하기로 마음먹고 손을 들어올렸다. 로빈과 비슷한 동작을 해주자 낮은 웃음소리가 기특하다는 듯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쿵쿵. 심장이 요란한 스피커의 박자에 맞춰서 쿵쾅거리고 신나는 리듬과 저절로 고개를 까닥거리게 되는 노래가 귀청을 찢고 들어올 것처럼 두근거린다. 고막을 터뜨릴 것처럼 울리는 노래 소리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드럼소리에 맞춰 똑같은 박자를 자랑하는 심장 때문인건지, 그도 아니라면 체육대회라는 즐거운 이벤트에 기대와 설렘으로 부풀어오른 소리인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눈 돌아갈만큼 놀라운 1등 상금과 그에 못지 않은 2등의 상금 덕분인건지. 미나는 아직 답을 모르겠는 질문에 그저 손을 들어올려 널뛰는 심장을 느껴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학생들은 금방 눈앞에 들이밀어진 흥밋거리에 눈과 귀를 쏙 빼앗긴 것처럼 흥겨운 치어리더의 응원무대에 다같이 어깨를 들썩였고 종내에는 치어리더들의 동작을 어설프게나마 따라하며 체육대회의 첫 시작인, 분위기 끌어모으기에 적극적으로 동참을 선언했다. 체력 좋은 치어리더들이 숨 한번 헐떡거리지 않고 끝나버린 응원무대는 '안일하군! 신세계 중학교의 체육대회는 처음부터 바로 클라이막스로 들어간다!'라는 소문과 명성에 걸맞게 달아오른 분위기가 되어있었다. 당장이라도 뛰어들어서 한바탕을 해야 속이 시원할 것처럼 엉덩이를 가만히 두지 못하는 루피와, 그런 그를 점잖게 눈빛으로 꾸짖은 미나처럼 변함없이 고요한 눈빛을 유지하는 자들 역시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대체적으로는, 흥분해있는 상태였다. 시끄럽던 음악이 어느새 작은 볼륨으로 조절되고 날카로우면서도 경쾌한 목소리가 심벌 소리와 함께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다. 처음부터 귀를 찢는 심각한 소음을 발생시킨 센고쿠와 달리 이런 방송장비에 몹시도 익숙하다는 듯 삑사리 하나 없는 매끄러운 조절이었다. "체키라웃ㅡ! 좋아, 좋아! 흥이 달아올랐군. 이제 본격적으로 조건달리기로, 몸을 달아오르게 해보자고! 이번 체육대회의 종목은 조건달리기ㅡDA! 내용은 아주, Simple!! 간단해! 눈앞에 보이는 운동장의 코스를 그대로 달리다가 중간! 그래, 1학년 5반의 부스가 위치한 자리에 놓여있는 빨간 테이블에서 선수들은 각자 종이를 랜덤으로 지급받는DA! 그 종이에 쓰여져있는 물건, 혹은 행동, 아니면 사람을 데리고 와서 나머지 반의 코스를 달리면ㅡ! Yeah, 끝이다! 점수는, 아, Score는~!! 1등은 첫 경기니까 가볍게 5점! 2등은 3점, 3등은 1점이다! 그 외의 등수는 의미가 없으니 점수를 부여받지 못한다는 점~, 모두 Remeber하라구!" 이번 체육대회의 MC를 맡게 된 음악미디어 방송부의 아푸의 신속하면서도 유쾌한 진행에 따라, 조건 달리기의 준비를 위해 선수들이 슬금슬금 자신들의 반 부스에서 몸을 일으키며 부스럭거린다. 반드시 한 사람당 하나의 경기 이상은 나가야한다 강력하게 주장한 나미와 그에 맞춰 딱히 부정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버린 쿠잔의 묵인 하에 첫 경기부터 뛰게 생긴 미나가 잠시 눈을 찡그리며 가볍게 머리를 묶어올린다. 아무튼 조금만 어울려주자, 그런 마음가짐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가짐은 1학년 5반의 라인에 우뚝 선 채로 미나를 향해 얄밉게 입꼬리를 삐쭉 올리는 보니를 보고서 싹 사라지고 말았다. 어찌나 얄밉게 웃으며 생글생글 눈꼬리를 휘는지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건 결코 신세계제를 할 때 야키소바를 모조리 빼앗겼던 때의 뒷 감정 같은 것은 결코 아니리라, 부정하는 미나였다. "헹, 너도 꼴에 달려보겠다고 머리까지 묶어올린거냐? 그래봤자 내게는 안될걸! 난 반드시 1등을 해내서 상금을 타고! 그 상금으로 이번 체육대회 때 나온 간식들을 모조리 다 사먹어버리고 말겠어!" 보니의 당찬 포부보다 앞선 도발을 먼저 알아들은 미나의 잘 뻗은 눈썹이 일순간 꿈틀, 움직인다. 네놈이 그럴수는 없다며 단호하게 성을 돋구는 말을 하는 미나와 그런 그녀에게 보기좋게 걸려들어 왁왁거리며 말싸움을 시작하는 그 둘을 멀리서 바라보던 체육대회 일일 도우미, 학생회의 표정이 제각각 희한한 모습들을 띄었다. 대표적으로 상반되는 표정 두개를 꼽자면 역시 루치와 카쿠의 표정일 것이다. 저것이 뭘 잘못 먹었나 싶어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는 학생회장 루치와 그런 그녀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선 흐뭇하게 웃고 있는 카쿠. 심지어 목덜미가 드러나 몹시 사랑스럽고 동시에 그것을 다른 남자가 봤다가 반해버리면 어쩌지, 라는 걱정까지 내뱉은 순간 루치의 표정은 형용할 수 없을만큼 완벽하게 일그러져 혐오스러운 벌레를 보는 양 질색을 떠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래놓고선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헤벌쭉 웃으며 실없는 말들로 허접하기 짝이 없는 부정을 늘어놓겠지. 구태여 이제 따질 마음조차도 들지 않은 루치는 카쿠로부터 두 발자국 정도 떨어져 있는 것으로 대신했다. 거리가 멀어지면 저 헤실한 얼굴이나 안 보겠지 싶은 기대감이었지만 그다지 통하지는 않은 듯, 루치의 표정은 내내 사람 하나 잡아 죽이고 싶다는 모습을 유지해야했다. 살벌한 기색을 폴폴 풍기는 루치의 무관심과 카쿠의 눈에 띄게 편파적인 응원 덕분이었을까. 출발신호를 알리는 깃발이 내려오는 순간부터 박차고 나아가 선두를 거머쥔 모습에 루치는 은근히 기분이 좋은 양, 나직하게 입을 벌렸다. 지극히 같은 훈련을 받아 그저 저 정도는 해야하지, 하는 만족감이이었다. 그러니까 단지 미나에게 시선이 닿았다는 이유로 눈을 뽑아버리고 싶다 과격하게 중얼거리는 카쿠의 말은 늘 그렇듯 흘려버렸다. 흐뭇한 시선이 마침내 확고하게 거리를 벌리는 순간 짙은 만족감과 배불리 먹은 포식자의 눈빛을 띄며 나른하게 휘어졌다. "저 정도도 못하면 훈련을 받은 시간이 쓸모없어지지." 루치의 말에 카쿠의 얼굴이 단번에 싸늘하게 굳는다. 줄곧 헤죽거리며 웃고 있었던 모습이 어디갔냐는 양 원수라도 바라보듯한 시선이었다. 