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MOMO

*해당 글은 커미션 글입니다.


그는 도무지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 같아보였다.
 
 
근처에 맴도는 여자들에게도 다정한 웃음 한번 보여준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가끔씩 보이는 매력적인 입꼬리는 오로지 그가 임무에 성공했을때나 해적들을 도륙내고서야 비로소 올라갈 기미를 보이곤 했었다. 만약 저 사람이 사랑을 한다면 그 끝은 비극적일 것이라고 일부는 수근거리곤 했다. 저주처럼 내뱉은 문장에도 코웃음 한번 치고 시원스럽게 뒤통수를 보이는 그에게도 시리도록 잊을 수 없는 겨울이 있었다.
 
 
새하얀 백옥같은 피부에 어느 겨울밤의 눈내리던 어둑한 흑단같은 머리카락을 가졌던 어느 소녀를 그는 사랑했다. 새카만 눈동자를 도륵 굴려 자신을 향해 방긋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밤을 지새웠던 그런 철없고 어리던 날이 있었다. 유키코,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이름을 곱씹으면 새삼 눈아프도록 빛나던 백설이 떠올랐고 온기 가득한 숨을 내뱉으며 우리의 낙원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숲을 뛰놀았던 순간이 자연스럽게 뒤따라 떠올랐다.
 
 
 
"아라마키!"
 
 
 
곱디 고운 목소리로 소년의 이름을 부르면, 소년은 세상에서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누구보다 빠르게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달음박질을 치곤했다. 누구보다 고상한 척 드높고 꼿꼿하게 자란 나무들 사이로 급하게 뛰어들어가면 언제나 그리듯 겨울숲 한가운데에서 경쾌한 웃음소리를 퍼뜨리며 자신을 기다리던, 겨울을 닮은 거지소녀 한명. 가진 것 하나 없었고 쥘 수 있었던 것은 고작해야 겨울숲의 앙상하게 마른 가지 하나뿐이었지만, 상쾌한 공기와 코끝이 아리도록 시린 바람을 마음에 들어하던 유키코였기에 그는 숲이 제것인 것처럼 기꺼웠다.
 
 
 
"나는 겨울숲이 좋아, 특히 겨울에 오는 숲은 완전 공기도 깨끗하고, 벌레도 없잖아. 온 세상이 하얀색으로 덮히면... 그곳에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
 
 
 
나직하게 고백해오는 유키코의 말에 수줍게 자신 또한 좋다고 두루뭉술하게 말한 소년의 말을 이해한 듯 아이는 허술한 웃음을 지으며 볼을 붉히곤 했다. 형편없는 고백과 별볼일없는 분위기 속에서도 소녀는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풋풋하기 짝이 없는 사랑이었지만 엄연히 그것은 사랑이었다. 애정이었고, 친애하는 마음은 전부 오롯이 그녀를 위한 것이었기에 소년은 아직 아물어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를 눈여겨보곤 했다. 봄이 되어 그것이 활짝 피어오르는 날 그것을 꺾어 소녀에게 쥐어주리라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들꽃만이 그가 사랑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어주곤 했다.
 
 
다만 그들은 무언가를 사랑하기에는 그것이 사치인 사람들이었다. 살아가는 것에도 벅차 헐떡거리던 그런 아이들이었다. 이 세계는 유독 아이에게는 냉정하고 약자에게만큼은 비정한 세계였기에 그 어떤 보호자도 존재하지 못했던 아이들에게는 지독한 세상이었다. 지나치게 시리고 가끔 피는 들꽃 외에는 쓸모도 볼 것도 없는 숲만이 그들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듯, 아이들의 세계는 좁고 시리던 겨울숲 하나뿐이었다.
 
 
어떤 사랑은 꿈꾸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는 것을 소년은 그때 처음 절절하게 깨달았다. 깡패들이 소년의 다부진 체격을 탐내 유혹했을 때에 소녀는 어디선가 냉큼 나타나선 바락바락 성을 내며 날카롭게 양아치들의 속을 뒤집어놓곤 했다. 비수보다 더 곧은 말투로 그들의 앞에 도덕성을 들이미는 소녀의 뒷모습 속에서, 소년은 또다른 새벽을 발견하곤 했다.
 
