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MOMO

 *해당 글은 커미션 글입니다.


살아온 인생이 결단코 평안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생이었다.
 
 
소녀는 눈동자를 굴려 거울 속 얼핏 비추어지는 제 모습에 얼굴을 와락 찡그리곤 들고있던 칼을 내던져 제 어미와 아비를 쏙 닮은 면을 산산히 부숴뜨리곤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심드렁히 닦아냈다. 착실하게 함께 먹었던 음식이 내장을 녹이고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이쯤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소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정직하게 제 방으로 향하는 길 위에 올랐을 뿐이었다.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아련하게 퍼졌던 비명소리가 떠오른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인들의 얼굴을 난도질하여 죽이고 심장에 나이프를 쑤셔넣어 피어오르듯 뿜어져나왔던 핏방울이 얼마나 경쾌했던가. 뜨겁게 치밀어오른 붉은색에 차분하게 내딛는 걸음은 얼핏 과거로 조금씩 되돌아가는 듯했다.
 
 
괴성을 내지르고 자신이 괴물을 낳아 길렀다며 손톱을 세워 달려들었던 친모가 악에 바쳐 쫓아와 내질렀던 비명이 줄곧 물속에 갇힌 듯 먹먹했던 고막을 뚫어주는 양 상쾌했었지. 한번에 죽지 말아달라 중얼거렸던 제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한 듯 헐떡거리며 몰아쉬었던 숨이 끊기고 끈질길 줄 알았던 심장박동이 마지막으로 뛰었던 순간 아쉬움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또 한걸음.
 
 
저를 괴롭히고 모른 척 장난감을 내던지고 조롱했던 목소리들이 신음소리와 울컥 피를 내뱉는 소리로 바뀌었을 때에는 어찌나 기쁘게 웃었던가. 괴물이 태어났 어쨌다 소란스럽게 내뱉고 날세워 손가락을 펼쳐 가리켰던 그것들이 스스로 목을 조르며 괴로워하던 것을 보고 북이라도 치며 놀고싶은 심정이었다. 이복형제, 소녀의 또 다른 자매들이 무료하게 내뱉었던 말들이 비수가 되어 되돌아갔을 때에도 미나는 함부로 웃지 않았다.
 
마지막 걸음. 방문 앞에선 소녀의 기억 또한 최초의 행복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마침내 과거의 끝에 도달한 것과 같았다.
 
 
'도미? 물고기란 뜻이구나.. 아냐, 너는 미나다. 그런 투박한 단어는 고아한 너와 어울리지 않아. 너는 미나란다.'
 
 
 
다정스럽게 제 뺨을 쓰다듬어주고 사랑을 속삭였던 말들이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만큼 기꺼워 소녀는 기꺼이 미나가 되기로 했었다. 적어도 그녀가 저를 두고 몰래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성질을 꾹 참고 미나로 살아줄 수 있었을 것이었다. 어쩌면 바란다면 평생을 그리 참아줄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니 마지막 기회는 그녀 스스로가 날린 것과 다름이 없으리라. 미나는 떨리는 손끝을 들어올려 제 방문의 손잡이 위로 손을 올려 힘을 주었다.
 
 
 
'설마, 그 녀석이 널 사랑했을 거라고 믿은 건 아니겠지? 아하하, 불쌍한 도미, 안타까운 도미! 물고기가 어항을 떠나서 살 수 있겠느냐? 물 없이 숨쉬고 살아갈 수 있겠느냐? 네 물은, 네 집은 여기다. 헷갈리지말거라.
 
그딴 수족조차도 널 데리고 가지 않았다는 것은, 네가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금붕어와 다름이 없다는 뜻이겠지.'
 
 
 
간악하게 속삭였던 말을 조금이라도 더 주의깊게 들었다면 아마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을 것을. 떨렸던 거짓말의 잔재를 읽어냈다면 쉬이 미움을 마음에 들이지 않았을 것을. 친모처럼 이것저것 얼룩덜룩 색이 덧칠되어 끔찍한 흑발이었던 것과 달리 새하얀 머리칼을 흩날리며 곱게 웃어주었던 어미가 자신을 버리고 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을텐데도. 미나는 도미가 되어 추락했던 순간을 잊지 못했다.
 
 
사악한 세치 혀에 휘둘려 제 유일한 안식을 놓쳐버리고 원망한 스스로가 끔찍했다. 문을 여는 순간 보이는 익숙하고도 똑같은 풍경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날 듯하여, 다급하게 입술을 짓씹고 천천히 걸음을 옮긴 미나는 방 침대에 누워 끔찍한 스스로의 안식을 바라며 눈을 감았다.
 
 
 
입가에서 흘러나와 내장을 녹이는 피가 기도에 고여 죽도록, 자신이 놓아버린 사키의 선함을 쫓으며 홀로 고독하게 죽기를 기다렸다. 물론 죽는 일 따위는 없었지만.
 
