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MOMO

*해당 글은 커미션 글입니다.
그는 도무지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 같아보였다.
근처에 맴도는 여자들에게도 다정한 웃음 한번 보여준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가끔씩 보이는 매력적인 입꼬리는 오로지 그가 임무에 성공했을때나 해적들을 도륙내고서야 비로소 올라갈 기미를 보이곤 했었다. 만약 저 사람이 사랑을 한다면 그 끝은 비극적일 것이라고 일부는 수근거리곤 했다. 저주처럼 내뱉은 문장에도 코웃음 한번 치고 시원스럽게 뒤통수를 보이는 그에게도 시리도록 잊을 수 없는 겨울이 있었다.
새하얀 백옥같은 피부에 어느 겨울밤의 눈내리던 어둑한 흑단같은 머리카락을 가졌던 어느 소녀를 그는 사랑했다. 새카만 눈동자를 도륵 굴려 자신을 향해 방긋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밤을 지새웠던 그런 철없고 어리던 날이 있었다. 유키코,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이름을 곱씹으면 새삼 눈아프도록 빛나던 백설이 떠올랐고 온기 가득한 숨을 내뱉으며 우리의 낙원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숲을 뛰놀았던 순간이 자연스럽게 뒤따라 떠올랐다.
"아라마키!"
곱디 고운 목소리로 소년의 이름을 부르면, 소년은 세상에서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누구보다 빠르게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달음박질을 치곤했다. 누구보다 고상한 척 드높고 꼿꼿하게 자란 나무들 사이로 급하게 뛰어들어가면 언제나 그리듯 겨울숲 한가운데에서 경쾌한 웃음소리를 퍼뜨리며 자신을 기다리던, 겨울을 닮은 거지소녀 한명. 가진 것 하나 없었고 쥘 수 있었던 것은 고작해야 겨울숲의 앙상하게 마른 가지 하나뿐이었지만, 상쾌한 공기와 코끝이 아리도록 시린 바람을 마음에 들어하던 유키코였기에 그는 숲이 제것인 것처럼 기꺼웠다.
"나는 겨울숲이 좋아, 특히 겨울에 오는 숲은 완전 공기도 깨끗하고, 벌레도 없잖아. 온 세상이 하얀색으로 덮히면... 그곳에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
나직하게 고백해오는 유키코의 말에 수줍게 자신 또한 좋다고 두루뭉술하게 말한 소년의 말을 이해한 듯 아이는 허술한 웃음을 지으며 볼을 붉히곤 했다. 형편없는 고백과 별볼일없는 분위기 속에서도 소녀는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풋풋하기 짝이 없는 사랑이었지만 엄연히 그것은 사랑이었다. 애정이었고, 친애하는 마음은 전부 오롯이 그녀를 위한 것이었기에 소년은 아직 아물어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를 눈여겨보곤 했다. 봄이 되어 그것이 활짝 피어오르는 날 그것을 꺾어 소녀에게 쥐어주리라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들꽃만이 그가 사랑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어주곤 했다.
다만 그들은 무언가를 사랑하기에는 그것이 사치인 사람들이었다. 살아가는 것에도 벅차 헐떡거리던 그런 아이들이었다. 이 세계는 유독 아이에게는 냉정하고 약자에게만큼은 비정한 세계였기에 그 어떤 보호자도 존재하지 못했던 아이들에게는 지독한 세상이었다. 지나치게 시리고 가끔 피는 들꽃 외에는 쓸모도 볼 것도 없는 숲만이 그들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듯, 아이들의 세계는 좁고 시리던 겨울숲 하나뿐이었다.
어떤 사랑은 꿈꾸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는 것을 소년은 그때 처음 절절하게 깨달았다. 깡패들이 소년의 다부진 체격을 탐내 유혹했을 때에 소녀는 어디선가 냉큼 나타나선 바락바락 성을 내며 날카롭게 양아치들의 속을 뒤집어놓곤 했다. 비수보다 더 곧은 말투로 그들의 앞에 도덕성을 들이미는 소녀의 뒷모습 속에서, 소년은 또다른 새벽을 발견하곤 했다.
질렸다며 손사래를 치곤 떠나버리는 양아치들보다 당연하다는 듯 처참한 현실 앞에서 굴복하지 않는 소녀의 모습이 더욱 기억에 남았기에 소년은 도무지 소녀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새하얀 목덜미와 그 근처를 하느작거리며 어른거렸던 머리카락을 떠올리면 아라마키는 냉큼 유키코의 말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그녀의 말은 유일무이한 진리이자, 계시였다.
"유, 유키코."
"괜찮아, 가끔 구걸에 실패할 날도 오는거지. 매일매일 행운이 넘칠수는 없는 법이야. 가끔 와야 행운이지, 행운의 가치를 알아보게 하려고 가끔오는거야."
"하지만.. 하지만..."
"나는 괜찮아."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점점 거칠어지는 숨을 내쉬는 유키코에게 아라마키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사실 앞에서 아라마키는 처음으로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었다. 쓸모없는, 그저 몸만 그럭저럭 쓸만한 거지 소년 한명. 구걸하는 재주조차도 없어서 불쌍해보이지도 않는 소년. 그토록 좋아하던 겨울숲의 가지를 꺾어 살이 에일만큼 차가운 가지를 쥐어주는 것과 가끔씩 핀 동백을 꺾어오는 것, 그것 외에는 소년이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무력을 체감할 때마다 아라마키는 절망하곤 했다. 사람은 자신보다 약한 자의 불행과 비극을 잡아먹으면서 희열을 느낀다. 누군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부에 불과한 그 단순한 사실이 그에게는 진리가 될 정도로, 아라마키는 유키코의 비극 앞에서 매번 뼛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주저앉아 비명이라도 내지르고 싶었다.