아무튼 미나 한명이 걸리면 냅다 필사적으로 되는 주제에 용케 저 멀리서 지켜보는 걸로 만족한다는 말을 내뱉었나. "미나는 쓸모없지 않네." "누가 미나가 쓸모없다고 말했나? 청력손실이 의심되니 임무를 완료한 후에 의무실이라도 가보는 것을 추천하지." 자네랑 얘기 안할거네. 투덜거리듯 입을 다물고선 볼을 부풀리고 다시 정면을 응시하는 카쿠의 말에 비로소 뭐 죽일 듯한 표정에서 못마땅한 표정 정도로 발전한 루치의 얼굴이었다. 씨근덕거리며 비등하게 말싸움을 했던 것과는 다르게 보니의 다리는 그렇게 빠르지 않았고, 점점 벌어지는 격차에 그저 울상을 지으며 5반 학생들이 박자에 맞춰 단체로 외치는 괜찮아, 소리를 듣고 있을 때쯤이었다. 먼저 5반 부스 앞에 놓여있는 테이블에 도착한 미나가 죽일듯 노려보는 시선을 깔끔하게 흘러넘기며 겉이 모조리 가려진 랜덤박스에서 종이를 꺼내는 순간, 난처한 기색이 미나의 얼굴 위로 스친다. "파트너. 괄호치고 어떤 의미로든, 물결표 표시와 빨간하트. 괄호 닫고." 초인적인 감각을 이런 곳에 쓸데없이 발휘하는 카쿠가 미나의 종이에 쓰여있는 '조건'을 읽고 입꼬리를 삐쭉 올린다. 아무래도 임무에서 이탈해야할 것 같은데? 카쿠의 말에 루치의 표정이 굳자, 그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까닥, 기울였다. 여과없이 장난질과 풋풋한 감정에 미쳐버린 소년의 모습이었다. "미나가 곤란해하는 모습 안 보이는가?" "글쎄, 어떤 의미로든 가장 빨리 잘 달릴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처럼 보일 뿐 곤란해보이지는 않다만." "저런, 자네 시력검사 한번 더 해보게. 이번엔 꼼꼼히 해보게나. 틀림없이 곤란해하고 있네. 덧붙여서ㅡ 미나의 파.트.너. 자리를 함부로 줄수는 없지 않은가. 세상 그 어떤 놈팽이가 와도 감히 그런 호칭을 줄수는 없네. 설령 자네라도." 그딴 호칭 줘도 안 가진다며 으르렁거리는 루치를 피해 아무렴 학생회 인원이 이렇게 많은데 상관없지 않겠느냐는 말을 남겨버린다. 순식간에 미나의 앞에 나타난 카쿠는 등뒤가 따갑도록 살기를 흩뿌리는 루치의 시선을 무시하며 곱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마치 상디의 행동을 연상하듯 부드럽고도 신사적인 모습이었다. 문제는 그런 행동이 오직 미나에게만 향한다는 것이지만. 쯧, 가볍게 혀를 차며 무시하고자 애쓰는 루치를 향해 재브라의 안쓰러운 동정의 시선이 박혔다. "파트너 찾는겐가, 미나?" "응. 기왕이면 빨리 달릴 수 있는 놈으로." 그런 거라면 산바람인 내가 있지 않나. 매일같이 등교를 산에서 시작해 학교까지 날아오는 바람에 붙은 별명이지만 자네의 곁에서 달리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속도이지 않는감? 그 말에 설득력이 있다고 여겼는지, 미나의 표정이 누그러진다. 그렇다면야,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카쿠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제 별명처럼 달리기 시작했고 간신히 거리를 좁혀 의기양양하게 숨을 몰아쉬던 보니는 랜덤박스에서 뽑힌 종이가 무엇인지 몰라도 절규하며 소리를 질렀다. 저런, 안타깝게도 '1반 담임'인가 보군. 어느 학년인지는 몰라도 2,3학년 담임은 이미 자리에 없으니 1학년 담임 외에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반이 아닌 학생을 위해서 같이 뛰어줄리가. 물론 성실하게 임해주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우승을 위해서 있는 힘껏 달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1반 학생이 같은 경쟁자로 나온 이상. 꽝이로군, 운이 안 좋아. 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는 카쿠의 모습에 미나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제는 서로의 표정만 봐도 이미 생각을 짐작하는 수준에까지 도달한 그들이었다. "설마 랜덤박스에 있는 종이 내용, 전부 다 외운거야?" "그 정도로는 우리의 기억력을 시험하지 못한다네, 우리 훈련했을 때 더 극악인 조건들도 파다했지 않았는감." "지금 써먹으라고 그 훈련을 한 건 아닐텐데." 쓸 수 있는 건 모조리 써먹는 게 좋다네. 뻔뻔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앞의 결승선을 가벼운 걸음으로 톡, 넘은 순간 심판이 므훗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이미 학생회와 연관이 차고 흘러넘치도록 있는 걸 알고있었다는 듯, 미나의 곁에 있는 카쿠를 전혀 의심스럽게 바라보지 않으며 조건 종이를 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에, 어쩐지 괜히 심술과 머쓱함이 올라오는 미나였다. 파트너(어떤 의미로든~❤️) 이라고 선명하게 적혀있는 종이에 심판은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장난스럽게 어떤 의미로 생각했느냐고 물었고, 그 말에 즉각 눈을 찌푸리는 미나의 반응보다 먼저 카쿠가 입을 열었다. "그야, 스터디 파트너인 게 분명하지 않은감~. 음흉한 소리를 내뱉게 하는군, 지나치게 짓궂다고 생각하지 않는겐가?" "이런, 그렇긴 하지. 그래도 꽤 이런저런 소문을 많이 들어서 말이야~." 2학년과 1학년 사이의 풋풋한 사랑이라니, 누구라도 응원할만한 서사라고. 게다가 상대는 누구든 다가오면 상냥한 미소로 철벽을 치는 소년과 누구에게든 까칠하지만 유독 학생회에게는 제법 너그럽게 구는 소녀의 이야기라고. 이건 소설로도 꽤 잘팔릴만한 소재야. 능청스럽게 음흉한 의도로 읽어낸 것은 본인이지 않냐 일침을 놓는 심판이다. 조건에 맞게 데려왔으므로, 1학년 1반이 일등이라는 외침에 헥헥거리며 쫓아온 보니, 이미 이길마음이 없었는지 적당히 뛰었으나 좋은 피지컬로 통과한 페로나, 능력사용 금지라는 조건을 잊어버리고 꼼수를 부리다가 그대로 탈락당해버린 키드까지 그대로 넉다운이 된 표정으로 주저앉아야했다. 물론 빳빳하게 고개를 치켜올리고선 그대로 보니에게 머리도 묶지 않고 뛰었으니 귀신꼴이 되었다며 차갑게 조롱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봤자 꺾일 의지도 아니었고, 그런 말에 상처받을 녀석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바락바락 성을 내며 분한 표정으로 땅을 구르면 굴렀지. 