 
기도가 막혀 고통스러울 때 발작처럼 내뱉은 숨이 거칠어 살아났고, 심장이 마침내 멈추었을 때 기뻐 환희했던 마음은 다시 힘차게 뛰는 소리에 다시 나락으로 떨어져내리는 듯했다. 그렇게 절망과 희망 속에서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던 미나에게 닿은 낯선 기척.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여리고 매정해진 소녀가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둘러싼 채 두런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검은색 정장의 사내들이었다. 어떤 이는 다급하게 설득이라도 하는 것처럼, 어떤 이는 진중한 표정으로 연심 저를 향해 아직은 다정한 눈동자를 흘끔거리며.
 
 
 
"역시 초재생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이건 흡사 불사조와 같은 능력이라구요, 이대로 놓치기에는 큰 손해입니다. 어차피 여기서 갈 곳도 없어보이는데 뭐 대수가 있겠습니까?"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아이가 싫다고 하면 강제로 데려갈수도 없는 노릇이야."
 
"언제부터 저희가 그런 걸 따졌다고. 애초에 이쪽은 웨스트블루이지 않습니까? 유독.. 이 바다에서는 매정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니, 상관없다 여길 겁니다."
 
 
 
투덜거리는 음성에 미나는 새빨간 눈동자를 도륵 굴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데려간다 말아야한다 하는 이야기에서 홀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미나가 마침내 입을 열어서 그곳에 가겠다고 답한 것은 무슨 이유였는지, 아직 소녀 자신도 정확하게는 몰랐다. 다만 하필이면 자신을 데리러 왔다는 그 사내의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어른거려서, 자신의 의사가 무엇보다 중하니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단호하게 일갈하는 모습에서 사키를 엿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소녀는 온갖 꽃이 만발해 향기롭다 다채롭다 칭송받는 꽃의 나라에서 홀로 백일홍과 피에 물들여 시들어가던 백국화만을 담보처럼 쥔 채로 사나운 얼굴의 사내들의 뒤를 쫓기로 결정했다. 검은색 양복을 입은 CP들을 쫓아 사법의 탑을, 제 새로운 보금자리로 삼곤 똬리를 틀기로 성큼 결정해버렸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미나는 제 몸의 비밀을 파헤쳐보겠다 당당하게 말하는 연구원의 뺨을 치고 조심스럽게 연구를 요청하는 연구소장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사법의 탑에서 흐르는 시간을 쌓았다. 그곳에서 보았던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 눈을 깜빡거리고 지지 않는 해와 영영 타오르듯 환한 백야에 자신을 괴롭히던 끔찍한 밤은 오지않으리라 안온함을 누리며 살뜰한 성장을 해나가기로 했다.
 
 
 
온종일 붕대를 감고 고양이처럼 소리없이 다니는 그녀가 무서워서였을까, 세계최고의 사법기관이자 비밀스러운 요원들이라는 이름이 아깝게 CP들은 겁을 집어먹곤 그녀를 미라, 하나코상 등 온갖 별명을 가져다붙이곤 제멋대로 두려워하곤 했다. 그 꼴사나운 모습들을 보며 가끔씩 코웃음 한번 치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소일거리이자 소소한 재미였다. 그래서 그렇게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으로 통하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순간 잠겨있던 문을 박차고 들어온 어린 사각 코의 소년에게 동그랗게 눈을 뜬 것은 아마 너무 놀라서였을 것이다.
 
 
 
"엇..? 자네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군감? 저 문이 열려있는 것도 처음보고! 오늘 처음 보는 것 투성이로군."
 
 
 
경쾌한 목소리. 미나는 입술을 비죽이며 제 눈앞에 환히 웃는 낯으로 아무렇지 않게 자네가 탑의 괴물이냐는 물음을 내뱉는 어린 사각 코를 쏘아보았다. 제 평온을 부수러 온 것인지 경계부터 내세우는 그녀에게 카쿠는 다시 한번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줄 뿐이었다. 무작정, 자신이 먼저 대답을 꺼내기 전까지는 입도 벙긋하지 않는 상냥함에 다시 한번 져준 것은, 어쩌면 사키와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온 세상의 다정함은 모두 분명 사키와 닮아있었기에.
 
 
 
"내 자네가 기밀대상이 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네. 잘하였는감?"
 
 
 
그래서 평온을 방해한 어린 사각 코를, 미나는 퉁명스럽게 용서하기로 했다. 그래, 비록 그녀가 다른 아이들과 뒤섞여 성질을 건드리는 아이들을 모조리 식판으로 머리를 깨버렸어도 그녀는 카쿠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다만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저를 흘끔거리는 루치가 더더욱 신경이  쓰였을 뿐. 최연소라는 타이틀을 냉큼 빼앗아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당연하다는 듯 구는 그에게서 미나는 처음으로 호승심과 질투를 느꼈다. 다채로운 감정을 맛보았다.
 