 
질렸다며 손사래를 치곤 떠나버리는 양아치들보다 당연하다는 듯 처참한 현실 앞에서 굴복하지 않는 소녀의 모습이 더욱 기억에 남았기에 소년은 도무지 소녀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새하얀 목덜미와 그 근처를 하느작거리며 어른거렸던 머리카락을 떠올리면 아라마키는 냉큼 유키코의 말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그녀의 말은 유일무이한 진리이자, 계시였다.
 
 
 
"유, 유키코."
 
"괜찮아, 가끔 구걸에 실패할 날도 오는거지. 매일매일 행운이 넘칠수는 없는 법이야. 가끔 와야 행운이지, 행운의 가치를 알아보게 하려고 가끔오는거야."
 
"하지만.. 하지만..."
 
"나는 괜찮아."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점점 거칠어지는 숨을 내쉬는 유키코에게 아라마키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사실 앞에서 아라마키는 처음으로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었다. 쓸모없는, 그저 몸만 그럭저럭 쓸만한 거지 소년 한명. 구걸하는 재주조차도 없어서 불쌍해보이지도 않는 소년. 그토록 좋아하던 겨울숲의 가지를 꺾어 살이 에일만큼 차가운 가지를 쥐어주는 것과 가끔씩 핀 동백을 꺾어오는 것, 그것 외에는 소년이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무력을 체감할 때마다 아라마키는 절망하곤 했다. 사람은 자신보다 약한 자의 불행과 비극을 잡아먹으면서 희열을 느낀다. 누군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부에 불과한 그 단순한 사실이 그에게는 진리가 될 정도로, 아라마키는 유키코의 비극 앞에서 매번 뼛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주저앉아 비명이라도 내지르고 싶었다.
 
거지들의 운명이 거창하면 얼마나 거창했겠는가? 아라마키는 미간을 좁히고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창백한 겨울섬의 끝자락을 쏘아보았다. 유독 저런 새하얀 겨울섬을 보면, 이따금 숲이라고 삐쭉 튀어나와있는 나무조각들을 몇개 발견하면 차마 그 이름을 내뱉지 않고서는 견딜수가 없어지곤 했다.
 
 
 
"...유키코."
 
 
 
분명 별 것 없는 겨울이라고 생각했다. 똑같이 시리고 괴로웠던 겨울이었지만 언제나처럼 같이 있으면 살아남아 봄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하필이면 그때 두 아이의 순정을 시기한 거지들이 유독 매섭게 굴지 않았다면, 그때 주변을 맴돌며 웃어주었던 자상한 사람들이 시린 겨울에 매정해지지 않았더라면, 유독 열매 한알 남겨주지 않았던 숲이 아니었다면, 하필이면 그날 자신이 늦게 되돌아가지 않았더라면, 꺾어주었던 열매 하나 나있지 않던 나뭇가지가 아니라 못해도 씹어먹을 수 있는 나무껍질이라도 쥐어줬더라면.
 
 
끔찍한 겨울의 어느날, 아라마키는 허무하게 소녀를 잃었다. 겨울을 사랑했던 그 다정다감하고 대범했던 소녀는, 그토록 좋아하던 겨울에 허무한 눈송이가 되어 져버렸다. 빛나는 웃음을 머금고 언젠가는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내뱉으며 사랑한다 절절한 고백을 담백하게 내뱉고는 그리 녹아 스러져버렸다. 초라한 장례식이었다.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겨울숲을 사랑했던 소녀의 마음을 기억하며 홀로 얼어붙은 땅을 손톱이 부서져라 파내고, 아이 하나 뉘일 공간을 모조리 다 파내고 나서야 소년은 뒤늦게 눈물이 치솟았다. 한번 땅에 떨어지자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왈칵 쏟아져내리는 눈물 앞에서 소년은 다짐했다. 내가 꼭 성공해서 따듯한 땅에 다시 한번 너를 뉘이겠다고, 그리 다짐했던 것은 대장 직위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지켰거늘 어째서 자꾸 겨울섬 근처만 맴돌게 되는지, 그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세레나! 저 망할 것이 의학서적을 가져가!? 그게 얼마나 비싼건데! 제대로 보고 돌려줘야한다?!"
 
"꼭 되돌려준다니까요? 서점 아주머니는 항상 매정해!"
 