발에 채이는 모래를 대수롭지 않게 바라본 미나가 그대로 몸을 돌려 가볍게 걸음을 옮겨 원래의 부스로 돌아갔다. "...큼. 흠.. 섹시하지 않은가?"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학생회의 대열에 되돌아와 방금 완주한 운동장의 거리가 1m 정도였다는 듯 태연하게 서있던 카쿠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루치는 그야말로 혐오스러운 짐승을 바라보듯 제 동료를 노려보아야했다. 덕분에 따라붙은 '역시 땀을 흘리지도 않았지만 드러난 목덜미가 너무 향긋하여 그만 미쳐버릴 뻔했다'라던가, '나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가 너무 사랑스러워 그만 그대로 끌어안고 이대로 도주해버리고 싶었다'라는 말은 귓등으로 흘려들을 수 있었지만. 마지막 '차갑게 매도하는 눈빛마저도 소름끼칠만큼 매혹적이다'라는 말에는 넘어가기 꽤 어려웠다. 그러니까 쟤를 그렇게 보는 건 세상 천지에 너밖에 없다고, 끝없이 이어질 기세인 주접을 끊고 싸늘하게 일갈하는 루치의 반응에 잠시 눈을 크게 뜨고 몇번 꿈뻑거리던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럴리가. 미의 기준은 대체적으로 동일하지 않는감." 드디어 입을 다물어주나? 싶어 기대하던 루치의 표정이 금방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대화를 시도하면 뭐하나, 상대 쪽이 들어먹지를 않는데. 결국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린 루치는, 이어지는 경기 내내 카쿠의 미나 찬양을 들어야만 했다. 눈치빠른 나머지 학생회들은 이미 저 멀리 떨어진 채 주접으로부터 도망쳐있었고 덕분에 독박을 쓰게 된 루치만이 점점 살벌함을 넘어서 이제는 카쿠를 목졸라 죽이던가 미나를 죽일 것 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마 원인만큼은 기가막히게 잡아내는 성격 덕분에 전자를 택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계주, 피구와 축구 경기까지 끝나고서야 겨우 찾아온 점심시간에 질색하던 루치가 비로소 드디어 살겠다는 표정을 지을만큼 카쿠의 입은 쉬지 않았다. 적어도 저 주둥이에 뭐라도 들어가면 입 다물고 있겠지, 하는 희망이었다. "자 지금부터 1시까지 점심식사를 한 후 알아서 구령대 앞으로 모이도록!" 넉넉하게 1시간 30분 정도로 주어진 점심시간, 미나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쵸파의 손을 붙잡고 1학년 1반 부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도시락을 다 싸왔으니 걱정말라며 여학생들의 숫자대로 도시락을 꺼내 곱게 내려놓은 상디의 유려한 손끝에 미나는 잠시 할말을 잃고 이 녀석은 진짜다, 라는 판단을 내려야했다. 도시락 뚜껑을 열자마자 보이는 희고 기름기가 도는 흰쌀밥과 사이사이 콕콕 건강까지 챙긴 현미가 박혀있었던 것도 나름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위로 기름기의 주인인 듯 따듯한 김을 퐁퐁 보이는 고기와 장아찌, 더불어 고소한 향을 풍기는 소세지까지 보자마자 침을 흘리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훌륭한 도시락이었다. ".....와." 감정표현이 드문 미나마저도 참지 못하고 내뱉을만큼, 도시락의 종류는 다양하기까지 했다. 미나가 받은 것은 생선커틀릿이 들어있는 5단 도시락이었다. 3단까지는 애정으로 봐주겠지만 5단부터는 청혼이라던데, 떨떠름한 표정으로 1단부터 차례로 내려놓자 테이블은 어느새 화려한 만찬장으로 변신했다. 식전으로 입을 가볍게 물로 헹구고, 적당히 따듯한 밥을 입에 집어넣고 생선 커틀릿을 씹는 순간, 바다에서 방금 막 낚아올린 듯 통통하고도 신선한 생선의 살이 부드럽게 익혀져 가볍게 찢어진다. "...맛있어." "마드모아젤의 입맛에 맞으시나요오~?" 그것만으로도 제게 크나큰 기쁨! 과장된 몸짓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을 이리저리 꼰 상디의 반응이 밉지 않을만큼, 진심으로 그의 도시락은 환상적이었다. 물론 마음속 부동의 1위를 제칠수는 없었지만 그때의 맛을 위협할 정도로 그의 도시락은 혀끝에서 춤을 추었다. 황홀한 맛에 정신없이 넋을 놓고 있을 때쯤, 불쑥 익숙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옅고, 산의 푸릇한 향이 나는 여름빛 바람 냄새였다. "합석 가능한감? 저 멀리서부터 냄새가 엄청나서, 도무지 참을수가 없더군." 냄새나는 남자들은 저리 꺼지라며 바로 목청을 키우는 상디였지만, 기꺼이 자리를 비켜주고선 커틀릿을 잘라 카쿠의 입에 넣어주는 것을 보자 그대로 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애달프게 손수건을 짓씹을 뿐이었다. 엉덩이를 들이밀고 합석을 자처해 자리를 빼앗은 카쿠는 여자에 미친놈인줄 알았더니 요리솜씨가 기가막히다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는 평가를 내리고선 태연하게 미나가 내미는 고기를 날름날름 받아먹었다. 그 말에 뒷골을 잡고 쓰러지는 상디는 덤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둘이 만난 이상 둘의 세계에 빠져버린 그들에게는 닿지 않은 발악이었다. 으레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그러하듯 익숙한 무시와 외면이었다. "이 커틀릿, 정말 맛있네.. 미나, 부동의 1위 자리가 위험한 거 아닌감..? 아니겠지..? 분명 그때 고기가 가장 맛있다고 하지 않았나. 말 바꾸면 몹쓸 아이일세." "바꿀 생각은 없는데." 단조로운 어투로 내뱉는 담백한 부정이었다. 그저 그 짧은 부정조차도 좋아 죽겠다는 듯 볼을 붉히고 광대가 치솟도록 웃은 카쿠는 미소를 숨기지 않았고, 덕분에 궁금증이 생긴 듯, 나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운 날씨 탓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체육대회의 열기에 달아오른 몸 때문인건지 어느새 오렌지 샤베트부터 먹어치웠음을 드러내듯 디저트 칸만 쏙 비워져있는 도시락이 그녀의 앞에 있었다. 