 
남들이 자신을 볼 때 시선이 이러했을까, 싶은 의문이 들만큼 추하게 피어오른 질투에 모른 척 신나게 놀려대는 재브라와 카쿠의 손가락을 뒤로 꺾어버리고 나서도, 시원스럽게 풀리지 않는 속에 미나는 부루퉁한 얼굴로 지건이나 몇번 날릴 뿐이었다.
 
그래, 정말 별것 아닌 질투였을 뿐이다. 후에 자신이 택한 선택에 비해서는 지금의 미나를 바라보자면 실로 별것 아닌 질투였다. 모두를 속시원히 떠나보내고 홀로 고독하게 사라져버린 그녀를 쫓으러 따라왔던 수십명의 CP를 떠올리자면 그러한 소소한, 질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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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MOMO
 

*해당 글은 커미션 글입니다.


전쟁과 비극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자의 순수는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단언컨데 쿠잔은 이 말에 누구보다 당당하게 답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가치를 매길 수 없이 귀하고 소중하다. 함부로 하늘의 별에 돈을 걸고 사왔다고 하지 않듯이, 쿠잔은 단호하게 순수라는 가치를 귀히 여기곤 했다. 별 볼일 없을 것이라고 단정지어놓고 도착한 그곳에서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분명 아니었던 것 같은데.
 
 
 
"뭐, 상관없나.."
 
 
 
쿠잔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냉기를 품은 숨을 흐르는 바람에 따라 내뱉었다. 그날의 추억들이 흩날리는 것 같아 아쉽게 바라보던 시선은 선글라스 너머로 얼핏 숨겨지고 몇번 눈을 깜빡이던 그는 가볍게 고개를 치켜들어 밤하늘에 누구보다 생생히 살아숨쉬고 있노라고 은은한 위로를 건네는 별들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에도 지긋지긋한 임무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도착한 회의장에서 반짝이는 눈빛을 숨기지 못하고 들떠있던 그 여자의 얼굴을 보았을 때, 사실 이미 짐작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그녀와는 어떤 식으로든 엮이리라는 진한 예감을.
 
 
도리어 모른 척 고개를 돌려버리고 슬그머니 외면했던 모든 행동들도, 아닌 척 친근하게 다가가 말을 이리저리 걸었던 것도 어쭙잖은 그의 노력이었다. 그저 농땡이를 피우기 위해 은근슬쩍 돌아다녔던 습지에서 그녀를 마주쳤을 때, 누구보다 환한 눈빛으로 자원들을 움켜잡고 살뜰하게 그 땅에 살아가는 그 모든 것에 애정을 퍼붓는 것을 보았을 때, 미묘하게 올라왔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쿠잔은 아직 이름짓지 못했었다.
 
 
다정하게 웃어넘기고 소소하기 짝이 없는 농담에서 웃음을 터뜨렸던 그 곱고 깨끗한 미소를 잊을 수 있을리가. 그건 그가 살아오면서 즐비하게 보아왔던 추악한 얼굴과는 무척이나 달라 이질적이기까지했다. 그저 지긋하게 보아왔던 수많은 섬의 기후와 생태계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며 감탄을 내뱉는 여자의 눈동자에 박혀있던 진리는 잊을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 순수하기 짝이 없는 적안이 도르륵 굴러왔을 때마다 난처한 감정에 입술을 몇번이나 우물거렸던 것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아직 뭘 몰라서 그런 눈동자를 가졌을 것이라고 멋대로 추측하고 선을 그어두었던 것도 자기방어의 일종이었다. 자신의 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가 묻어있는지를 몰라서, 해군이 숨기고 있는 어둠을 몰라서. 자신의 등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절규와 비명이 추잡하게 뒤섞여 발목을 움켜잡고 있는지를 몰라서. 살릴 수 있음에도 입장과 명분이라는 것을 이유로 비열하게 고개를 돌린 자신을 몰라서. 수십개의 이유를 가져다대고 슬쩍 말을 걸어보았을 때마다, 그녀는 빛이 바래지 않은 눈동자로 똑바로 마주해오곤 했었다. 문득 튀어나간 질문은 자신의 그늘 중 하나를 드러내도 똑같은 눈동자로 보아줄까 의심하여 튀어나온 질문이기도 했다.
 
 
 
'어음.. 있잖아, 언니.. 살릴 수 있는데, 안 살린 건.. 나쁜걸까?'
 
 
 
그녀는 결단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질문에 담긴 의도를 정확하게 읽어낼 것이라고 기대하고 초조해하며 내려다본 그녀의 반응은 무척이나 뜻밖이었다. 끔찍하게 여길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보여지는 눈동자는 선명하고도 따스한 불꽃을 닮은 눈동자라, 쿠잔은 저도 모르게 그 안에서 자신의 위안을 찾아냈다. 얼핏 벌어진 입술 밖으로 차분하게 풀어나오는 말들은, 단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는 다정한 말이었다.