거지들의 운명이 거창하면 얼마나 거창했겠는가? 아라마키는 미간을 좁히고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창백한 겨울섬의 끝자락을 쏘아보았다. 유독 저런 새하얀 겨울섬을 보면, 이따금 숲이라고 삐쭉 튀어나와있는 나무조각들을 몇개 발견하면 차마 그 이름을 내뱉지 않고서는 견딜수가 없어지곤 했다.
"...유키코."
분명 별 것 없는 겨울이라고 생각했다. 똑같이 시리고 괴로웠던 겨울이었지만 언제나처럼 같이 있으면 살아남아 봄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하필이면 그때 두 아이의 순정을 시기한 거지들이 유독 매섭게 굴지 않았다면, 그때 주변을 맴돌며 웃어주었던 자상한 사람들이 시린 겨울에 매정해지지 않았더라면, 유독 열매 한알 남겨주지 않았던 숲이 아니었다면, 하필이면 그날 자신이 늦게 되돌아가지 않았더라면, 꺾어주었던 열매 하나 나있지 않던 나뭇가지가 아니라 못해도 씹어먹을 수 있는 나무껍질이라도 쥐어줬더라면.
끔찍한 겨울의 어느날, 아라마키는 허무하게 소녀를 잃었다. 겨울을 사랑했던 그 다정다감하고 대범했던 소녀는, 그토록 좋아하던 겨울에 허무한 눈송이가 되어 져버렸다. 빛나는 웃음을 머금고 언젠가는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내뱉으며 사랑한다 절절한 고백을 담백하게 내뱉고는 그리 녹아 스러져버렸다. 초라한 장례식이었다.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겨울숲을 사랑했던 소녀의 마음을 기억하며 홀로 얼어붙은 땅을 손톱이 부서져라 파내고, 아이 하나 뉘일 공간을 모조리 다 파내고 나서야 소년은 뒤늦게 눈물이 치솟았다. 한번 땅에 떨어지자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왈칵 쏟아져내리는 눈물 앞에서 소년은 다짐했다. 내가 꼭 성공해서 따듯한 땅에 다시 한번 너를 뉘이겠다고, 그리 다짐했던 것은 대장 직위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지켰거늘 어째서 자꾸 겨울섬 근처만 맴돌게 되는지, 그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세레나! 저 망할 것이 의학서적을 가져가!? 그게 얼마나 비싼건데! 제대로 보고 돌려줘야한다?!"
"꼭 되돌려준다니까요? 서점 아주머니는 항상 매정해!"
꺄르륵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소녀와 비슷해서, 아라마키는 저도 모르게 벙찐 얼굴로 천천히 돌아보았다. 뒤덮은 눈 위로 뛰어오른 발걸음이 옅게 남아있는 유키코의 환상을 부수고 스쳐지나간다. 갈대밭의 색을 똑 닮은 금발을 하나로 모아 질끈 묶어올리고 누구보다 찬란한 바다를 닮은 눈동자를 빛내며 뛰어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라마키는 저도 모르게 다급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다.
"유키코."
잊지말자고 다짐하는 것처럼 굳세게 중얼거려보는 이름이었건만 이미 아라마키의 머릿속에는 아까 들렸던 선명한 세레나, 라는 이름이 잔상처럼 깊게 박혀 남아있었다. 투덜거리면서 양아치들을 훈계하는 모습도, 그들 앞에 도덕성을 들이밀고 엄격한 듯 다정하게 꾸짖는 말투가 그녀와 똑 닮아있어서, 아라마키는 울듯한 표정을 지으며 허겁지겁 본부로 되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정확한 것은 몰랐지만, 이미 재회했다는 것을 짐작해서였을까. 아라마키는 겨울섬 근처를 떠돌아다니는 것을 그만뒀다. 세레나, 다급하게 찾아보기 시작했을 때 유키코의 사망 날짜와 세레나의 출생 일자가 같다는 것을 본 순간 아라마키는 환호를 내질렀다. 정말 약속을 지킨 것 같았기에, 다시 만나자고 했던 약속을 기억했기에. 설령 소녀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알아봤으니까, 자신이 기억하면 될 일이었기에.
"....세레나."
새롭게 바뀐 이름을 중얼거리며 나섰던 순간,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를 아냐고 물어보는 세레나를 발견했을 때 아라마키는 실망을 감출수가 없었다.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듯해서. 그러나 다음 순간 세레나의 옷이 해군의 복장이어서, 아라마키는 방긋 웃으며 보기 드문 웃음소리를 흘렸다.
"라하하하... 아냐아냐... 신병인건가?"
"라하하..? 웃음소리가 독특하네. 아하하."
그래. 정말 상관없었다. 자신을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부분에서 웃음을 터뜨린 것도, 제 웃음소리에 덩달아 톡 터진 미소가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다음 봄의 꽃을 닮아서. 이제야 다시 비로소 같이 있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반갑게 다시 온 봄을 맞이했다. 비로소 그의 계절에 꽃이 피어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