빠르네. 그리고 내 디저트는 기가막히게 안 건드렸어. 남자애들의 도시락칸에 있는 디저트를 향해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으며, 나미의 표정에 의아함이 동실, 떠오른다. "부동의 1위가 뭔데? 미나가 좋아하는 고기가 따로 있어?" "별거 없어. 내가 애니에스 로비에서 먹었던 고기였을 뿐이야." 아. 요리사인 상디는 단번에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씨근덕거리던 표정을 잠재웠다. 사연있는 요리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없지. 쵸파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솜사탕이지만 그보다 더 넘을 수 없는 것은 어느 눈물젖은 빵이었던 것처럼. 미나는 희미한 미소를 띄며 그날 먹었던 고기를 떠올렸다. 잔뜩 지쳐있었던, 훈련에 매진해 그날도 변함없이 축 늘어져있었던 때였다. 그들과 같이 뛰어가고, 혹독한 훈련과정을 거쳐 마침내 탈진이 되었던 때, 애니에스 로비에서는 한달에 한번씩 그들에게 고기를 잔뜩 먹여주는 날을 잡았었다.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고기를 많이 먹여줘야한다는 스팬담의 주장에 애니에스 로비에서 처음으로 먹었던 고기는, 구안하오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맛있었다. 그 곁에 있었던 일원이, 단 하나도 빠짐없이 웃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미나는 그 순간을 회상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날 먹었던 고기의 육즙보다, 영원처럼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했던 친우들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고기를 한조각씩 잘라 그녀의 입에 쏙쏙 넣어주고선 흡족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카쿠의 미소를 잊을수가 없었다. 자신을 볼 때마다 지어지는 다정한 미소, 따듯한 눈빛과 곁에 성큼 다가와 부드럽게 사방에 스며들도록 흩뿌리는 여름빛 바람냄새를, 미나는 미세한 질투를 톡톡 터뜨리며 눈을 찡그렸다. 그건 누가 무어라고 해도, '그건' 미나의 것이었다. 보아라, 지금도 그녀의 미소에 생긋 웃어보이고선 얌전히 쥐여주는 칼을 들고 커틀릿이나 썰어 제 입속에 넣어주는 그의 행동을. 그건 미나의 것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양보해줄 생각이 없고 찰나조차도 주고 싶지 않은 온전히 그녀만의 순간, 그에게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당연하고도 지극한 행동.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점심식사가 끝나고, 카쿠는 아쉬운 눈빛을 감추지 않으며 학생회의 일원으로 되돌아갔고 루치는 그런 그를 향해 잠시 입을 벙긋 벌렸다가 관두기로 했다. 미나가 그를 향해 소유욕을 드러내고 있었다고 넌저시 알려주더라도 카쿠는 그렇게 크게 반응하지 않았을테니까. 외려 그게 당연한 거 아니겠냐며 루치의 복장을 박박 긁어놓을 것이 틀림없었으니, 루치는 입을 다물고 이번에도 거리를 벌리는 편을 택했다. 연애의 징검다리 역할은 사절이었다. 물론 답답해죽겠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함부로 초를 치려고 하는 늑대의 입을 발로 차 막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뭐, 어떤 관계는 느리게 진전되는 것이 더 오래가는 방법이 되기도 하니까. 늪같은 관계성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잡혀 서서히 가라앉고 있음에도 그 늪속에서 숨막혀 죽는 것이 그들의 세계인 관계였으니까. 언제봐도 지긋지긋하다니까. 늑대와 비슷한 답답함을 느끼며, 루치는 미간을 좁혀버렸다. "OH! 줄다리기는~, 2학년 4반의 승리로 아, End~!! 자아ㅡ, 마지막 경기는! 학생회와 함께하는 2인 3각! 지금까지 나왔던 모든 우승후보 팀! 1위부터 9위까지에게만 주어지는 LAST~ CHANCE!! 이번 경기로 승리를 더더욱 공고하게 다질 것이냐, 혹은 1위를 거머쥐어 역전의 용사가 될 것인가!! 그것이 바로 지그음~, NOW! 시작됩니다아!" "우리는 누구 나갈건지 정했어?" 1학년 1반, 나머지 3위 팀에 해당된 덕분에 2인 3각 경기에 나가게 되자, 루피가 번쩍 손을 들어올리며 적극적으로 참여를 외쳤다. 물론 모든 경기에는 참여할 수 없다는 규칙을 들이미는 나미 앞에서 다시 시무룩해졌지만. 이쯤되니 자연스럽게 처음 조건달리기 이후로 쭉 어떤 경기에도 참여하지 않은 미나에게 시선이 몰렸다. 불길한데. 눈을 찌푸리며 거절하려는 순가나 비비가 날렵하게 그녀의 손을 낚아채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윽, 일부러 얘 얼굴에 약하다는 거 알고! 이런 약삭빠른 것들! 나직하게 비비를 부추겼을 것이 틀림없는 1반의 학생들을 향해 매섭게 눈빛으로 질책했지만, 어쩌겠나. 이미 그녀의 손은 비비에게 잡혀있고 비비는 이번 체육대회에서 등수는 상관없고 단 한명도 소외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던데. 그 부탁이 다정한 마음에 기반했다는 것을 알았기에, 결국 미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울며 겨자먹기식이었다. "알았어..." 물론 저 멀리서 잔뜩 집중한 채 귀를 쫑긋거린 카쿠가 바람처럼 빠르게 자기가 1반과 할테니 빠지라는 으름장 섞인 협박을 하는 것도 그녀에게는 닿지 않았다. 루치의 '줘도 안 가진다'와 재브라의 '그걸 하고 싶냐'라는 의문, 그리고 블루노의 '귀찮겠다'라는 대답에 경쟁자가 없음을 확인한 카쿠의 입가에 나긋한 미소가 지어진다. 자네들이 욕심이 없는 편이라 참 다행일세. 참지 못하고 그대로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늑대를 시선 너머로 치워버린 카쿠가 발랄한 걸음으로 선 위에서 대기하는 미나를 향해 다가간다. 