 
'살릴 수 있다는 이유로, 전부 다 살려야하는 건 아니에요. 잡초도 모조리 뽑아두면 도리어 안 좋은 게 있는 것처럼요. 전, 쿠잔 씨가 그런 판단은 명확하게 내릴 수 있다고 확신해요. 제가 지금껏 보아온 당신은 분명 그럴 겁니다.'
 
 
 
속살거리는 봄처럼 불어온 바람은 지금껏 홀로 견뎌왔던 겨울을 몰아내듯 따듯했다. 두서없이 무작정 곧게 뻗어오는 신뢰가 부담스럽도록 사랑스러웠다. 순식간에 달아오르려던 얼굴을 냉큼 가리고 그렇냐고 조그맣게 중얼거렸을 때 쿠잔의 머리를 가득 메운 생각은 포커페이스 훈련을 해서 참 다행이란 생각 뿐이었다. 노스블루에서 사우스블루로 넘어가고자 모였던 자리에서, 쿠잔은 새삼 또다른 연구원들의 존재를 인지하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비틀어 어느새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제 곁에 서있는 자근별을 내려다보았다. 제 곁에 바짝 붙은 자근별의 기척에 저도 모르게 벌어지려는 거리를 가깝도록 힘주어 버티면서도 생각은 복잡하게 흔들렸다.
 
 
뭘 믿고 이래. 도대체 자신의 어떤 부분을 믿어서 이리 가까이 붙는건지 도무지, 쿠잔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저기 다른 연구원들처럼 이질적인 기운에 놀라 경계를 하지도 않고선. 그런 무력한 부분마저도 자신이 먼저 조바심을 내는 이유를 아직은 몰랐다.
 
 
 
'이 해역 근처는 광맥이 있어서 보석이 많이 나온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해적들도 탐을 낸다던데... 저, 지켜주실거죠, 쿠잔 씨?'



방긋 웃으며 올려다본 얼굴에 다시 한번 달아오른 뺨을 느낀 그는 뒤늦게 그날의 감정에 무어라 이름을 붙이는지 깨달아 성급하게 얼굴을 가렸다. 다행히 작은 키의 그녀는 그저 해맑게 웃는 낯으로 올려다볼 뿐이었지만. 세계를 사랑하는 것은 이미 글렀다고 생각했다. 따듯한 가정에서 태어나 다정한 부모의 아래에서 올곧게 자라온 그녀와 달리 자신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그에겐 다정한 부모 따위는 없었다. 온갖 색채로 뒤덮여있었던 찬란한 세계는 쿠잔에게만 삭막한 폐허에 가까웠고 내딛는 걸음마다 생명이 넘쳤던 그녀와 다르게 걷는 걸음은 죄다 피묻은 발자국과 누군가의 절규로만 뒤덮여있었다.
 
 
그러니,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해야했던 이유였다. 살아갈 날이 창창했다. 환한 미소가 자신에게 물들여 어두워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너는 반드시 절망하며 죽을 것이라는 저주를 수도없이 들어왔으니까. 후회할 것이라고 악에 바쳐 내질렀던 토혈 섞인 유언이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는 것 같았으니까. 핏발선 눈동자로 쉰 목소리로 내뱉었던 가혹한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으니까. 그 소리를 듣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도망치듯 돌아간 본부에서 미친듯이 일에 몰두했을 때, 서류에 파묻혔던 순간에도 떠오르는 목소리들이 가혹하게 그를 채찍질했다. 가끔씩 들어올린 고개 너머로 얼핏 꽃 하나에 세상의 보물을 찾은 것처럼 환호를 질렀던 모습이 얼핏 보이는 것도, 그는 '미련'이라고 이름붙이곤 고개를 돌렸다.
 
 

'아오키지... 요새.. 할일이 없니..? 아니면 뭐 잊고싶은 거라도 있는건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만.. 쉬엄쉬엄 하려무나... 그, 아이들이 겁을 먹잖니.'
 
 
 
츠루 씨에게마저 경고를 들었을 때, 그는 더이상 자신의 감정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결정을 내리곤 고개를 비틀어 <사우스블루의 생태계 보고_최종>을 바라보았다. 기어이 사우스블루마저도 그 여자의 손아귀에 놓인 모양이었다.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 여자가 자신이 받은 사랑을 배로 불려서는 마침내 사우스블루마저도 사랑하고 있나보다. 나는 돌아봐주지 않고. 그동안 찾아올 수 있었을텐데 야속하게 단 한번도 찾아오지 않은 그녀를 떠올리며 쿠잔은 떠오른 생각에 먼저 펜을 내려놓았다. 자신이 놓을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무력하게 그녀가 먼저 자신을 버려주기를 조심스럽게 희망했다. 그럼에도 역시ㅡ, 쿠잔은 미약하게 피어오르는 질투에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비죽이며 회식에 참석하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약간의 추한 질투심 속 숨어있는 소심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음. 그리고.. 그때 고백을 했었지. 믿어져? 그녀가 내게 먼저 고백을 했다니까. 나는 이미 마음 곱게 접어서 도무지 내 분수에는 맞지 않을만큼 과분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고백을 하더라고."