 
 
꺄르륵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소녀와 비슷해서, 아라마키는 저도 모르게 벙찐 얼굴로 천천히 돌아보았다. 뒤덮은 눈 위로 뛰어오른 발걸음이 옅게 남아있는 유키코의 환상을 부수고 스쳐지나간다. 갈대밭의 색을 똑 닮은 금발을 하나로 모아 질끈 묶어올리고 누구보다 찬란한 바다를 닮은 눈동자를 빛내며 뛰어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라마키는 저도 모르게 다급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다.
 
 
 
"유키코."
 
 
 
잊지말자고 다짐하는 것처럼 굳세게 중얼거려보는 이름이었건만 이미 아라마키의 머릿속에는 아까 들렸던 선명한 세레나, 라는 이름이 잔상처럼 깊게 박혀 남아있었다. 투덜거리면서 양아치들을 훈계하는 모습도, 그들 앞에 도덕성을 들이밀고 엄격한 듯 다정하게 꾸짖는 말투가 그녀와 똑 닮아있어서, 아라마키는 울듯한 표정을 지으며 허겁지겁 본부로 되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정확한 것은 몰랐지만, 이미 재회했다는 것을 짐작해서였을까. 아라마키는 겨울섬 근처를 떠돌아다니는 것을 그만뒀다. 세레나, 다급하게 찾아보기 시작했을 때 유키코의 사망 날짜와 세레나의 출생 일자가 같다는 것을 본 순간 아라마키는 환호를 내질렀다. 정말 약속을 지킨 것 같았기에, 다시 만나자고 했던 약속을 기억했기에. 설령 소녀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알아봤으니까, 자신이 기억하면 될 일이었기에.
 
 
 
"....세레나."
 
 
 
새롭게 바뀐 이름을 중얼거리며 나섰던 순간,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를 아냐고 물어보는 세레나를 발견했을 때 아라마키는 실망을 감출수가 없었다.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듯해서. 그러나 다음 순간 세레나의 옷이 해군의 복장이어서, 아라마키는 방긋 웃으며 보기 드문 웃음소리를 흘렸다.
 
 
 
"라하하하... 아냐아냐... 신병인건가?"
 
"라하하..? 웃음소리가 독특하네. 아하하."
 
 
 
그래. 정말 상관없었다. 자신을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부분에서 웃음을 터뜨린 것도, 제 웃음소리에 덩달아 톡 터진 미소가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다음 봄의 꽃을 닮아서. 이제야 다시 비로소 같이 있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반갑게 다시 온 봄을 맞이했다. 비로소 그의 계절에 꽃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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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MOMO

*해당 글은 커미션 글입니다.


 
그는 좀처럼 후회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의지로 택한 길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는 해군의 길 위에 선 사람이었으니까. 비록 그게 제 형의 필사적인 외면으로 인해 떠넘겨진 자리였다고 하더라도 그는 어쨌건 움켜잡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우직하게 자신의 할일을 다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런 종류의 사람이 몇 없다며 듬직하다 칭찬하는 조교들과 교관들의 목소리에 조금은, 보람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소 한마리에 이끌려 끙끙거리던 이전과 달리 주먹 한방에 곰을 기절시키고 어마어마하게 성장해버린 스스로에게 흐뭇함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탐욕스럽게 남의 생을 짓밟은 해적들의 머리를 으깨어놓았을 때 환희에 가득 찬 목소리로 감사하다 외쳤던 순간이 평생 기억에 남겠구나, 짐작했다. 그 찰나의 순간 때문에 영원히 자신은 바다를 놓을 수 없게 되겠다고 짐작해버렸을지도 몰랐다. 그가 늘상 보았던 녹음 가득한 광활한 초원은 아니었으나 비슷한 푸름을 지닌 바다를 사랑하지 않는 법을, 휴고는 몰랐다. 그저 똑같은 푸르름을 지녔기에 마땅히 이곳 역시 지켜야겠다고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우와, 네가 그 강제로 입대했다는 녀석이구나? 난 아인, 얜 빈즈라고 해."
 