능숙하게 다리를 묶고 자기들이 1등을 거머쥐자며 당차게 말하는 카쿠를 향해, 미나는 의심스럽다는 시선을 숨기지 못하고 은근슬쩍 드러냈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미나가 나오는 경기마다 은근슬쩍 참여해 있는 카쿠의 존재는 유달리 눈에 띄기는 하였으니. 그러나 미나는 따지기를 관두고 카쿠의 주먹인사에 손이나 부딪히기로 했다. 뭐든 별로 그녀에게는 중요한 이유가 되지 않을터였다. 다리를 묶고, 깃발이 순식간에 아래로 내려가며 시작신호를 대신한다. 심판의 우렁찬 신호가 끝나기 무섭게 십여년은 호흡을 맞춘 사람처럼 달리기 시작하는 1반팀. 쵸파는 두 사람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만큼 능숙한 달리기와 빠른 호흡에 휘둥그레 뜨며 입을 벌렸다. "와! 미나랑 카쿠, 진짜 잘한다!!" "그러게~. 무지 오랫동안 합을 맞춰온 파트너 같은걸?" "후훗, 어떤 의미로든~. 말이지?" 차례로 나미, 로빈의 반응에 아직 이해하지 못한 쵸파가 순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장난기와 음흉한 눈빛을 주고받은 나미와 로빈은 태연하게 이해하지 못한 쵸파를 두고 둘 사이의 오묘한 관계성에 대해서 즐겁게 토론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카쿠의 오른발이 힘차게 다음 박차를 가하고 동시에 미나의 왼발이 카쿠의 호흡에 맞춰 완벽한 화합을 이룬다. 오른발, 왼발, 서로의 반대쪽이라도 된 것처럼 수월하게 다음 순간을 향해 나아가고 밟아 그 다음의 순간을 위해 쉬지않고 규칙적인 호흡을 뱉어내는 것은 꽤 짜릿한 일이었다. "미나, 행복한가?" "...더할나위없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미나의 대답에 카쿠의 입이 벌어지며 허파에 한가득 웃음이 채워진다. 열기가 느껴지는 숨이, 박차며 흐트러지는 모래와 신발 사이로 섞여들어가는 까끌한 감촉마저도 지금은 그저 기꺼웠다. 내달리며 뺨을 스치고 시원스럽게 불어오는 바람도, 눈을 강하게 내리찍는 듯한 햇살도, 멀리서 환호성을 지르며 응원하는 친구들의 목소리와 요란하고도 힘찬 음악소리도, 곁에서 함께 뛰고 있는 소년도,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완벽한 여름의 순간이었다. 단 한순간도 놓칠 수 없는 청춘의 조각이었다.
자흑색의 나비가 포르르 흔들리는 날개를 털며 선상을 휘젓는다. 록스 해적단의 명물이자 기본적인 일상이라는 양 벌어지는 동료살해의 현장을 지나쳐 우아한 곡선을 그려낸다. 힘겨루기라도 하려는 듯 날카롭게 칼과 창끼리 부딪히는 금속의 소리가 울리고 뾰족하게 솟아오른 쇠붙이의 끝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다시 허공을 날아오르는 나비의 다음 행선지는 언제나처럼 소란의 중심인 식당이었다. 깨진 창문들에 박혀있는 유리조각들을 매끄럽게 지나쳐 공중에 날아오른 나비가 눈앞의 광경에 참담함을 금치 못하겠다는 듯 날갯짓을 멈춘다. 독을 넣은 거 아니냐며 윽박지르는 해적들 사이로 처먹고 뒤져보면 알지 않겠냐고 국자를 휘두르는 요리사, 그 뒤에서 자기가 찜해놓은 거라며 난동을 부리는 해적들과 눈깜빡할 사이에 허공을 가로지르는 음식물까지. 그야말로 난장판이라고 이름붙이기에 딱 적당한 상황이었다. 단검을 집어던지며 입을 줄이면 먹을 것이 늘어나지 않겠느냐는 기적의 논리를 내뱉는 해적과 그런 단검을 붙잡아 다시 되돌려주며 오늘이야말로 너의 제삿날이라고 목이 쉬어라 부르짖고 달려드는 해적들의 손길까지 부드럽게 휘어 피해낸 나비가 마침내 어느 방에 다다른 순간, 부루퉁한 어조가 나비를 향해 묵직하게 내뱉어진다. "커피. 염탐은 그만해라." 그 말에 웃기라도 하는 듯 나비의 날개가 포르륵, 흔들린다. 그의 경고를 알겠다고 알아들은 듯 다시 공중에 날아오른 나비가 열려있는 선실의 창밖으로 날아오른다. 읽고있던 잡서들과 손질하던 무기들을 내려놓은 채 한숨을 내쉰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기묘한 곡선을 그리는 나비의 등뒤를 쫓아 느릿한 걸음을 옮겼다. 요란법석을 피우는 식당을 지나, 부지런히 무언가를 내기하고 도박에 이빠진 금화를 내던지는 앞쪽의 갑판을 지나, 이따금 강한 자들만이 찾곤 하는 한적한 후미의 갑판으로. 길고 긴 여행을 지나 마침내 제 주인의 손끝에 안착한 순간 나비를 꽃아온 사내, 에드워드 뉴게이트는 미간을 좁히며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나비가 안착한 장소는 바로 온몸을 붕대로 가리고 있던 록스 해적단의 선원, 에스프레소ㅡ 일명 커피였다. 늘씬한 손짓으로 손끝에 올렸던 나비를 찻잔으로 부드럽게 내려준 커피가 미약하게 어깨를 떨었다. 보내왔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겨우 그것이 웃는 동작임을 알아차린 뉴게이트가 다시 한번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며 커피의 앞에 주저앉고, 한없이 우왁스러운 그의 덩치와 거침없는 몸짓에 희고도 고운 빗깔과 나무결을 자랑하던 티테이블의 의자가 삐꺽거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누누이 말하지만 넌 당최 취향이 알 수가 없다." "누가 할말을." 자기 몸통만한 언월도 휘두르고 다니는 사람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단호하게 뉴게이트의 취향저격발언을 정면에서 반박한 커피가 빈 찻잔에 부드럽게 독극물을 따르고, 다시 나비를 불러 느릿한 동작으로 찻잔 안에 담긴 액체를 마셨다. 검고 보라빛이 번들거리는 액체가 찻잔의 희고 깨끗한 도자기 빛에 반사되었고 덕분에 그 액체가 실시간으로 나비의 몸집을 부풀리며 삼켜지는 것을 바라보게 된 뉴게이트의 얼굴이 와작 구겨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동네 사람 다 불러서 물어봐라, 니가 이상한가 내가 이상한가. 투덜거리는 뉴게이트의 음성에도 커피는 그저 무심하게 책장을 넘기며 읽는지 아니면 그냥 책장만 넘기는건지 모르겠는 동작만 반복하는 커피였다. 일단 뭐가 보여야 눈동자가 움직이는가 마는구나를 알지 당최. 불만스럽게 튀어나온 입술이 간수되지 않고 주르륵 자신이 느껴왔던 바를 늘어놓는 동안 커피는 심드렁하게 가끔 고개만 까닥거렸을 뿐 더이상의 반응은 보여주지 않았다. 