 
 

그 상냥한 얼굴로 거절조차 못하게 웃으면서 말이야. 날 찾아오려고 했는데 혹시 부담스러울까봐 엄청 걱정하면서 못 찾아갔다네. 어쩜 생각하는 것도 이리 다정하고 배려가 넘치는지 괜히 그 고백에 웃음이 터졌다니까. 세상에, 우리는 이미 서로를 그리워했던거야. 차이점은 난 마주할 수 없다고 이리저리 피하는 동안 그녀는 온당하게 제 감정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는 것이겠지. 언제봐도 참 당찬 여자야. 그렇지? 담담하게 고백하는 것치고는 소소한 미소가 얼굴 가득 피어오른다. 다시 생각해도 황홀한 순간이었지. 나도 그녀를 좋아한다 부끄럽게 답한 순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던 얼굴도 사랑스러웠고. 희미한 미소를 피워올린 쿠잔이 입가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숨을 수습하며 선글라스 너머 절규하는 얼굴 그대로 얼어붙은 해병의 시체를 발로 툭, 건드리며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뭐. 그래도 꽤 달달한 사랑얘기였지?"



가는 길 조금이라도 따듯했기를 바라. 유언처럼 속삭인 말이 얼어붙은 해군의 뺨에 스러지고 쿠잔은 그대로 고개를 돌려 사납게 싸우는 소리를 고스란히 전송하고 있는 전보벌레를 내려다봤다. 죽여, 이쪽으로 도망갔다. 저쪽으로 몰아붙여! 좋아, 죽였다! 환호와 비명이 날카롭게 뒤섞여 서로의 목숨을 앗아가는 소리나 공허한 세계에 울린다.


생이 끊기고 또다른 가능성이 멸절하는 소리가 끔찍하게 고막을 뚫고 생생하게 너 또한 이 끔찍한 참상에 지분이 있노라고 외친다. 응, 그렇지, 내게도 지분이 있다. 그걸 잊어서는 안되지. 멋대로 죽음의 무게와 생의 무게에서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걸 그녀도 알게 할 생각은 없을 뿐. 자신이 걷는 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것, 그것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았건만 자세한 내막까지 알게 되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미약한 초조함이 불씨처럼 고개를 삐쭉 내밀고 사악한 말을 속살거린다. 그녀는 네게 실망할거야. 완전히 어둠의 길로 들어서서는 티치의 민간인들의 학살도 눈감아주고 있다는 것을 알면 아예 헤어지자고 말해버릴지도 모를걸? 그리고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너는 아주 외톨이가 되겠구나. 더는 그녀의 따듯한 웃음도 만물을 사랑스럽게 보던 시선에서 빗겨나가 유일한 예외가 되겠구나. 속삭이는 음성들을 무시한 채 들어올린 수화기 너머로 낮은 목소리가 유쾌한 듯 울린다.



[처분한건가, 아오키지?]
 
 
 
코드네임으로 불리는 건 싫다고 말했건만. 쿠잔은 짜증스러운 마음으로 얼굴을 구기며 사납게 응답했다.
 
 
 
"...그래."


[제하하하, 만족스러운걸.. 좋아, 이제 다음 할일이 생길 때까지 마음껏 할일 하라구! 난 빡빡한 사람이 아니ㅡ]



듣기싫다. 무심하게 끊어버린 전화에 전보벌레가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리며 눈치를 보았다. 흘끔거리는 시선에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의자삼아 앉아있던 얼어붙은 해병의 망토를 흘겨보았다. 선명하게 쓰여있는 '정의'라는 글자가 마치 넌 이제 이곳의 사람이 아니라는 듯 매섭게 선을 그어두는 것 같아 괜히 이를 악문 쿠잔이었다. 나도 그쪽으로 다시 들어갈 생각 따위는 없어. 저 글자 아래 선 채 얼마나 많은 생을 명분으로 뒤집어버렸던가. 서로 다른 이념에 편가르고, 과격파니 온건파니 선을 가르고 편을 갈라 내세워 자신을 대표로 등을 떠밀었을 때의 더러웠던 감각이 떠오르는 듯했다. 이곳이나 저곳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제 안위를 옮긴 티치의 그늘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늑했고 자유로웠다. 동시에 더 역겹기도 했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그의 손끝 한번에 모조리 죽어나갈 때 눈을 찌푸릴 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을 알면 그녀가 화낼까. 아니, 아마도 그녀는 저번처럼 두루뭉술한 질문에도 명백한 답을 내리곤 활짝 웃어보이겠지. 내 죄책감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받아들여주곤 무한한 믿음을 내어줄 그녀를 떠올리며 이번에도 쿠잔은 다시 한번 버텨보기로 결정했다.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방식은 피가 튀기지 않았으니까, 혈향은 묻지 않을 것이었다. 순식간에 얼어붙어 미처 원망할 틈도 없었으니 괜찮을지도 몰랐다.