 
 
유연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쑥 내밀었던 것을 잡지 않았다면. 그 경쾌한 미소에 깜빡 속아 미주알고주알 가프의 억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았다면, 무심하게 서있는 자신의 낯선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개성으로 받아들여 끊임없이 제 있을 곳을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피할 틈도 없이 쏟아진 애정과 친애에 못 이기는 척 그들의 친구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다면.
 
제 형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형제란 정말 이런 관계 뿐이냐며 부루퉁하게 내민 입술로 투덜거리지 않았다면, 훈련마다 살뜰하게 건네는 동기의 친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함께 흙바닥에 뒹굴고 엉망이 된 모습을 비웃고 결국 웃음을 터뜨렸던 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멋대로 제 경계를 부수고 들어와 굳건한 마음 속에 스며들지 않았다면. 그 녀석들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폐에 가득 들어차는 비릿한 혈향에 초조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죽음에 이토록 비참하게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다.
 
 
 
"...허억.. 헉.."
 
 
 
무의미한 가정들 속에서 휴고는 이를 악물고 부러진 팔을 끌어올려 주먹을 쥐었다. 손끝이 떨리고 한쪽 어깨가 부러져 아작이 나도, 얼굴 위로 그어진 날카로운 상처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와 시야를 뭉게버려도 그는 쓰러질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럼 얘도 죽이냐고 물어보는 목소리가 아직도 떠들고 있었으니까. 너무 쉽게 죽어 재미없다고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니까.
 
 
금이 간 다리로 다시 한번 힘차게 람각을 날린다. 날카로운 궤적을 손쉽게 언월도로 비틀어버린 사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체 왜 자신이 공격당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며 불안한 듯 늙은 여자의 명령을 기다린다. 어린애와 딱히 다름이 없었다. 간식을 기대하는 개와 같은 표정으로 서있던 악귀가 움직인 것은, 늙은 여자가 싹을 말려버리자며 가냘픈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킬 때였다. 두껍게 립을 바른 입술이 옹졸하게 움직여 사내의 이름을 사랑스럽다는 듯 부른다.
 
 
 
"위블."
 
 
 
에드워드 위블. 휴고는 그 이름을 머릿속에 똑똑히 새겨넣었다. 등뒤에 즐비하게 놓여있는 끔찍한 광경을 만들어낸 장본인. 갑판 한가득 시체를 늘어뜨리고 생기 넘치게 뛰던 심장들 수십개를 베어버린 학살범. 제 동기들의 목숨을 모조리 앗아가버린 악귀의 이름을 그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었다. 살아남는다면, 그의 가족을 모조리 도륙해내서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확고한 증오가 심장에 또렷하게 박힌다. 지독한 무력감과 함께 미약한 희망이 피어오른다.
 
 
제파 선생님이 오면, 아직 살아있는 녀석들은 무사히 마린포드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라. 최근 깨우친 견문색으로 늘어진 시체들 사이 느껴지는 희미한 심장박동과 끊길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숨소리가 아직은 살아있노라 최선을 다해 내지르는 비명과 같았다. 그러니까. 휴고는 어느새 힘이 풀어진 손가락에 다시 한번 힘주어 주먹을 쥐고 천천히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러니까 제파 선생님이 올 때까지만 버틴다면 분명 자신은 죽어도 더 많은 생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휴고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기꺼이 버릴 수 있었다. 숭고한 희생에 대한 가치를 알았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해군은 남겨두면 안되는 법이란다. 해치워버리렴."
 
 
 
마치 그것이 세상의 진리라는 듯 말하는 그들의 태도가 역겨웠다. 그 말에 신의 계시라도 되는 양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의 모든 말이 맞다 광신도마냥 고개를 끄덕인 그가 가여울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영 모자라보이는 사람을 냉큼 붙들고 와서 훈련만 무작정 시켰을 수도 있다. 세상을 모르는 아이를 데리고 와서 세뇌를 시키듯 세상의 진실과 선악을 뒤집어 설명해주었을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압도적인 상황 앞에서 마침내 악의 길을 기꺼이 걷기로 한 몸만 큰 어린 아이일수도 있었다. 수많은 불행 속에서 마침내 탄생해버린 악귀일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위블을 제 정의의 대척점에 세우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아무리 절절한 사연이더라도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듯이, 휴고는 눈앞의 대상이 당장이라도 죽어 나자빠지기를 바랐다. 그의 박복한 인생과 서글프기 짝이 없는 운명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의 평원에, 그의 푸르름에 위블은 끔찍한 오명이자 더러운 흔적이었다. 바다의 파수꾼으로써 그가 살아 숨쉬는 것이 그에게는 치명적인 모욕이었다.
 