마시고 있던 검은빛의 액체가 도자기에 반짝거리며 빛을 반사하고, 파도의 윤슬을 닮은 빛무리가 어슴푸레하게 시야를 어지럽히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듣고있어? 그 책 내용이 그렇게 재밌냐고 한 일곱번째 물어봤는데." "아, 취향을 알 수가 없다고 말한 부분부터 안 들었어." "처음부터 안 들었잖아!" 바락 성내는 뉴게이트의 목소리에 경쾌하게 웃음을 터뜨린 커피의 몸짓이 여상하게 봄바람의 나뭇잎처럼 흔들리고 이어 진정된 듯 턱을 괴며 뉴게이트를 바라본 커피가 모자챙 너머로 온몸을 감싼 흰 붕대를 드러내며 낮게 키득거린다. "내가 네 발언에 일일이 집중하기에는 시간이 아깝잖아, 그렇지?" "그거 지금 내 말 계속 안 듣겠다는 뜻이냐, 엉?" 너무하네. 웅얼거리는 음성이 작아지면서도 자리를 뜨지 않는 뉴게이트의 반응에 커피는 고개를 기울이며 새삼스럽게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우아한 포로, 그들의 해적 생활을 표현하기에 그만큼 적절한 단어는 또 없을 정도인 생활이었다. 커피는 바다에 나오기를 원하지 않았으나 떠밀려 나왔고, 뉴게이트는 바다로 나오기를 원했으나 타의로 인해 이 배에 올랐다. 이 배에 내로라하는 간부들 중 대부분은 아마 원하지 않은 항해를 이어나가며 불만스럽게 록스를 노려보는 게 일상의 시작이었을 정도니 그들의 사연은 이 배에서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함께 티테이블에 앉아있는 이유는 무얼까. 아마도, 커피는 느릿한 동작으로 붕대 너머 툴툴거리며 둥그런 배를 자랑하는 티포트를 건드리는 굵은 손가락을 흘겨보았다. 자신과 달리 잔흉터와 함께 투박한 온기를 품은 손이었다. 커피는 본래 제 곁에 오는 모든 이들을 향해 두루뭉술한 웃음을 짓고는 고아한 자태로 냉큼 그 자리에서 벗어나곤 했다. 곁을 주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뉴게이트, 이 사내만큼은 예외로 들여보냈는지 고민하며 그는 길게 뻗은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과거를 더듬었다. 굳이 고르고 고르자면 커피가 실수를 했을 때, 였을 것이다. 구체적인 일자와 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적으로 그날 커피는 독극물의 배합을 잘못하는 실수를 범했고 덕분에 록스 해적단의 선원으로써 저질러서는 안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버리고 말았다. 바로 약해져버리는 것. 그저 잠깐의 실수였다. 이틀, 조금 급하게 처리한다면 하루만 시간을 주면 순식간에 나을 수 있었던 아주 사소한 실수. 다른 해적단의 배였다면, 애초에 커피가 독을 마시고 거침없이 독극물을 제조하는 것에 상냥한 선장은 눈쌀을 찌푸리며 관두라고 했을 것이었다. 그리곤 기존에 먹은 것까지 싹 해독시키느라 선의를 닦달하고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봤겠지. 단호하고 더러운 성격의 선장이었다면 혀를 한번 차고 하루쯤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선장이 개판일수록 선원들은 기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서로를 아껴주곤 했으니 그것 또한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며 실실 웃고선 눈빛으로는 걱정 말라 다독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록스, 선장의 명령만 없다면 개떼처럼 달려들어 냅다 물어뜯고 보는 선원들이 파다한 곳이었기에, 그날 커피가 느꼈던 난처함은 세상이 거꾸로 뒤집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선장조차도 그저 끌어모아놓기에 바쁜 개성 강한 녀석들 사이에서 살아남기란 꽤나 벅찼던 일이었으므로. 특히 유독 험악하고도 거친 인생을 살아온 해적들 사이 홀로 고상하게 앉아 오후의 티타임부터 고급스러운 양장피 책까지 읽어대는 커피의 모습은 늘 이질적이고도 추레한 질투를 불러왔기에 더더욱, 그에게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자흑색의 가죽커버부터 깔끔하게 재단되어 금박까지 입혀져있는 책은 아무래도 글자라는 것과 멀어도 한참 거리가 먼 해적들에게 더더욱 눈길을 끄는 것이긴 했다. 물론 익숙해지다못해 일주일이면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려버리고 제 인생을 사느라 바빴지만 말이다. 익숙하고 낯익은 이들로만 이루어진 해적단이었다면 커피 역시 자신의 실수를 난처해하는 일은 없었으리라. 하필이면 동료살해가 빈번한만큼 신입들 또한 넘쳐나는 배였다. 당장 지금 방밖으로 나가기만 해도 정찰을 관음증 환자랍시고 버럭버럭 성을 내고 날려보낸 나비들을 으스러뜨리고 짓씹어 으깨놓은 것들이 파다한데, 곤란에 빠진 그를 도와준 것이 바로 뉴게이트였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행동을 학살하고 싶지 않은 다정한 마음으로 읽어낸 뉴게이트가 멋대로 오해한 것이었지만. 아예 틀린 것도 아니었으니 커피는 그의 옅은 경계에 눈썹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배에 올랐을 때부터 줄곧 짜증나 죽겠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던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묘하게 가벼워졌다는 것을 느끼자마자 커피의 경계가 더 올라갔음에는 말을 굳이 얹지 않아도 될만큼 확고했다. 저 녀석 갑자기 내게 무슨 볼일이지? 하필이면 별로 좋지 못했던 상황 탓에 신경이 끝까지 예민해진 그였다. '...너도 이번 작전, 마음에 안 드는거지?' 다짜고짜 내뱉은 첫문장에 지었던 멍한 표정은 다행히 붕대 너머로 보이지 않았지만. 뉴게이트는 그것을 긍정의 뜻으로 읽었는지 냅다 씨익 입꼬리를 당겨 호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나마 마지막으로 남은 인간성을 발견한 것처럼 신난 표정에 커피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덕분에 뉴게이트는 그날 자신의 불만들을 주르륵 쏟아내며 공감을 부르짖었고 커피는 생전 처음보는 유형의 사람에 놀란 눈을 감추지 못한 채 신기한 표정으로 그와 시간을 보냈다. 