"....근별."



조그맣게 속삭인 이름조차 애달파 조심스럽게 입꼬리를 올린 쿠잔은 시선을 돌려 아마 근별이 있을, 언덕을 흘겨보며 다급하게 긴 다리를 쭉쭉 뻗어 허겁지겁 언덕을 넘었다. 조금 길게 언덕을 넘어 마침내 바라본 그곳엔, 새하얀 달빛을 온전히 받으며 돌아보는 그녀가 있었다. 언제나처럼 말갛게 웃음을 터뜨리며 쿠잔, 다정스러운 어조로 제 이름을 불렀다. 날아가듯 달려 행여 날아갈까 조심스럽게 끌어안았을 때, 그는 자신의 사랑의 방식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갖고 싶다.


저 여자의 세상이 자신으로 한정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에 허겁지겁 표정을 관리했지만 한번 떠오른 생각은 멈추지 않고 퐁퐁 솟아나 슬쩍 그의 욕망을 부추겼다. 이제 해군도 아닌데 뭐어때? 그녀는 그를 믿음직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달리 말해서는ㅡ 착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 쿠잔은 미묘하게 올라오려는 입꼬리를 힘주어 내리며 다시 한번 들꽃과 따듯한 하늘의 향이 뒤섞인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버리곤 숨을 들이쉬었다. 찬란하게 피어나는 온갖 향들 속에서, 쿠잔은 메마른 눈동자를 들어올려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눈치를 보는 연구소의 직원들을 향해 사납게 이곳으로 오지 마라 살기를 흩뿌렸다.



자신의 것이 되어달라고 하면, 그리 해줄까. 수없이 옥죄어 줄줄이 딸려오는 의문을 목구멍 깊은 곳으로 밀어넣고는 쿠잔은 무슨 일이냐 해맑게 웃는 근별의 어깨를 살뜰하게 잡았다.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었다. 자신이 혐오스러워 견딜수가 없다고, 흘려온 피가 웅덩이가 되고 바다가 되어 자신을 삼키고 가라앉은 심해에선 자신이 얼려 바스러뜨려 죽였던 것들이 험악하게 손아귀를 뻗어 잡는다고, 그 탓에 발목이 베일 것 같다 한탄을 늘어놓고 싶음에도 능숙하게 뒷말을 꾸역꾸역 삼킨 쿠잔은, 근별의 염려가 섞인 적안을 향해 애써 입꼬리를 당기곤 그저 그 모든 감정을 숨겨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괜찮아요, 쿠잔 씨. 아무리 강한 사람이어도 분명 쉴 곳이 필요한걸요. 쿠잔 씨를 믿어요. 쿠잔 씨의 노력을, 믿어요."


 

환히 웃는 낯으로 제 차가운 뺨을 쓰다듬어 온기를 전하였을 때 쿠잔은 울듯 일그러지는 얼굴에 간신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가, 자신이 그녀의 순수를 보듯, 그녀 또한 자신의 노력을 보아와준 모양이었다.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가혹하게 몰아붙였던 그 노력을 믿어준 모양이었다.

 
 
 
"응. 근별이.. 믿어주니까, 그럼 된거지.."
 
 
 
그것만이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안심이었고, 가여운 스스로에게 내리는 위로였으며 잔인하기 짝이 없는 스스로에게 내리는 형벌이었다. 그녀를 온전히 가질 수 없다 스스로 그어둔 선으로 애써 날카롭게 빚어낸 벌이었다. 그렇기에 근별은 이번에도 찬란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어내곤, 변함없이 영원토록 빛날 순수를 내보이는 것이었다. 그래, 별에게 가치를 어떻게 매기겠어? 그녀는 달보다 더 고아한 빛을 내는 존재였고, 길잃고 어둠 속에서 허덕이는 자신을 인도하는 별빛이었다. 숨막히도록 눈이 찢이지도록 빛나는 순수에 저도 모르게 밀려드는 절망을 인정하고야 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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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MOMO

*해당 글은 커미션 글입니다.


복수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고아라며 비웃음이 박혔을 때에도 딱히 신경쓰이지 않았다. 멋모르고 내뱉는 문장들이 상처가 될리가. 부모가 날 버리고 갔다고 조롱하는 그들의 가련하고도 멍청한 두뇌에는 비웃음조차도 사치였다. 내 부모는, 그들은 전부 세계의 평화에 기여해서 목숨을 내던진 또 하나의 영웅이었다. 그러니 원망따위도 사치에 가까운 것. 스테리는 천천히 무릎을 당겨 제게 매섭게 날아드는 '고아'라는 단어를 애써 흘려들었다.
 
 
원망하지 않는다.
 