 
그렇기에, 휴고는 부러진 다리를 들어올리고 턱이 아리도록 힘주어 휘둘렀다. 그가 해군으로 살아본 세월은 노병들에 비하면 찰나라고 할 수 있는 순간이었으나 해군으로써의 마음가짐과 정의는 확고하게 있었다. 자신의 불행을 이유로 남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당연한 진리 앞에서 휴고는 기꺼이 자신이 정의라고 믿을 수 있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시 깨어났을 때 생존자는 단 둘 뿐이란 절망적인 결과 앞에서도 그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단 둘이더라도 살아남은 게 어디냐며 시체라도 건져서 장례식까지 다 치뤘으면 된거라고 답하고 담담하게 사라진 수십, 수백명의 이름들을 가슴 속에 묻었다. 아직까지는 확고하게 자신의 행동이 후회되지 않았으니까. 그저 자연재해처럼 다가온 것이었고, 그것이 해군으로써 바다를 지키는 자의 최후라 생각하면 제법 그럴싸하고 훌륭한 결말이었기에 휴고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의 후회는, 해군의 선택을 의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위블이 칠무해로 임명되는 것을 선언하다 중얼거리곤 차마 얼굴조차 마주하지 못한 채 허겁지겁 자리를 떠버리는 센고쿠 원수의 등을 사납게 쏘아보던 그때부터 휴고는 정의正依라는 글자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군림 속에 자신의 정의를 찾을 수 없어 허망해지기 시작했다.
 
 
 
끝내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에 분노해 떠나버리는 스승의 뒷모습을 향해, 같이 가자 기대하는 눈빛들을 향해 거절의 대답을 내뱉었던 순간 휴고는 견딜 수 없는 죄악을 짓는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자신의 절망을 이해했다. 유일하게 마지막으로 남은 친구를 해치고 싶지 않다 중얼거리면서도 미묘한 거리감을 내세우는 아인 앞에서, 휴고는 고개를 숙이고 그들과 다른 위치에 서는 것을 택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마침내 서글픈 눈빛을 품는 빈즈의 뒤통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배웅하면서도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는 후회를 배웠다. 돌아가고 싶은 세계를 그리워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저 멀리서 네오해군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유일하고도 무이한 스승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과 똑 닮아 따르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만드는 행보들을 바라보며 휴고는 천천히 체념을 학습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면 아직도 광활한 운동장에서는 힘차게 기합을 내지르고 훈련을 하는 병사들이 있어서, 그들의 풍경 위로 돌아가고 싶었던 순간이 아직도 어른거렸기에 휴고는 고개를 숙이고 오늘도 굳건한 걸음으로 천천히 마린포드를 거니는 것 외에는 할 수 없었다.
 
 
한번도 잊지 않았던 친구들의 목숨을 헤아리며 이제는 흐릿해진 이름들 위로 자신의 이름을 다시 한번 덧씌워 그리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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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MOMO


*해당 글은 커미션 글입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란 무엇을 정의하는가.



한나는 이 질문에 대해서 자신만큼 오랫동안 고민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산파가 원숭이 귀와 꼬리를 달고 태어난 한나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아비가 자신의 힘으로 그것들을 숨겨주어 마침내 학교에 나갔을 때에도, 불을 다루게 해준다며 아비에 의해 화상을 입었던 순간에도 한나는 '정상'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해야했었다.




키가 6M는 넘고, 머리에 두개의 뿔을 달고 태어나거나 손짓 한번으로 사람을 반으로 가르는 괴력을 지니고 태어나도, 온몸이 조각나도 살아나는 사람이 있는 괴이한 것들이 넘치는 세계에서도, 한나는 유독 이질적인 기운을 품고 있는 존재이곤 했다. 그 어느 누구도ㅡ 악마의 열매라는 것 없이 그리되지는 않았으니까. 능력자들의 괴이함에는 전부 이유가 있었다.