현란하게 내뱉어지는 록스의 뒷담화와 있는지도 몰랐던 선원들의 행보, 그리고 까먹었던 명령들까지 끌어올리며 줄줄이 내뱉어지는 그의 음성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되어 수놓아졌고 순식간에 전환되는 화제와 그에 맞추어져서 다시 들어가는 촘촘한 상황설명, 덧붙여지는 뉴게이트의 심정까지 듣고나니 어지간한 소설은 뺨치도록 흥미로웠다. 어느새 자신의 몸상태와 그륵거리며 목구멍 근처에서 끓는 피고름은 잊어버린 상태였다. 기가막히게 커피 또한 가끔씩 눈쌀을 찌푸렸던 잔혹한 명령들과 작전들을 언급하며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것 같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하는 뉴게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잠시, 커피는 드물게. 즐거웠다. 해적들 중에 온건한 삶을 살아온 자가 어디있으랴. 있다 하여도 결국 평범하게 살아온 자들은 대체적으로 바다를 나오지 않고자 했으므로 선원들 중에서는 세상을 곱게 보는 인원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여 그들의 잔혹성은 비극적인 어린 과거에 묻혀 정당성을 갖게 되었고 덕분에 그들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었다. 내딛는 걸음마다 울려퍼지는 비명이 익숙하다 여겨 그것이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겪은 불행을 이유로 타인에게도 저와 같은 비극을 쏟아내는 자들에게 누가 칭찬의 박수를 보내고 격려하겠는가? 적어도 커피는 선악의 구분은 행해야한다고 생각했고 옳고 그름은 판별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원하는 방향과 행하는 것이 달라도 분별력은 갖추고 있어야지. 선악도 구분 못하고 자신이 정의라고 착각하고 있는 부류가 악임을 인지하고서도 악행을 이어나가는 자보다 더 위험했다. 커피는 뉴게이트가 갖고 있는 마지막 인간성과 선의를 마음에 들어했고, 뉴게이트는 커피가 갖고 있는 자제력을 흡족해했다. 그리하여 이따금, 뉴게이트는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커피의 티타임에 불쑥 끼어들었고 커피는 꽤 덤덤하게 그런 그의 침입을 허용하곤 했던 것이다. 그게, 그들의 대화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래서 요즘 몸은 어떠냐?" "후후, 바로 몸상태를 묻는거야? 이전과 같아." "그라라라, 네 몸상태가 같다고 말하는 건 좋은건지 나쁜건지 영 모르겠다니까." 경쾌한 웃음소리. 세상 호탕한 그 웃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 단지 그뿐이었다. 겨우 그 웃음소리 하나 때문에 묶였던 발이었다. 떠날 생각보다는 이어나갈 시간이 기꺼워지는 웃음소리였다. 반짝이는 별들과 쏟아질듯하게 새카만 하늘 아래에서 불쑥 제 꿈이랍시고 내뱉은 문장도 퍽 다정하고도 상냥하여 슬그머니 붙여놓은 인연이었다. 비웃던 꿈들 사이 유독 소박하고도 다정한 꿈이었기에 커피는 그의 꿈을 근사하다 평해주곤 했다. 그럼 뉴게이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조롱없는 반응을 기뻐했고. 단지 그뿐이라고 칭하면 그만이었던 관계였다.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 "...나가면 되지 않나?" "선장이 쫓아오겠지. 어디까지 가나 구경한 다음 사냥감을 가지고 놀듯이 희롱하고 괴롭힐거다. 아마 싹수가 보이는 놈은 고분하게 굴도록 약점을 잡을테고 고분하지 않은 것은 굴복시키거나 죽여버리겠지." 으레 도망친 선원들이 그러했듯이. 힘없이 날이 시퍼런 언월도를 만지작거린 뉴게이트의 금안이 달빛에 반짝이며 서늘하게 빛을 발했다. 너는 갈 수 있지? 그렇게 묻는 듯한 눈동자에 커피는 자신도 모르게 눈동자를 굴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갈 수 없다. 그리 솔직하게 말하기에는 아직 확신이 들지 않았고 무엇보다 록스의 심기를 거슬러서까지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기에. 온갖 기행들을 다 일으키는 록스 해적단 내부에서 몸을 나비로 화하거나 귀족처럼 책을 읽는 모습은 꽤 이질적이긴 했어도 독특한 축에 끼지 못했다. 나비를 불러모으고 적들의 목에 독극물을 집어넣는 것을 보았어도 선원들은 비명을 지르거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저 신기하다, 라는 단순한 감상평만을 남긴 채 자신들의 꿈에 취하느라 바빴으니까. 제각기 자신이 쫓고 만들어낸 환상에 발악하며 사느라 바빴으니까. 허무맹랑한 꿈을 비웃을지언정 그것이 아예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는 곳이 바로 록스였다. 단지 품은 사람의 행보와 강약의 여부를 비웃었지. 그래, 이곳에서 커피는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한껏 벌벌 떨거나 잊혀진 종족이 아니냐며 탐욕스럽게 눈을 빛내는 사람들은 없었다. 겨우 그 취급 하나만으로도, 제법 이곳은 지내기에 괜찮은 곳으로 둔갑하곤 했으니.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데. 중얼거린 커피의 음성에 뉴게이트의 눈이 실망으로 물들어진다. 참으로 투명한 표정이 아닌가, 커피는 와중에도 얼굴색이 몹시도 투명하게 드러나는 그를 바라보며 미묘하게 입꼬리를 잡아 당겼다. 제 앞에서만 솔직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표현하기에 거침이 없는 것인지. 어느 쪽이더라도 상관없었으나 무심코 전자를 바라는 커피였다. 과하게 친해졌군. 제 입장에서 한발자국 물러나 그리 칭한 인연이었다. 밤이 깊고 어느 때처럼 늦은 티타임을 즐기던 그때, 뉴게이트는 평소처럼 나불거리던 입을 닫고선 사뭇 진지하게 제게 생과 죽음을 논했다. 감히 그 단어를 입에 올렸다. 과하게, 지나치게 무거워 숨이 막힐듯한 그 단어를 담았다. "...커피. 너는 죽지마라. 알았지?" "후후, 걱정마. 나는 안 죽어." 단호한 진실처럼 내뱉은 그 순간 커피는 모순적이게도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사람은 죽는다. 