습관처럼 중얼거렸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그 말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마도 사무치게 느껴지고 있는 외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아원이라고 하여 모두가 부모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후원자와 살뜰하게 웃음을 흩뿌리며 자랑처럼 주말과 휴일에 사온 사치품들을 들이밀고 웃음소리를 드높이는 아이들도 있었고, 잠시 그저 맡겨둘 뿐이라고 절절한 눈물을 흘리며 재회를 약속하는 가여운 부녀 또한 있었다. 분명 몇밤만 지나면 반드시 데리러 올 것이라며 이를 악물고 지난 숫자를 되새기고 있던 소년 또한 있었다. 적어도 그들은 목표라는 것이 있었다.
 
 
 
찬란하고 순진무구한 웃음을 마땅히 부러워해줘야 할 것을. 착한 아이가 될 필요는 없단다. 쓸모있는 아이가 되렴. 부모의 가르침은 굳건하게 가슴속에 남아 추악한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스테리는 사납게 눈을 뜨고 스치듯 지나간 시간들 속에서 덧없이 져버린 부모의 죽음이 허무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세계정부는 그들의 치부를 들키고 싶어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치부를 치워내고 닦아냈던 이들의 죽음마저도 부정해버렸다. 평생을 바친 헌신이, 핏덩이보다 어렸던 소년을 남겨두고 피눈물을 삼키며 '원대한 뜻'에 어울려 제 목숨을 갈아바친 대가가 바로 방치였다.
 
 
착한 아이가 될 필요는 없다. 그 말은 스테리의 가슴 속 깊게 박혀 조그마한 원망을 만들어내기에는 충분한 틈이었다. 자신의 원망을 인정하고 나서야, 스테리는 비로소 똑바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싫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꺄르륵 웃고 제 부모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평화를 누리는 저들의 무지함이 지독하게 싫었다. 제 자신 하나 지킬 힘 없이 무한한 듯 피묻은 평화를 깨끗하게 바라보는 눈동자가 역겨웠다.
 
 
 
"...원장님. 돈. 벌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내뱉은 문장이었다. 부모는 허망하게 가버렸으나 그들이 남긴 지식들은 결코 헛짓거리가 아니었으므로. 사냥하고 자상했던 원장은 화들짝 놀라 결코 그럴 순 없다 손사레를 쳤지만 글쎄, 사람의 욕망은 무한하고 또 때로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구석에서 얼굴을 들이밀고 잔혹한 미소를 짓곤 했다.
 
 
사람은 변한다. 그렇기에 무서운 존재라는 사실을 이미 예전부터 알고있었기에 스테리는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슬그머니 나와 얘기 좀 하자며 저를 부르는 원장을 비열한 인간이라고 욕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그래도 애들을 팔아치울 수 없다고 중얼거린 원장의 손이 떨린 것을, 그 뒤에 빼곡하게 쓰여있는 장부와 새빨간 색연필로 그어져있던 적자의 숫자들을 떠올린 스테리는 뻔뻔스럽게 결코 팔아치우는 것이 아닌, 명예로운 자리에 추천하는 것 뿐이라며 누가들어도 빤한 거짓말로 그의 기만을 속였다. 제 부모와 같이 갈아넣어질 희생은 간단하게 무시해버렸다.
 
 
 
그렇게 하나둘씩 거슬렸던 아이들을 CP로 추천해 팔아넘겼다. 처음엔 눈물을 뽑아내며 반드시 되돌아올 수 있으니 잊지말라고 했던 원장도 이제는 그저 가는 거냐며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제 손에 여유로워진 장부를 넘길 뿐이었으니까. 고아원에 빼곡하게 있었던 아이들 수십명이 팔아치워지고 다시 새로운 아이들이 버려져 돌아와도 원장은 스테리만큼은 팔아넘기지 않았다. 새로 들어온 아이들은 눈치껏 가장 잘 보여야 할 사람을 찾아 머리를 조아렸고 원장은 자신의 주머니를 두툼하게 만들어준 일등공신을 잊지않고 언제나처럼, '뒷탈이 없을' 아이를 골라 제게 추천하기를 탐욕스럽게 기다렸다.
 
 
 
착한 아이가 될 필요는 없단다. 쓸모있는 아이가 되렴.
 
 
부모의 조언은 현명했다. 동시에 아이에게 냉혹한 가르침이 되기도 했다. 쓸모있는 아이, 스테리는 자신이 버릴 수 없는 패가 되기를 원했다.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고 마침내 높디 높은 곳에 앉아 턱끝으로 사람을 부리고 손끝으로 사람의 생을 손쉽게 빼앗을 수 있는 인물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권좌에 앉아 사람의 생을 개미목숨처럼 쉬이 여기게 되면 허무하게 스러진 제 부모의 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연하다는 듯 사람을 체스말로 버리고 써버린 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와 세계, 상냥한 마음을 가질 권리조차도 빼앗겨버린 스테리에게 남은 목표는 단 하나였다. 더 높은 곳, 아무도 넘보지 못할만큼 압도적으로 높은 곳에 올라 내 위에 사람을 두지 않겠다. 그러기 위해 우선적으로, 귀족이 되어야했다. 평민은 감히 쳐다도 보지 못하고 더러운 얼굴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무례하다 일갈해버릴 수 있는 귀족이 되어야했다. 스테리는 그날 고아원에조차 들지 못하고 빙빙 도는 시궁쥐들을 불러모아 빈약한 빵을 쥐여주고 손쉽게 입양할 아이를 찾는 귀족 부부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그들을 유인해내는 것은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간단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만난 귀족부부와 만난 첫날, 스테리는 비죽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아내기 위해 애썼다.
 