악마의 열매라는 자신보다 더 독특한 기운을 풍기는 것을 먹어버리고 난 후에 얻었다는 명분과 개연성을 가졌다는 뜻, 명분도 개연성도 없이 홀로 이질적인 기운 앞에 놓인 한나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그저 사람다움과 '정상'의 범주에 들어가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는 것 외에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오래된 고민이 결말에 도달한 순간, 아이러니하게 한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은 명백한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쓸모있는 사람이 되면 된다.]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가 있거나 쓸모가 있는 사람은 그 기운이 생전 본적 없는 낯선 것이던 이질적이던 상관하지 않고 제 울타리 내부로 들이곤 했다. 하물며 이제는 그 괴이한 원숭이 귀와 꼬리도 감출 수 있었던 것을, 한나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깨달은 순간부터 멈추지 않고 불같이 책들을 뒤적거리며 의서들을 독파해나갔다.


셀 수 없는 지식이 쌓이고 귀중하기 짝이 없는 몇십번의 경험을 쌓고 나서 비로소 멈추어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어느새 한나는 어엿한 의사가 되어 플레반스의 유명한 명의라는 칭호를 얻고 난 후였다.



이제 더 이상 이 새하얗고 순박한 사람들의 쉼터에서 그 누구도 아프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던 순간은, 플레반스에 새로운 의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환하게 웃으며 의사자격증을 들고 자신을 향해 뛰어왔던 어린 청년의 모습을 한나는 머릿속에 똑똑히 박아놓았다.


이제는 자신이 유일한 수단이 아닐 수 있다는 경계와 쓸모를 잃어버리면 어쩌나 싶어 불안해졌던 마음이 달래진 것은 해안가에서 옅은 숨을 내뱉으며 죽어가던 어느 어린 해병을 구한 순간이었다.



어쩌면 우연이었을 수도 있고, 으레 바다를 품고 살아가는 해적들이나 해군들이 맹신하곤 하는 운명이라는 것일수도 있었으나 그의 군복에 낭자하게 묻어 스며들었던 붉은 피와 비릿한 혈향을 맡은 순간 당연하다는 듯 한나는 해군으로 길을 틀었다. 시야가 아득하도록 푸르른 색에 진하게 묻어있는 붉은색이 지독하게 싫었을수도 있었다.



선함을 추구하고 정의를 부르짖는 그들의 생이 무의미하게 끊어져나가고 사소한 상처에 헐떡여 스러지기를 바라지 않아서 그리했을수도 있었다.



수십개의 떠오르는 이유들 중에서, 한나가 무엇을 골랐는지 그녀 스스로도 아직 정확하게는 몰랐다. 다만 한 사람의 쓸모는 고작 그걸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만을 알았을 뿐. 자신이 살고 품어왔으며 꾸리고 있었던 세계를 스스로 부수고 나온 그녀를 위하여주듯 바다가 보여주는 풍경은 좁은 플레반스와 다르게 드넓고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수평선이었다.



그 너머에 자신의 쓸모를 찾아내면 마침내 자신 또한 '정상'의 범주에 들수도 있을 것 같아서 한나는 초조함을 감추고 노랗게 반짝거리는 제 눈동자를 굴려 동공 가득 차오르는 푸름을 담아냈다.




"군의관... 신청이십니까? 당연히 군의관은 늘 수가 부족하니 환영합니다만... 기본적으로, 체력 훈련은 같이 받으셔야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쩌면 오만함이었을지도 몰랐다. 전생을 기억하고 있고 플레반스의 유일한 의사로써 노력해왔던 자신의 시간을 믿은 오만함. 자신의 노력이 어디에서든 통할 것이라는 견고한 믿음은 허망하게 상식 외의 존재들을 만나며 부서졌다.



말도 안되는 크기의 호랑이를 딱콩 한 번으로 제압해버리는 눈가에 흉터가 있는 사내나, 꾹 다문 입술로 정교하고 빈틈없는 작전들을 생각해내는 여자나, 손가락을 까닥거리는 것만으로 어마어마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묵직한 분위기를 흘리는 사내나 전부 한나의 예상 범위 안에 들어있던 존재들은 아니었기에, 한나는 자신이 알고 있던 '정상'의 범주를 키워나가야만 했다.




"헤엑.. 헥... 괴물드을...!!"