결국 언젠가는 죽는다. 수명이 다하여 죽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신세계가 그것을 허락해줄까? 낙원에서도 빈번하게 죽는 해적들의 짧고 화려했던 생애를 떠올린 커피는 곰곰히 뉴게이트에게 남길 말을 고민해보았다. 그럭저럭 나 죽는다, 정도면 될까. 빈약하기 짝이 없는 네글자의 유언에 이 정도면 적당하다 생각한 커피가 마저 책장을 넘기기 위해 고개를 들어올리자 뉴게이트가 희끗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 약속인가?" "후후. 불안해하는건가? 그건 뉴게이트,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데ㅡ" 그런 태도를 가져서 어떻게 하나. 여린 마음으로 내게 정을 주어 어찌해. 내뱉으려던 말이 끊긴 것은 급작스럽게 제게 다가온 고통 때문이었다. 역시, 영 좋지 않은 독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직 분해가 덜 된 모양인지 몸속에서 날카로운 쇳조각들이 날뛰는 것 같은 통증이 휘몰아친다. 간신히 붙잡은 정신에 덜덜 떨리는 몸, 그 위로 얹혀졌던 따듯한 손이 지금은 몹시도 뜨거웠다. 얼핏 데일 것 같은 온도에 치워주지 않겠느냐고 차분하게 밀어낸 손짓이 그에게는 거절의 의미가 되었는지 뉴게이트의 표정은 하필이면 달 어두운 밤이라 보이지 않았다. 자네 지금 내게 실망하고 있나? 내 거절이 그어놓은 선이 되었을까? 만일 그러하다면 나는 지금 어떠한 감정을 느껴야하는 것인지. 미안함인지 죄책감인지 안도인지 도무지 모를 감정들이 엉망으로 섞여 진창을 만들어낸다. 들이쉬는 호흡은 공기 속에서 온갖 가시들이 박힌 듯 폐부에 찔러넣어졌고 내뱉는 호흡은 간신히 진정시켜놓았던 숨통을 다시금 억세게 조이며 갈퀴로 긁어내는 듯했다. 그륵거리며 간신히 내뱉은 숨에 흘러나오는 피가 덮고 있던 붕대를 축축하게 적시며 흘러내렸고 헐떡거리는 숨통에 뉴게이트는 거절당한 손을 천천히 들어올려 그의 얼굴을 막고 있던 붕대를 풀어주기 시작했다. 한꺼풀, 벗겨지며 마침내 금이 가고 갈라져 엉망이 된 낯이 금안에 닿는 순간 뉴게이트의 표정이 보이지 않은 것을, 커피는 후회했다. 창백하고도 희다. 단순히 그것을 넘어서 온몸에 쩍쩍 갈라져있는 금이 흉하다고 너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불안해하는 눈동자가 흔들림없이 바닥에 고정된 순간 뉴게이트가 한 질문은 몹시도 단순한,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었다. "...괜찮은건가, 커피?" "시간. 이.. 필요한 것 같,네..." 그렇다면야. 그 말을 끝으로 뉴게이트는 커피가 진정이 될 때까지 뒷갑판을 지켜주었고 이따금 담배인지 담소인지를 나누기 위해 나왔던 해적들은 침을 뱉으며 재수없다 욕하거나 뉴게이트가 선점한 자리임을 확인하고 얌전히 되돌아가곤 했다. 그의 등뒤에서 옅게 내뱉는 호흡 하나에도 헐떡이는 사내가 커피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물론, 알았다고 하여도 뉴게이트의 철통보안을 뚫고서 그에게 음흉한 의도로 접근할수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선의 한명도 믿을 수 없다고 부러 선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그를 이해하는 것은 그뿐이었다. 온몸에 흐르는 혈류가 독인 자신에게 다가오다가 되려 선의가 다치고 말겠지. 고통을 잊기 위해 팽팽 돌아가는 머리로 끝없이 이어질 생각들을 떠올리며 커피는 이를 악물었다. 통증이 글자 그대로 날카롭게 몸속을 뛰노는 것 같다. 고통이라는 활자가 제 몸속에서 팔짝거리는 것을 고스란히 느끼며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는다. 창백하게 핏기 없어진 피부에 송골하게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고 진정된 호흡이 마침내 원래의 박자를 찾은 순간, 뉴게이트의 등이 움찔거렸다. 꽤 옅어진 혈향이었다. "...자네였군. 일어났나?" ".....그래." 아. 커피의 눈이 힘없이 떨구어진다. 뉴게이트의 금안이 비슷한 색을 띄우며 밤하늘의 어둠속에서 빛난다. 이때만큼은, 그들이 서로에게 가졌던 감정은 온전히 동정이었다. 무섭도록 깨끗한 눈동자 속에서 또렷하게 비추어지는 자신을 향한 연민이었다. 이제 우리는 이 배를 떠나서도 서로를 잊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괜찮겠지 싶어 무심하게 내버려두었던 희미한 연이 언제부터 족쇄가 되어 서로의 발목을 움켜잡았는지. 마음에 들어했던 부분들이 하나둘씩 무겁게 손목을 움켜잡으며 내려앉는다. 기껍게 보았던 마음들이 벅차도록 가슴에 들이박힌다. 때로 어떤 인연은 쇠줄보다 더 질기고 도무지 끊을 수 없다고 하였거든 우리는 어째서 섣불리 서로에게 곁을 주었던가. 뒤늦게 그들은 후회를 배웠다. 풍랑에 꺾이고 파도에 바스러져 살아가는 생이 이 바다에 나와 살아가는 사람들의 운명이거늘 결국 우리는 서로의 죽음에 슬퍼할 것을 알았다. 붙어있을 호흡에 안도함을 알았다. 하여 결국 그것을 연蓮이라고 부를 것임을 알았다. 결코 타인으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이제 우리, 친구인건가?" 그 기묘하게 이어져버린 질기고 비린내는 붉은 사슬을 너는 연이라 불렀다. 하여 커피는 제 맨얼굴 가득 들이치는 상쾌하고도 청량한 밤바람에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꽤 서글퍼보였던 시선이 그리하면 조금 옅어질까 싶어서. 그가 붙여놓은 연의 껍질이 마음에 들어서. 그가 이름붙여놓은 연의 껍데기가 흡족하여. 커피는 말갛게 웃음을 터뜨리며 달없는 밤 기꺼이 자주빛 눈동자를 빛내며 나비가 날개를 파들거리듯 어깨를 떨었던 것이다. 으레 그가 불러왔고 또 날려보낸 나비들이 그러하듯 영롱하고도 깨끗한 자흑빛의 빛나는 가루들을 떨구어내듯이. 하여 그들은 자신의 관계를, 친구라고 칭하기로 정했다. 이름 붙여진 관계 위에서 그들은 오롯하게 남을 수 있었고, 타인이 될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지 않으며 손을 뻗어 그들의 생존을 바랐다. 서로의 행복을 소원했다. 그들은 이제 그러기에 마땅한 관계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