 
 
"호오, 이 아이... 제법.. 귀족같이 생기지 않았나. 디디트, 이 아이는 어떻소? 시궁쥐들 사이에 제법 그럴싸한 생쥐가 하나 있군."
 
 
 
저를 칭하는 호칭은 모욕적이지 않았다. 도리어 생쥐라고 부르며 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한 아웃룩 3세의 손에 꼼꼼하게 끼어있는 순백의 장갑이, 그 위로 버겁게 줄줄이 매달려있는 보석 반지들이 더 눈에 띄는걸. 마침내 기회가 왔다. 아이가 없어 가난하지만 따스하게 맞이해줄 쓸모없는 부모들보다 더 유용하고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감투가 필요한 부모가 왔다. 스테리는 차분하게 읽고있더너 책에 책갈피를 꽂아넣고 천천히 일어섰다. 행동 하나하나, 전부 공을 들여 움직이는 모든 동작들에는 그들이 그토록 기대하는 기품이 서리도록 느긋하게 움직였다.
 
 
 
"어머.. 저 아이.. 정말.. <귀족적>이군요!! 저 아이, 당장 데려가야겠어요."
 
"네? 아, 아아, 스, 스테리 말씀이시군요. 하지만, 하지만 저 아이는.."
 
 
 
귀족적. 기껏해야 행동을 느리게 하고 우아한 척 다 낡아빠지고 색이 바랜 책갈피를 끼워넣는 것 하나뿐이었는데. 보라, 어미의 말처럼 느릿하게 행동하니 고풍스럽다고 칭찬을 내뱉지 않나. 아비의 말처럼 무엇이든 하나하나 행동에 예의를 따지며 깐깐하게 구니 귀족적이라고 제 울타리 안에 기꺼이 집어넣지를 않나. 이제 와서 허겁지겁 소유욕을 드러내는 원장을 향해 스테리는 고운 미소를 지으며 깍듯한 작별인사를 건넸다.
 
 
이 판은 이제 이미 너무 작아졌다. 자신이 앉고 싶은 자리는 왕좌였지, 기껏해야 고아원의 원장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 닳아빠지고 낡아 벗겨진 가죽의자 따위가 탐이 날리가. 그 정도의 자리에서는 사람을 부리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당황스러워하는 원장을 뒤로 하고 새로운 부모가 손을 내밀었을 때, 스테리는 나긋한 미소로 감히 더러운 손으로 잡을 수 없다 말하며 너스레를 떨어 다시 한번 그들에게 아양을 부려주었다.
 
 
기가막히지 않나. 진짜 아들은 귀족의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는다며 인상을 찌푸리고 시궁쥐라 비웃었던 이는 제 입맛대로 군다는 이유로 사랑을 나누어 준다는 것이. 스테리는 고개를 비틀어 어쩔 줄 모르고 다급하게 시선을 바깥으로 옮기는 금발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비록 행동은 자신과 다름이 없음에도 실크와 크라바트로 잘 꾸며진 모습들은 이미 부정한다고 해도 어엿한 귀족의 모습이었다. 귀한 이를 귀히 대접하고 소중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진짜 귀족의 모습이었다.
 
 
물론 그게 부모의 눈에는 아닌 모양이었지만. 구태여 못 보고 있는 것을 짚어줄 의리는 없었다. 그저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려 저멀리 사라지는 사보의 등을 시선으로 쫓으며 꼼꼼하게 창문을 닫아 걸쇠를 부수는 것이 그가 다른 길로 뛰어던 형제를 위해 줄 수 있는 선물이었다. 다시 돌아오지마라, 그래, 차라리 자신처럼 버티고 견딜 수 없다면 답답한 가면 따위는 집어던지고 도망치는 것 또한 괜찮은 선택지가 될 수도 있었을테니까.
 
 
 
[혁명군의 참모총장, 전장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ㅡ]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게 당신 선택이라면. 그리 불꽃처럼 살아가는 것이 형님의 선택이라면 존중은 해줄 수 있소, 이해는 못하겠지만. 아니ㅡ, 이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 목숨이 목숨처럼 느껴지지 않는 자리를 원했다. 하여 그리던 왕좌에 앉고 왕관을 써도 영 어색한 것처럼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느껴진 이유는 무얼까, 아직 스테리는 그 질문에 대답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조금 더 위로, 벌레들과 개미들은 보이지도 않는 곳에 앉고 나서야 사람이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늦은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로소 생이 우스워질 것 같았다.

 
우스워지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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