부루퉁하게 내민 입술로 투덜거리는 음성은 끊임이 없었으나 어쩌겠나, 자신이 세상을 부수고 뛰어나왔던 것을. 한나는 자신의 행동에 후회를 한적은 없었다. 플레반스의 '정상'으로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세계의 정상이 궁금했다. 그 정점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마침내 정상의 영역에 기어이 고개를 들이밀어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한 노력이라 생각하면 그녀의 노력은 덧없이 끈질긴 것이라고 따질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몰래 뛰는 것은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땀을 흘려가며 혀를 쭉 내밀고 헉헉거리는 것 또한 그다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은 체력이 좀 부족한 대신 그들보다 더 많이 알고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보다 더 귀하고 값진 경험을 쌓았다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그녀에게 그까짓 일은 결단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죽인 생보다 살린 생이 더 많은 그녀가 그들을 질투한다는 것은 있을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진정으로 부끄러웠던 것은.




"어, 야, 너 꼬리 나왔어."




섬세함이라고는 태어나면서부터 결여되어 태어난 제 동기 녀석의 말 하나뿐이었다. 정확하게 따지자면ㅡ, 그 말에 놀라 나자빠진 자신의 반응이 그녀에게는 치욕스러운 경험이었다. 하필이면 왜 계단에서 늘어져있었을까, 하필이면 그 근처를 지난 것이 왜 그들이어야 했을까, 수많은 의문보다 먼저 치솟은 것은 그들에게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들켰다는 수치심과 뒤늦게 몰려오는 고통에 보상처럼 뒤따라온 분노였다.



헤벌쭉 웃으며 자신이 말해줘서 망정이었지 들킬 뻔하지 않았냐며 나불거리는 입을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꽂아넣었던 순간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손쉽게 막아버렸던 가프의 손바닥 또한, 그녀에게는 꽤 부끄러운 기억 중 하나가 되었다.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냅다 쓰러진 채 아픈 꼬리뼈를 어루만지고 있을 적 가프가 얼떨떨해하는 표정으로 악마의 열매를 먹었냐 재촉하듯 물어온 질문 또한 그녀에겐 대답할 가치가 되지 않았다. 있는 힘껏 가프의 요란한 목소리를 무시하고 있을 적 그녀를 무관심에서 깨운 것은 현명하고도 나긋한, 츠루의 질문이었다.




"악마의 열매 복용 사실을 숨긴 거라면... 좋지 않을거야. 왜 숨겼느냐고 따지고, 그 위험성에 대해서 반동분자인지 사상검증을 하라고 할수도 있겠지.

자칫하면 불복종이란 무시할 수 없는 목줄을 조이면서. ...한나, 우리가 숨겨주기를 바라니?"



한마디 섞어본 적 없는 츠루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았는지는 둘째치고, 그녀가 내뱉는 문장들은 전부 합리적인 의심과 경계에 가까웠기에 한나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원숭이원숭이 열매냐며 해맑게 자신의 성과 이름부터 밝히는 머저리는 당연히 깔끔하게 안중에도 없었지만. 그저 귀가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한나!! 왜 내 말은 무시하냐니까?! 혹시, 안 들리는거냐? 청력문제!? 아니면...!!"

"그만큼 무시했으면 말 걸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어. 가프."




드디어 못 참겠다는 듯 퉁명스럽게 정답을 얘기한 센고쿠의 날카로운 눈매 속에서, 그는 홀로 나직하게 열매의 힘이 아닌 것 같다고 중얼거릴 뿐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닿지 못한 아주 미약한 중얼거림이었을 뿐이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스스로에게 분해 의무실까지 절뚝거리면서 간 것은, 어쩌면 츠루의 나직한 다들 입 닥치고 한나에 대한 건 얘기하지 말라고 말하는 은은한 협박을 믿어서였을지도 몰랐다.



세계의 정상을 보고 싶다. 그 단순한 문장 앞에서 한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당당하게 자신의 인생의 이정표라 답할 수 있었다. 자신이 언젠가는 그 정상의 영역에 발을 들이밀고, 당당하게 그 영역을 차지해 낼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를 않으며.



이는 자신이 어느 단체에 속해있건, 어느 사상을 지지하건 불변할 단 하나의 진리이자ㅡ, 그녀의 정상頂上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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